‘송사천국’ 대한민국 현주소②

어느 분야 못지않게 고소·고발이 끊이지 않는 곳이 바로 정치권이다. 선거철이 되면 특히 의원과 의원, 의원과 기업, 의원과 시민 등 명예훼손에 따른 쌍방 고소·고발 건은 계속해서 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권의 고소·고발은 처음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정도로 떠들썩하다가 시간이 흐르면 고소·고발을 모두 취소하거나 대부분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동안 정계에 있었던 대표적인 고소·고발 사례를 들춰봤다.


<사례1>
한나라당 vs 민주당
BBK 김경준’ 의혹 사건

지난해 17대 대선을 앞두고 이전투구 식으로 한나라당과 민주당(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은 고소·고발을 쏟아냈다. 고소·고발 건은 대부분이 명예훼손으로, 반의사불벌죄에 해당돼 고소인이 취하하면 검찰은 수사를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해 대선후보 한나라당 경선과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의 고소·고발로 인한 수사의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검찰이 정치권 공방에 휘말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대선과 관련해서 고소·고발 건이 가장 많이 나왔던 대표적인 사건은 여야를 막론하고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BBK 김경준’ 사건이었다. BBK 대표 김경준씨가 국가정보원과 정치권의 사전 음모에 의해 귀국했다는 이른바 ‘기획입국’ 의혹은 검찰 수사 결과 ‘혐의 없음’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당시 김씨는 대선 정국을 잘 이용하면 자신의 수사나 재판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 귀국했으며 “BBK의 실소유자는 이명박 후보”라는 김씨의 거짓말에 정치인들이 ‘놀아난’ 것이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와 공안1부는 ‘기획입국’과 ‘BBK 의혹’ 등으로 여야 정치권이 고소·고발을 주고받았던 사건과 관련, 당시 한나라당 홍준표, 정두언, 나경원, 정형근 의원 등과 대통합민주신당 박영선, 김종률, 이해찬 등 여야 정치인 20여명에 대해 결국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검찰은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가 불교방송에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던 정동영 전 후보에 대해선 혐의는 인정되지만 고소가 취소된 점 등을 감안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또 “선거 당시 이명박 후보 부인 김윤옥씨가 고급 외제 시계를 차고 있다”고 주장한 민주신당 김현미 전 의원에 대해선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에 따라 “이명박 후보가 BBK를 100%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 민주신당 정봉주 전 의원과 “이 후보 재산이 8천억~9천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한 자유선진당 곽성문 전 의원 등은 불구속 기소됐다.

또 지난해 한나라당 경선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와 박근혜 후보 캠프가 서로를 상대로 고소·고발을 했다. 그러던 중 이명박 후보 측은 고소·고발을 취하하라는 당 지도부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박근혜 후보를 상대로 한 각종 고소·고발을 취하했다.

취하 건으로는 ▲이 후보의 처남 김재정씨가 박근혜 후보 측 유승민·이혜훈 의원, 서청원 상임고문과 경향신문을 명예훼손 등 혐의로 고소한 사건 ▲김씨가 대주주인 ㈜다스가 이혜훈 의원을 고소한 사건 등에 따른 고소·고발을 취하했다.

이 후보 측은 그러나 고소취하 입장이 관련 의혹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김씨의 부동산 거래 계약서 등 각종 자료를 당 검증위에 제출했다.


<사례2>

청와대 VS 이재오·박계동 의원
이재오·박계동 명예훼손 ‘무혐의’

고소·고발 건 중 청와대가 국회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고발한 사례도 있다. 지난 대선 당시 청와대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한나라당 이재오 전 최고위원에 대해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일부 혐의가 인정된 박계동 전 의원은 약식기소 됐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지난 대선 당시 청와대 공작설을 제기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된 이 전 최고위원을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 전 최고위원은 지난해 6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현해 “청와대 비서관들이 퇴근 후 서울 공덕동 창평포럼에 모여 노무현 정권 연장과 이명박 후보 죽이기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와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말해 청와대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검찰은 이 전 최고위원이 청와대 비서관들의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모임에서 대선 관련 논의가 있었다는 제보를 받은 사실 등이 인정돼 혐의 없는 결론을 내렸다.

검찰은 또 지난해 7월 청와대의 정권재창출 TF팀이 있다고 발언해 고소당했던 박계동 당시 한나라당 위원장에 대해서는 당시 발언에 대한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해 벌금 3백만원에 약식기소 판결을 내렸다.

<사례3>
주성영 의원 VS 고대녀
주 의원 공개사과…고대녀 “절대 용서 못해”


시민이 한나라당 현직의원을 고소·고발해 화제가 되었던 사건도 있다. 지난 6월20일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MBC ‘100분토론’에 고대녀로 알려진 김지윤 학생의 프로필이 기록된 문서를 들고 나와 김씨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주 의원은 “지난주에 MBC ‘100분토론’에 서강대녀와 고려대녀가 나온 적이 있다”며 “고려대 여학생의 프로필이다. 김지윤 학생”이라며 A4용지 한 장을 들어보였다.

이어서 “김지윤은 고려대 학생이 아니다. 고려대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이력을 보면, 민주노동당 당원이고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도 선거운동을 했다. 정치인이다”라며 “그런데 프로그램에 나올 때는 고려대학교 재학생으로 나왔다. 이게 말이 되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지윤씨는 학교 측으로부터 제적됐다가 복학해서 현재 사회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김씨는 “정말 황당하고 화가 난다. 저는 지금 고려대학교에 다니고 있다”며 “2006년 출교 조치 이후 2007년 법원으로부터 무효판결을 받았고 가처분 판결을 통해 학생 신분을 회복했다”고 밝혔다.

또 “저는 몇몇 인터뷰를 통해 제가 출교를 당했었고 민주노동당 당원임을 밝힌 바 있다”면서 “주성영 의원은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저를 마치 전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공중파 방송에서 경솔하게 한 학생의 명예를 완전히 훼손하는 주성영 의원의 행동에 분노를 감출 수 없다”고 전했다.

결국 주 의원은 김씨에게 공개사과를 했고 김씨는 허위사실을 유포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주 의원을 고소·고발했다. 김씨는 “이 사건에 대해 주변에서 질문을 많이 받아 얼마 전 검찰에 문의를 했는데 검찰 측에선 아직 조사 시작도 안 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사례4>

전직 대통령 VS 주성영 의원
DJ, 허위사실 유포·명예훼손 고소


최근 주성영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DJ) 측으로부터 출판물 등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대검찰청에 고소당한 상태다. 전직 대통령이 현직 의원을 상대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주 의원은 지난달 21일 한 라디오 프로 인터뷰에 출연해 전날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정감사장에서 제기한 이른바 DJ 비자금 문제를 다시 발언함으로써 고소를 당한 것이다.

주 의원은 이날 “2006년 3월초 전직 검찰 관계자로부터 1백억원짜리 CD(무기명 양도성예금증서) 제보를 받았다”며 “DJ 비자금 문제는 전부 해외계좌에 연결되어 있고 6조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DJ 측의 법률대리인 이호균 변호사(법무법인 한강)는 이날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낸 보도 자료에서 “이러한 피고소인의 발언은 그동안 미국에 있는 일부 무책임한 교포신문들이 수년 동안 거듭 주장해온 허무맹랑한 내용들이다”라며 “한국의 일부 언론도 이를 받아썼다가 법정에서 사과하고 정정보도를 낸 바 있다”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피고소인은 그 어느 것도 사실로 밝혀진 것이 없음에도 익명의 검찰 관계자를 내세워 마치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의혹인 양 허위의 사실을 적시했다”면서 “국회의원은 일개인이 아니고 국가기관이다. 무책임한 허위 사실을 함부로 퍼뜨려서 국민을 현혹시키고 무고한 사람의 명예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고소 배경을 밝혔다.

<사례5>
언론사 VS정청래 전 의원
문화일보 기자 무혐의 판결에 이의 제기


지난 4월7일 총선을 앞두고 <문화일보>는 민주당 정청래 전 의원이 4월3일 한 초등학교에서 김 모 교감에게 “이런 식으로 하면 다 모가지 잘리는 수가 있어”라고 발언했다는 내용을 보도해 당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정 전 의원은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 및 제보자 2명 등에 대해 명예 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7월24일 서울 중앙지법은 제보자 2명에 대해서만 혐의를 인정하고 해당사의 기자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에 정 전 의원은 8월11일 국회 기자실을 찾아가 “거짓 기사를 쓴 거짓 기자에 대해 검찰이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처리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항고를 해서라도 끝까지 추궁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교감 폭언 사건에 대해 “<문화일보>가 서울 중앙지법에 공개한 취재원은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한나라당 현역 구 의원이었다”면서 “이 한나라당 구 의원은 가짜 학부모를 동원해 <문화일보> 기자에게 허위제보를 하게 하고 문화일보 기자는 사실 확인도 안 한 채 허위 날조 기사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정 전 의원은 “김 교감이 교육청에 제출한 경위서에 따르면 ‘폭언, 폭행을 당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대답했으며, ‘행사장 진입을 막았고 정 의원이 항의를 했다는데’라는 말에는 ‘70% 정도 맞다’고 답한 것으로 돼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문화일보>가 이 내용을 섞어 ‘폭언, 폭행을 당했느냐’는 질문에 ‘70% 정도 맞다’고 대답한 것으로 조작해 기사를 쓴 것이다”고 정 전 의원은 주장했다.

이어 “KBS <미디어포커스>에서 선거 직후 ‘정청래 죽이기’의 실상을 보도하자 이 모 기자가 김 교감을 찾아가 ‘회유성 입 맞추기’를 시도, 녹음까지 하는 비윤리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며 “언론으로서 <문화일보>는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했다.

아울러 정 전 의원은 “이 같은 검찰 수사 결과를 볼 때 <문화일보> 기자에 대해 ‘허위 제보임을 알고도 악의적으로 기사를 썼다’는 양심 고백이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판결을 내린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검찰은 정 전 의원의 고소에 대해 “4월2일자 시비과정에서 고소인 정청래가 S초등학교 교감 K에게 면전에서 ‘잘라버리겠다’고 실이 없고, 위 학교 교장 C로 하여금 3시간 동안 기다리게 하는 등 무례하게 군 사실이 없음에도 <문화일보> 기자인 000, 000이 위와 같은 기사를 작성했고 문화일보 편집국장인 000 등이 위 기사들을 보도해 일부 사실과 다른 내용의 보도가 된 점은 인정된다”고 결론내림으로써 해당기사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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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