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새, 갈대 명승지와 함께하는 '맛기행' ①전남 해남

갈대밭과 삼치회로 즐기는 남도의 가을

가을 여행의 주인공은 단풍이라지만, 쓸쓸한 가을의 정취를 온전히 느끼게 해주는 것은 갈대 아닐까.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를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면 가을이 왔음을 온몸으로 실감한다.

갈대 하면 떠오르는 전남 순천만과 충남 서천 신성리는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아가는 곳이다. 올해는 전남 해남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해남 서쪽에 자리한 고천암호는 국내에서 가장 광활한 갈대밭을 보여준다. 여느 갈대밭과 달리 차를 타고 다니며 풍경을 즐길 수 있다.

해남은 맛 여행지로도 국내 어느 고장에 뒤지지 않는다. 이 무렵이면 고소한 기름기를 잔뜩 머금은 삼치회가 미식가들의 젓가락을 분주하게 만든다. 가을 분위기 가득한 갈대밭 드라이브와 푸짐한 삼치회 한 상은 최고의 가을 여행을 위한 소품이 된다.

해남 하면 떠오르는 여행지는 땅끝마을이지만, 이맘 때 해남 여행의 첫머리에 두어야 할 곳은 고천암호다. 해남군 화산면을 중심으로 해남읍과 황산면 일대에 자리한 고천암호는 1988년 고천암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생겼다. 호수와 간척지 등을 합쳐 넓이 2400만여㎡(726만여평), 둘레 14km에 달한다. 특히 해남읍 부호리에서 화산면 연곡리까지 펼쳐진 갈대밭은 국내 최대 규모로 꼽힌다. 가을바람의 지휘에 따라 넘실거리는 갈대의 군무는 멀미가 날 정도로 아름답다.

탐방로가 잘 갖춰졌고 정원처럼 정비된 순천만이나 서천 갈대밭과 달리, 고천암호는 이국적인 풍경으로 여행객을 불러들인다. 둑 위에서 바라보는 갈대밭은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으면 돌아보기 힘들 정도로 광활한 갈대밭에 전봇대가 거의 없다는 것이 매력. 가도 가도 탁 트인 지평선이 이어진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없어 인라인스케이트나 자전거 동호인도 즐겨 찾는다.

이국적 풍경


고천암호는 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 무대가 되었다. 드라마 〈추노〉에서 대길(장혁 분)과 태하(오지호 분)가 목숨 건 대결을 펼치기도 했고, 영화 〈서편제〉 〈살인의 추억〉 〈청풍명월〉 등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드넓은 갈대밭은 철새를 불러 모은다. 고천암호는 한반도에서 제일가는 철새의 낙원이다. 바다와 갯벌이 간척 사업으로 드넓은 농토가 되면서 겨울 철새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호수 주변의 무성한 갈대밭은 철새를 위한 은신처가 됐고, 추수가 끝난 농경지는 그들의 먹이 창고 역할을 했다. 고천암호에는 가창오리를 비롯해 10여 종 20만여마리가 겨울을 난다고 알려졌다. 철새 탐조에 좋은 시기는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하이라이트는 해 질 무렵 가창오리의 군무로, 고천후조(庫千候鳥)라 하여 해남8경에 속한다.

해남은 남도 맛의 본고장이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도 상다리 부러질 듯한 밥상을 받을 수 있다. 떡갈비, 낙지, 짱뚱어, 한정식 등 하고많은 음식 가운데 가을 해남의 최고 별미를 꼽으라면 단연 삼치회다.

고등어과의 등 푸른 생선인 삼치는 도시에서 구이나 조림을 해 먹지만, 남해안 사람들은 회로 즐긴다. 성질 급한 삼치는 잡자마자 죽기 때문에 싱싱한 삼치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곳에서나 회로 맛본다. 해남은 고흥, 여수 등과 함께 맛있는 삼치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삼치가 가장 맛있을 때는 등과 배에 기름이 오르기 시작하는 9월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삼치는 활어회로 먹지 않는다. ‘당일 바리’라고 부르는 갓 잡은 삼치는 질기고, 별다른 맛이 없다.

삼치를 맛있게 먹으려면 적어도 하루는 기다려야 한다. 아이스박스나 냉장고에서 하루 동안 숙성시키면 살이 연해지고, 감칠맛도 한결 더하다. 은백색을 띠는 뱃살은 지방 함량이 많아 고소하고, 등 쪽은 담백한 맛이 난다.

해남의 별미


해남 사람들은 삼치회를 초장에 찍어 먹지 않는다. 이곳에서 삼치회를 먹는 방법은 독특하다. 먼저 두툼한 해남 햇김에 고슬고슬한 밥 한 숟가락 담는다. 밥에 커다란 삼치회 한 점을 얹고, 다진 파와 마늘 등으로 만든 양념장을 올린다. 여기에 해남 배추로 담근 묵은 김치 한 점을 더하면 삼치삼합이 완성된다. 삼치회를 한 점 맛보면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씹지 않고 혀로 즐길 만큼 부드럽다.

가을 해남의 정취를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곳으로 대흥사가 있다. 두륜산 자락에 깃든 대흥사는 오랜 역사와 그윽한 정취를 자랑하는 남도의 대표 절집 가운데 한 곳이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한 사찰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이던 서산대사가 입적한 뒤 봉안되었고,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초의선사도 오랫동안 머물렀다.

대흥사는 조선 후기 명필의 글씨가 이곳저곳에 현판으로 걸려 ‘서예 박물관’으로 불린다. 대웅보전 현판은 18세기 명필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무량수각과 일로향실, 동국선원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해탈문에 사천왕상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동서남북을 둘러싼 천관산, 선은산, 달마산, 월출산이 사천왕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흥사 앞까지 차를 타고 갈 수 있지만 걸어볼 것을 권한다. 매표소부터 일주문까지 4km에 이르는 장춘숲길은 삼나무와 편백이 빽빽하다. 예부터 구곡장춘(九曲長春)이라고 했다. 아홉 굽이 숲길이라 ‘구곡’, 이 긴 길이 봄에 좋아 ‘장춘’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가을 운치도 봄 못지않다.

철새의 낙원 드넓은 고천암호
두륜산 자락에 깃든 역사와 정치

숲길은 매표소 오른쪽으로 난 작은 산책로에서 시작한다. 측백나무와 편백이 가득한 숲길은 가을의 청량함을 그대로 전해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지럽던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삼나무와 너도밤나무, 동백나무가 늘어선 숲길 옆으로 시원한 계곡물이 흐른다. 흙길이 끝나면 나무 데크 길이 나오고, 30분 남짓 걸으면 주차장에 도착한다. 주차장에서 매점 앞쪽은 대흥사로 가는 길이고, 뒤쪽은 땅끝천년숲옛길로 이어지는 길이다.

대흥사 가는 쪽으로 길을 잡으면 한옥 한 채가 보인다. 대흥사를 찾는 손님을 위한 숙소 ‘유선관’이다. 한때 남도의 예인들이 들락거리던 명소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진돗개 누렁이가 등산객의 길 안내까지 한다고 나왔다. 영화 〈서편제〉 〈장군의 아들〉 등을 이곳에서 촬영했고, 예능 프로그램 〈해피 선데이―1박 2일〉에 소개된 이후 더 유명해졌다.

해남에 온 이들은 모두 땅끝으로 향한다. 솔숲이 바다를 둘러싼 땅끝송호해변을 지나면 땅끝마을이다. 북위 34도17분38초. 섬을 제외한 한반도 땅덩어리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이다.

땅끝마을에는 횃불 모양 땅끝전망대가 있다. 이곳에 서면 한폭의 풍경화가 펼쳐진다. 오목하게 자리한 땅끝마을 앞쪽으로 유람선이 정박하고, 넓은 전복 양식장은 바다에 펼쳐놓은 바둑판같다. 망망대해에는 작은 섬이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하다. 진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흑일도와 노화도, 보길도 등 크고 작은 섬이 점점이 떠 있다.

땅끝마을

전망대 아래 토말비까지 벼랑을 따라 걷기 좋은 산책로도 조성됐다. 땅끝은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다. 연말이면 이 땅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기 위해 여행객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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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