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예술감독 김성녀) 주역 중 한명인 소리꾼 민은경(35)은 지난겨울 지리산서 일주일 간 '산(山)공부'를 했다.
'산공부'는 소리꾼들의 정통 수련 방법으로 산에서 숙식하며 판소리를 익히는 일이다. 어릴 때 방학마다 산 속에 한달간 틀어박혀 소리를 배운 습관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장충동 국립극장서 만난 민은경은 "명창 김소희 선생님을 비롯해 유명한 선생님들이 소리를 하셨던 곳이었다. 정기가 좋아 그런지 소리가 잘 들리고, 소리도 잘 나왔다. 그 기를 무시할 수가 없더라"고 웃었다.
"판소리는 말 그대로 판에서 나는 소리에요. 인간이 내는 소리뿐만 아니라 판(장소)에 따라 바람 소리, 물소리, 귀신 소리 등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죠."
민은경이 이 판의 소리를 공연장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 '완창판소리'의 올 상반기 첫 공연을 장식한다. 오는 25일 오후 3시 장충동 국립극장 KB하늘극장서 '민은경의 심청가'를 펼친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짧게는 3시간에서 길게는 8~9시간까지 완창하는 무대인만큼 박동진 명창을 비롯해 성창순·박송희·성우향·남해성·송순섭·안숙선·신영희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만이 올랐던 꿈의 무대다.
지금까지 30여 년간 270여 회 공연되며 소리꾼에게는 최고 권위의 판소리 무대를, 관객에게는 명창의 소리를 매달 접할 기회를 제공해왔다.
이번 상반기 '완창판소리'는 탄탄한 소리 실력을 바탕으로 국립창극단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단원들을 주목하는데 민은경이 첫 주자로 나서게 됐다.
민은경은 애초 2~3년 전에 이 무대에 오를 계획이었다. 하지만 "소리가 자신과의 싸움인데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했다. "아직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공부 단계라고 생각해서 도전하게 됐다"며 "물론 선생님들만큼 잘할 수는 없지만 그 분들의 맥을 이어갈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겸손해했다.
중요 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인 민은경은 이번에 강산제 '심청가'를 완창한다. 강산제는 고(故) 박유전 명창이 조선 고종 시대에 창시한 유파로 서편제의 애잔함과 동편제의 웅장함이 어우러진 소릿제다.
그 중 '심청가'는 강산제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소리 중 하나다.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분명한 성음과 강인한 통성이 특징인 민은경에게 어울린다.
4시간 이상 소리를 내는 일은 상당한 체력도 요구한다. 한남동에 사는 민은경은 산을 타고 극장에 출퇴근하며 체력을 길렀고, 고기는 물론 처음으로 보약도 챙겨먹었다.
객석서 같은 시간 동안 소리를 듣는 일은 관객들에게도 부담이다. 퓨전 밴드 보컬, 소리꾼 이자람·뮤지컬스타 차지연과 함께 뮤지컬 <서편제> 주역을 맡는 등 다방면서 활약한 민은경은 연극적인 요소를 더한 재미로 이 어려움을 격파한다. 물론 소리의 뿌리는 단단히 붙잡고 있다.
전남 목포서 어린 시절을 보낸 늦둥이인 민은경의 재능은 음악을 좋아한 사업가 부친이 발견했다. 어릴 때부터 TV서 흘러나오는 주현미의 노래를 구성지게 따라 부르는 등 항상 흥얼거리던 그녀를 눈여겨봤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시립국악원의 명창 안애란 문하에 맡겼다. 비보이 팝핀 현준의 아내인 국립창극단 출신 박애리가 선배로 같이 수학했다.
20대에는 활동을 보폭을 넓혔다. 극단 미추의 마당놀이 '심청'에 출연했고, 방송에서 가수 JK김동욱과 함께 노래하기도 했다. 대학시절 몸담은 밴드에는 약 6년간 있었다.
"밴드에 있었을 때는 대중음악을 주로 불러서 목소리를 예쁘게 내야 했어요. 주변에서 두 가지를 병행할 수 있겠느냐고 걱정을 하셨죠. 하지만 제 뿌리만큼은 흔들리지 않게 노력했어요."
2013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이후에는 창극에 관심을 쏟았다. 민은경과 함께 이소연, 정은혜(퇴단)가 입단 동기인데 이들은 '황금 트로이카'로 통한다.
"20대 중반까지는 노래에 많이 치중을 했어요. 마당놀이, 뮤지컬을 거치면서 이 모든 것이 판소리 안에 다 들어있다는 걸 알았죠. 소리를 더 잘하기 위해서는 극화된 공연 역시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창극단에 입단했죠."
자그마한 체구에 동안인 그녀에게는 주로 어린 역이 주어졌다. 입단 한참 전인 2006년 <십오세나 십육세 처녀>의 심청 역을 비롯해 <서편제> 어린 송화 역 등이 그렇다.
하지만 강단 있게 폭발력이 똬리를 튼 소리를 들려주는 그녀에게 '수퍼 땅콩'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점차 다양한 색깔의 캐릭터가 주어졌다. 2014년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의 춘향 역이 대표적이다.
루마니아 출신의 거장 연출가인 서반은 춘향에 주로 녹아든 여린 이미지 대신 굳세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는 힘을 발견했고, 그것을 민은경에게서 또 찾아냈다.
2005년 재일 연출가 정의신이 최초로 창극에 도전한 작품인 <코카서스의 백묵원>서 처음으로 할머니 역을 맡아 귀여움과 미모를 싹 지운 연기 역시 민은경의 새로운 얼굴이었다. 고선웅 연출의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역의 당찬 옹녀 역에도 잘 어울린다는 평도 나온다.
한국무용, 기타 그리고 탭댄스까지 배우며 자신의 가능성을 넓히고 있는 민은경은 "뿌리는 간직하되 재미있는 소리꾼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소리라는 것 자체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거잖아요. 저 역시 생생한 재미를 관객들에게 드리고 느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