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위기 ③

IMF세대들의 ‘통한의 목소리’

 

 

IMF의 삭풍이 몰아쳤던 1990년대 후반 대학교를 졸업한 IMF세대.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풍요로움 속에서 청소년기와 20대 초반을 보냈던 그들은 앞으로 남은 미래도 장밋빛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딛으려는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IMF시대라는 괴물과 취업전쟁, 그리고 냉혹한 현실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은 삶의 방식과 태도, 사고방식까지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 속에 버려졌다. 그리고 10년 후인 지금, 그들은 여전히 힘들다. 지난 10년간의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은 세계적 경제공황 속에서 물거품이 될 위기다. 하루하루가 위태한 30대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IMF는 벗어났지만 고통은 10년 째

컴퓨터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 개발팀에 근무하는 전모(38)씨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10년간 하루도 위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 밑에서 부족할 것 없는 청년기를 보냈던 전씨. 대학시절에도 아르바이트 한 번 안 해봤을 만큼 경제적 풍요로움을 누렸다. 자신의 삶은 앞으로도 쭉 평화롭고 안정적일 거라는 전씨의 기대가 무너진 것은 대학 졸업을 몇 달 남기지 않았을 때였다.교과서에서나 보던 ‘IMF’란 세 글자가 연일 뉴스에 나올 때만 해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일 거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IMF의 직격탄은 전씨의 가정에도 떨어졌다.
퇴직을 10여년 앞둔 아버지가 ‘명퇴’를 당하면서 가정경제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퇴직금으로 받은 2억원 남짓한 돈과 모아둔 돈을 합해 시작한 사업이 화근이었다. 체계적인 준비 없이 뛰어든 사업은 전씨의 가정에 별 보탬이 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1998년 8월, 코스모스 졸업을 했다. 서울 소재 사립대 공대에 다녔던 그는 유례없는 취업전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선배들이 쉽게 들어갔던 기업들에 수십 번 이력서를 냈지만 합격소식은 남의 일이었다. 결국 눈높이를 낮춰 이듬해 봄, 중소기업에 입사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씨는 대학 때 마지노선으로 생각했던 연봉의 절반수준밖에 안 되는 급여를 받으며 일주일에 6일씩 야근을 하며 2년간의 직장생활을 했다. 돈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경제를 떠안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점점 설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20대 후반을 아등바등 살다 맞이한 30대는 더욱 매서웠다. 그가 다녔던 회사가 도산해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된 것.
몇 개월을 실업급여에 의존해 살아가던 전씨는 선배의 소개로 또 다른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규모도, 연봉도 적지만 내실 있는 회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회사에 몸담고 있다.
더 조건이 좋은 회사로 옮기려고도 해봤지만 팍팍한 살림살이 속에서 자기계발을 하며 몸값을 올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 5년 전 결혼하면서 생긴 아파트대출금과 각종 은행대출이자를 갚느라 휴직을 하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다. 여기에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사교육비 걱정은 덤이다.
몇 달 전부터 그를 짓누르는 또 한 가지는 지난 해 무리를 해가며 산 펀드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 반토막이 나는 것도 시간문제란다.
전씨는 “IMF시대를 벗어난 지 10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난 한 번도 IMF세대라는 걸 잊어본 적이 없다”면서 “아버지가 40대에 누렸던 경제적 안정을 몇 년 후에나 맛볼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전씨처럼 IMF를 즈음해 사회에 뛰어든 30대들은 지난 10년을 돌아볼 때면 소주 한 잔이 생각난다. 1970년에서 1975년 전후로 태어난 이들은 이전 세대가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맞이했다.
물론 지금의 10대와 20대들이 맛보는 정도의 풍요로움은 아니지만 ‘내 자식에게만큼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부모세대의 뼈아픈 희생으로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 고생 없이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대학교만 졸업하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로 다가올 시련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바로 몇 해 전에 졸업한 선배들을 봐도 그랬다. 그들에게 대학교는 자유와 젊음으로 대변되는 낭만의 캠퍼스였고 졸업만 하면 치열한 경쟁 없이 쉽게 직장을 얻었다. 이 때문에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나 막막함은 그리 크지 않았다.
92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가 1999년에 졸업한 김모(37)씨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어렵게 대학에 들어갔지만 대학교에 가서 특별히 공부를 한 기억은 없다”며 “마치 고3처럼 공부한다는 지금의 대학생들을 보면 우리 세대는 편한 대학시절을 보낸 셈”이라고 말했다.
IMF 세대는 또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배낭여행 1세대이기도 했다.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가 내려지면서 이들의 무대는 해외로까지 넓혀졌다. 이로 인해 보다 넓은 시각을 가졌고 다가올 사회생활도 두렵지 않았다.

대학졸업과 함께 IMF시대 맞아 냉혹한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
치열한 취업경쟁 뚫은 뒤 구조조정과 무한경쟁에서 고군분투


그러나 이들이 사회에 발을 들이기도 전, 대한민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1997년 11월21일, 경제국치라 불리는 IMF가 시작되고 희망은 절망으로 변했다. 외환정책의 실패,  위험성 대출자산 증가 통제불능으로 인한 기업의 연쇄도산, 기업투자의 부실화 등 각종 구조적 요인으로 발생한 위기는 여유로웠던 이들의 인생에 태클을 걸었다.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신입사원을 뽑는 기업의 수가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다. 이전만 하더라도 4~5월이면 대기업들은 공채사원 모집으로 수천 명의 신입사원을 뽑았다. 그러나 1998년 상반기 신입사원을 뽑은 대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취업준비생은 이에 비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IMF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이기도 하다. 1970년에서 1972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의 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통계청의 ‘2005년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출생인구가 가장 많은 해는 1971년으로, 87만5천1백87명이나 됐고, 1970년(85만9천8백17명)과 1972년(85만9천5백12명) 생이 뒤를 이었다. 이는 가장 수가 작은 2005년생(41만3천8백5명)에 비하면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이로 인해 1998년 20대 실업자는 52만명에 달했다. 이전 해의 27만여 명보다 2배 가까이 많은 수다.
이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고생 끝에 취직했다고 해서 안전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언제 자신이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맞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직장생활을 해 나갔다.이때부터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사라지고 있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직장이 간부급으로 승진해 정년퇴직을 보장받는 곳이 아니라 다른 직장으로 옮겨가는 교두보의 역할만을 할 뿐이란 것.
IMF를 벗어나고 21세기를 맞이했다고 해서 이들 세대의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결혼적령기를 맞은 이들은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값이 폭등해 월급쟁이에게는 전셋집을 마련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삶의 질은 높아만 갔다. 집은 없어도 차는 있어야 하고, 명품 하나쯤은 있어야 대접받는 시대가 왔다. 여기에 주6일제에서 주5일제로 바뀌면서 여가생활을 즐기는 데 드는 돈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하모(39)씨는 “아직까지 아파트 대출금을 갚는 형편이지만 가족 여행과 취미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 저축할 몫이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전 세대에 비해 기본적인 생활비도 늘 수밖에 없다. 휴대폰, 인터넷 등 정보생활에 필요한 돈이 수도세처럼 빠져나가고 사교육비도 늘어만 간다. 그리고 이들 세대의 자녀들은 사교육비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중, 고등학교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 부담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여기에 몇해 전부터 광풍처럼 불었던 펀드와 주식바람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이전 세대보다 훨씬 쉽고 가볍게 재테크를 생각하는 30대들은 실제로 재테크로 짭짤한 맛을 본 사람들이 많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경제 불황은 대박의 꿈마저도 앗아갔다.
불안한 직장생활의 마지막 보루로 투자했던 펀드와 주식은 바닥으로 치닫기 일쑤고 어렵게 대출을 받아 산 아파트 등의 부동산도 날이 갈수록 값이 떨어지고 있다.
직장인 박모(37)씨는 “틀림없는 정보라고 해서 믿고 산 펀드의 수익률이 끝도 없이 떨어지고 있어 자다가도 벌떡 깬다”면서 “주식실패로 자살했다는 우울한 이야기가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런 상황에서 30대들의 목을 조이는 또 다른 것은 ‘무서운 후배’들이다. 어느 세대든 후배들이 자신들을 치고 올라와 위협하는 것은 순리(?)겠지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이들의 후배는 누구보다 능력 있는 세대다.
10대 시절에 IMF를 겪고, 바로 윗세대들이 얼마나 냉혹한 사회에서 일하는지를 지켜봤던 이들은 어느 세대보다 철저히 준비하고 사회에 발을 들였다. 대학교는 술을 마시고 연애나 하는 곳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학원’ 정도로 여긴 ‘후배’들은 고3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많은 투자를 쏟아 취업문을 통과한 인재들이다.
게다가 30대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기기 힘든 것은 이들이 가진 정보력이다. 20대 후반에서야 인터넷을 접한 IMF세대와 달리 이들은 이미 10대부터 자유자재로 인터넷을 가지고 논 세대. 무려 10년이란 차이를 따라잡는 것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호텔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모(39·여)씨는 “언젠가 부장님이 나와 후배에게 같은 일을 시킨 적이 있는데 후배는 나보다 24시간이나 빨리 보고서를 제출했다”며 “일한 경력은 내가 훨씬 길기 때문에 당연히 후배를 이길 줄 알았는데 인터넷을 이용한 정보력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IMF세대인, 30대 후반을 맞은 이들은 예고도 없이 가장 치열한 세상 속으로 들어온 뒤 10년 동안 무한 경쟁 속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IMF보다 더 혹독한 경제위기라는 지금, 10년 전의 잔혹한 추억을 떠올리며 불안에 떨고 있다.
 

IMF 처녀에서 88만원 세대까지 ‘그때 그 유행어들’
IMF 이후 취업난 빗댄 신조어 쏟아져


IMF 이후 10년 동안 계속 되고 있는 취업난과 청년 실업은 각종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 용어들은 우울한 현실 속에서 쓴 웃음을 주며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됐다. 잠깐 사용되다 사라진 신조어와 관용어로 굳혀진 용어들을 되돌아보자.

IMF 처녀
IMF시대였던 1990년대 후반 생겨난 신조어.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던 당시 기혼녀부터 해고시키는 회사방침으로 인해 결혼을 하고도 처녀행세를 하는 유부녀를 일컫는 말. 심지어 결혼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거나 남편과 당분간 따로 사는 등 직장을 사수하기 위한 당시 직장인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처절했다.

갤러리족
주인의식 없이 회사 돌아가는 대로 그저 따라다니다가 그만둘 때는 미련 없이 떠나는 직장인들을 일컫는 말. IMF 후 구조조정으로 인해 직장인들이 강제 퇴직당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이까지만 해도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를 평생직장으로 여겼지만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더 나은 직장이 나오면 미련 없이 직장을 옮기는 풍속도가 생겼다. 갤러리족이라는 이름은 회사의 운명은 상관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마치 골프장의 갤러리들이 멋진 플레이가 나오면 박수를 쳐 주고, 선수가 이동하면 따라 나서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생겨났다.

각종 생선 시리즈
외환위기 이후 직장인들의 목숨과 관련한 신조어들도 연일 생성됐다. 명예퇴직자를 이르는 ‘명태족’, 하루아침에 생매장당한 직장인인 ‘생태족’, 어느 날 황당하게 잘린 직장인을 말하는 ‘황태족’, 30대에 일찌감치 잘린 조기 명퇴자를 일컫는 ‘조기족’, 퇴직금을 두둑이 받은 명예퇴직자를 이르는 ‘알밴 명태족’ 등이다. 이들 용어 중 명태족 등은 지금도 쓰이며 IMF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고공족(考公族)
구조조정으로 해고당하는 이들이 늘면서 해고의 위험성이 없는 공기업과 공무원이 큰 인기를 얻으며 생긴 용어다. 고공족은 고시건 공무원시험이건 일단 붙고 보자는 생각으로 공부를 하는 수험생들을 일컫는다.


공휴족(恐休族)
쉬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신조어. 이들은 주로 취업에 부담을 느낀 대학생들로 방학 중에도 쉴 틈 없이 학업 외에 3~5개 활동을 동시에 한다. 이들은 어학공부, 각종 아르바이트, 봉사활동, 기업 인턴십, 자격증 취득 등 졸업 후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마다않고 한다.

이태백·삼태백
청년실업은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이란 말을 만들었다. 장기화된 취업난은 연령대를 넓혀 30대 태반이 백수라는 ‘삼태백’으로 바뀌기도 했다.

대학 둥지족
취업이 어려워지자 휴학을 하며 졸업을 미루는 학생을 일컫는다. 이들은 어학연수, 인턴쉽 등을 핑계로 휴학을 밥 먹듯하며 사회로 나가는 시간을 유예시킨다.

버블리족
‘거품족’이라고도 하는데 1986년부터 1990년까지 거품 경기 때 입사했거나 대학생활을 보낸 직장인 중 거품경기가 사라지면서 급변하는 기업 조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직장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 버블리족의 특징은 무관심·무능력·무경쟁으로 조직의 입장보다는 개인적 관심에의 일을 추진하고 모든 책임을 조직에 돌리는 것. 또 자신에 대한 남의 평가에 대해 관심이 없고 경쟁의식도 없으며, 근무시간에 조직 업무에 대한 집중도 취약해 공사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88만원 세대
20대 비정규직 노동자가 약 88만원을 받는다는 뜻. 88만원은 비정규직 전체의 평균 임금(1백19만 원)에 20대 평균 소득 수준 비율인 74%를 적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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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