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서는 항상 ‘변수’와 ‘이변’이 따라다닌다. 당선이 떼 놓은 당상처럼 여겨지던 후보와 낙선될 것이 불 보듯 뻔해 보였던 후보도 변수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15년 전 <일요시사>가 세상에 발을 내딛던 해 15대 총선에서는 ‘북풍’과 ‘세대교체’ 등 예상치 못한 사태가 선거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많은 이변이 있었던 15대 총선 중 ‘정치의 1번지’라 불리는 종로에서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4선의 이종찬 의원이 정치 초년병 이명박 후보에게 일격을 당해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명박·이종찬 “엎치락뒤치락”
노무현 고군분투, 뒤집기 대망
15대 총선에서의 유권자들은 ‘정치파괴의 길’을 선택한 듯 보였다. 만년 야당의 도시였던 서울이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지대로 탈바꿈 했는가 하면, 내로라하는 정치거물들은 정치신인 돌풍에 휘말려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15대 총선결과 집권당인 신한국당이 과반수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서울 등 수도권에서 승리를 거둬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원내 안정 의석을 확보했다. 반면 국민회의는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자민련은 약진세를 보여 정치권이 ‘3당’ 구조로 재편됐다.
특히 서울지역 절반이 넘는 곳에서 신한국당 후보가 당선돼 여당이 서울에서 승리하는 이변을 낳았다.
세계 정치사상 ‘전무’
15대 총선은 많은 중진의원들에게 중대한 도전이었다.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고조됐고 선거풍향을 예측하기 어려운 지역이 광역화됐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는 이번 총선의 고비만 넘으면 97년 대통령 선거나 차차기 등 ‘3김’ 이후 시대를 기대할만한 사람도 상당수였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중진이면서도 당선을 확신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총선 ‘빅3’로 분류된 서울 종로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의원은 신한국당 이명박 후보, 청문회 스타 노무현 후보와 사활을 건 결전을 벌였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을 버리고 종로 출마를 선언한 이른바 ‘꼬마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깜짝 등장을 반겼다. 노 후보가 야권의 표를 상당 부분 당겨갈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의원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이종찬 의원은 전혀 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노 후보가 뛰어들어 청년층을 겨냥한 특유의 ‘바람돌이’ 역할을 해 이 후보의 득표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받아 들였고, 여당에서 야당으로 당을 바꿨지만 오랫동안 다져온 조직과 30%에 육박하는 호남표를 믿었다.
노 후보는 부산 지역구를 버리고 상징성이 강한 종로를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전국 제일의 관심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워 민주당 바람을 전국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는 4만(이명박), 3만7000(이종찬), 1만7000(노무현) 표 순이었다. 이 선거는 세계 정치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진기록이다. 훗날 대통령을 주고받을 사람들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한 지역구에서 대결한 것이다. 미국에 대통령이 43명이나 있었지만 같은 지역구에서 싸운 사람은 없었다.
다선의원 ‘대 학살극’
당시 총선은 속출하는 이변과 반전에 충격 그 자체였다. 이종찬 의원이 이명박 후보에 밀려 낙선함은 물론, 당시 김대중 총재와 정대철, 조세형 부총재 등 당 지도부가 대거 낙선하고 박실, 김덕규, 김병오 의원 등 내로라하는 야당 정치거물들이 정치신인 돌풍에 휘말려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오죽하면 15대 총선은 다선의원에 대한 ‘학살극’으로까지 불리고 있다.
이런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북풍’이라는 막판 변수였다. ‘한국유권자운동연합’과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 선거 후 실시했던 당시 설문조사에 따르면 총선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북한의 정전협정파기 선언’과 ‘비무장지대 병력투입’을 꼽았다.
또한 전국적인 ‘세대교체’ 바람 또한 거셌다. 당시는 재계 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가 나면서 드러난 권력형 금융 부정 비리에 수십 명의 정치인들과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까지 연루된 일명 ‘한보사태’가 불거졌던 시기다. 당시 탄생한 정치신인의 수만 140명이었다. 당시 이종찬 의원이 이명박 후보에게 진 것도 ‘세대교체’의 바람이 거셌던 것이 한몫 했다.
15대 총선시절 종로에서 결전을 벌였던 이들은 15년이 지난 현재 당시의 승자 이명박 후보는 17대 대통령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다. 한 정권 앞서 노무현 후보 또한 16대 대통령으로서 임기를 마쳤으나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한편 이종찬 의원은 15대 총선이후 1997년 대통령 인수위원회 위원장, 1998년 김대중 정부 초대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계속 했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다음 정치권 전면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묻혀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