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집-굿바이 2010> ③재계 달군 핫 키워드 7

말 많고 탈 많았던 경인년 ‘정신없이 갔다’


지긋지긋’ 글로벌 금융위기 끝난 안도감 잠시
곳곳서 뿜어져 나온 ‘냉기’로 다시 긴장모드

2010년 재계는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지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온 ‘냉기’로 다시 긴장모드가 조성됐다. 경인년 재계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굵직굵직한 일곱 가지 이슈로 되돌아봤다.

2010년 불어 닥친 스마트폰 열풍은 IT업계의 최대 이슈였다. 그 여파가 생활의 방식마저 바꿀 정도로 컸다.
지난해 12월 애플의 ‘아이폰’이 국내 출시되며 불붙은 스마트폰 시장은 지난 1년간 급성장했다. 2010년 한해 국내 스마트폰 가입자는 무려 600만명에 달한다.

삼성 웃고 LG 운
‘스마트폰 열풍’


지난해보다 12배가 늘어난 규모다. 휴대폰 판매순위도 1∼4위를 모두 스마트폰이 싹쓸이했다. 내년엔 스마트폰의 휴대폰 시장 점유율이 50∼60%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애플에 비해 뒤늦게 스마트폰 ‘갤럭시S’를 내놨지만 대히트를 쳤다. 아이폰은 160만대가, 갤럭시S는 출시 5개월 만에 무려 180만대가 팔렸다.

부진에 허덕이던 팬택은 스마트폰 바람을 타고 스마트폰 시장 2위로 올라섰다. 팬택은 ‘시리우스’ 12만대, ‘이자르’ 25만대, ‘베가’ 24만대, ‘미라크’ 19만대의 국내 판매고를 올렸다. 반면 LG전자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LG전자는 지난해만 해도 30%의 국내 휴대폰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으나, 올해 반토막이 났다.

실적도 스마트폰 분야에 대한 부진으로 3분기 영업이익이 적자로 전환되는 굴욕을 당했다. ‘옵티머스’시리즈로 분위기 반전을 노리고 있지만, 과거의 점유율을 되찾을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저주만 내린
‘M&A 태풍’

올해 재계엔 인수·합병(M&A) 태풍이 몰아쳤다. 그 어느 때보다 기업 M&A가 활발했다. ‘주인’을 기다린 매물들도 하나같이 대어급이라 경쟁이 치열했다. 가장 관심을 모은 인수전은 현대건설이다. 현대·기아차그룹과 현대그룹이 ‘혈투’를 벌인 결과 현대그룹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듯 했으나, 현재 돌아가는 상황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대혼란을 겪고 있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인수금액으로 약 5조5000억원을 제시했는데, 돈이 없는 게 문제다. 상당 부분을 차입하다보니 뒷말과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결국 채권단은 현대그룹으로의 현대건설 매각작업이 중단되는 쪽으로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현대그룹으로선 ‘다잡은 고기’를 놓치기 일보 직전인 셈이다.

외환은행도 주인을 찾았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하나금융지주는 4조7000억원짜리 외환은행을 단숨에 낚아챘지만, 넘어야 할 산이 첩첩산중이다. 아직 투자자를 유치하지 못했고, 외환은행 내부의 반발이 심하다. ‘먹튀’론스타의 배를 불려준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비난도 적지 않다.

두 인수전이 난항을 겪자 재계에선 ‘승자의 저주’가 자주 거론됐다. 2006년 대우건설을 인수한 대가로 유동성 위기에 몰린 금호아시아나그룹, 2008년 대우조선해양을 먹었다가 감당이 안 돼 도로 뱉은 한화그룹이 대표적이다.

2006년 홈에버를 인수한 이랜드그룹, 2007년 남광토건을 인수한 대한전선그룹, 2008년 하이마트를 인수한 유진그룹 등도 모두 비슷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지났다는 안도를 할 무렵부터 검찰의 매서운 칼날이 재계 전방위로 확산됐다. 재계는 바짝 긴장했다. ‘검풍’이 언제 어디로 휘몰아칠지 몰라서다.

기업 수난시대
‘전방위 검풍’

재계를 향한 사정폭풍이 감지된 것은 지난 6월부터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지만, 대기업들이 굼뜬 움직임을 보이면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 5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개점휴업’에 들어갔던 대검 중수부가 1년4개월 만에 재가동되자 대대적인 ‘대기업 손보기’에 나서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재정비를 끝낸 검찰은 예전보다 더욱 예리해진 칼날로 재계 압박에 나섰다. 그 신호탄은 한화그룹이었다. 이어 태광그룹, C&그룹까지 검풍이 동시다발로 매섭게 몰아쳤다. 검찰과 재계, 정치권 안팎에선 ‘다음 타깃’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한화, 태광, C&에 이은 제4, 5의 ‘제물’로 유력한 대기업은 적게는 2∼3곳, 많게는 5∼6곳으로 압축됐다. 이들 기업은 구린내만 풍기다 수면 아래에서 잠자고 있는 사건을 품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검찰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수개월째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 모양새다. 검찰이 별다른 소득 없이 변죽만 울리다 말 가능성도 조심스레 점쳐진다. 재계는 갈 길 바쁜 기업들의 발목이나 잡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검찰 수사가 빛을 발한 곳은 상조업계다. 올해 국내 내로라하는 상조업체 경영진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고객돈 빼돌린
‘상조비리 파문’

검찰은 지난 5월 불공정 계약을 통해 300억원대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로 최철홍 보람상조 회장을 구속 기소했다. 최 회장은 지난 8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또 지난 9월 회원수 15만명을 보유한 한라상조 박헌춘 대표가 회삿돈 25억원을 빼돌려 부동산을 사들이는 등 개인적으로 사용한 혐의로 구속된데 이어 지난 11월 회사 자금 약 131억원을 빼돌려 개인 재산을 불린 박헌준 현대종합상조 회장이 구속됐다.

최근엔 직원 수당을 허위 지급하거나 회사 자금으로 자신들이 보유한 주식을 고가로 사들이는 수법으로 122억원을 횡령한 나기천 국민상조 대표가 구속기소됐다. 상조업체들은 숨죽인 채 검찰 수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후폭풍이 업계 전체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조업체들 뿐만 아니라 회원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납입한 회비를 떼일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동안 곪을 대로 곪은 상조업계의 문제는 이미 여러 번 도마에 올랐다. 정부가 소비자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할부거래에 관한 법률 시행령 및 시행규칙’개정안(고객 납입금의 50%를 사업자가 의무적으로 금융기관에 예치 등)이 지난 9월부터 시행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사실상 ‘무법지대’였다.

권택기 한나라당 의원은 “주요 상조업체들의 회계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상당수 회사들이 자본잠식 상태”라며 “상조업체들의 부실은 줄도산으로, 줄도산은 소비자 피해로 연결되기 때문에 업계 전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 바 있다.

총수들 컴백
‘왕의 귀환’

검풍이 거세게 몰아친 와중에 과거 문제를 일으키고 사퇴했던 거물 총수들이 속속 컴백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3월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김용철 변호사(삼성그룹 전 법무팀장)의 삼성그룹 비자금 폭로에 따른 특검 수사로 2008년 4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23개월 만이다.

‘왕의 귀환’은 2008년 말 단독 사면이 결정된 순간부터 가시화됐다. 이후 사면된 지 열흘 만에 가족과 함께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복귀론이 힘을 받았다. 국내 재계의 최대 거물인 만큼 그의 컴백을 놓고 의미와 배경, 전망 등이 쏟아졌다. 이 회장의 경영 복귀 명분은 ‘위기 극복’이었다. 그는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이 10년 뒤엔 사라진다”며 ‘위기론’을 들고 나왔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도 지난 11월 돌아왔다.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 벌인 ‘형제의 난’으로 왕좌에서 물러난 지 15개월 만이다. 직함도 명예회장에서 다시 회장을 되찾았다. 박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금호산업, 금호타이어, 대한통운 등 박찬구 회장이 맡고 있는 석유화학 부문을 제외한 계열사들의 경영을 맡게 됐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우건설 인수·합병의 후유증으로 지난해 말 금호산업, 금호타이어 등 주요 계열사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금호석유화학과 아시아나항공은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통해 구조조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박 회장은 사장단 회의를 직접 주재하고 공식 대외활동을 벌이는 등 적극적인 대내외 활동을 벌이며 경영 정상화에 앞장서고 있다.

올 하반기 기업 내부 분위기는 삭막하다. 엄격한 신상필벌의 평가와 분위기 쇄신, 과감한 ‘황태자 체제’ 전환 등이 맞물려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룹 내 서열지도가 새롭게 짜였다.


젊게 더 젊게
‘조직 물갈이’

재계 인사의 최대 이슈인 삼성그룹은 본격적인 ‘이재용 시대’를 염두에 둔 기본 틀을 재정비했다. 노장들이 물러난 자리에 ‘젊은 피’들을 대거 수혈한 것. 이건희 회장이 앞서 수차례 강조한 젊은 조직론, 젊은 리더론 대로 사장으로 승진된 인사들의 평균 연령은 기존 53.7세에서 51.3세로 대폭 떨어졌다.

LG그룹도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각 사업부의 수장이 대거 교체됐다. 이밖에 현대·기아차그룹, SK그룹, 롯데그룹, 한화그룹 등 주요 대기업 인사도 모두 ‘쇄신’에 방점이 찍혀 있다. 특히 금융권에 인사 태풍이 예고되고 있다.

신한금융지주는 내년 2월 중순으로 예정된 이사회까지 라응찬 전 회장 후임 최고경영자를 선임할 예정이다. 검찰이 라 전 회장과 신상훈 사장, 이백순 신한은행장 등 최고경영진에 대한 조사를 조만간 마무리할 예정이어서 검찰의 기소 여부에 따라 CEO 교체폭이 커질 가능성이 있다.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 이종휘 우리은행장 등 우리금융지주 경영진과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 김종렬 사장, 김정태 하나은행장 등 하나금융지주의 주요 경영진은 내년 3월 임기가 만료된다. KB금융지주는 이미 지난 8월 부행장 7명을 교체하는 등 대규모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피자에 치킨까지
‘초저가 전쟁’

초저가 먹거리도 화제를 모았다. 이마트는 지난 3월부터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한 냉동 피자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수도권 점포에서 판매되는 이 피자는 지름이 45㎝로 유명 피자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일반 사이즈보다 12㎝가 더 크지만 가격은 1만1500원으로 3분의 1 정도다. 이 피자를 판매하는 매장은 손님으로 북적이고 있다. 한 번 주문하면 최대 2시간 정도가 소요될 만큼 인기가 좋다.

롯데마트는 지난 9일 ‘통큰 치킨’을 내놨다. 이마트 피자의 성공이 자극이 됐다. 롯데마트 치킨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프라이드 1마리(약 900g)를 시중 치킨값에 비해 1만원 정도가 싼 5000원에 파는 파격적인 가격이 비결이다. 개점하자마자 200∼400마리의 하루 판매량 물량이 모두 소진됐다.


하지만 ‘영세상인 죽이기’란 논란이 적지 않았고, 롯데마트는 결국 지난 16일 치킨 판매를 중단했다. 비슷한 논란에 휩싸였던 이마트는 이번 롯데마트의 결정과 상관없이 피자를 계속 판매하고 있다. 이마트 측은 “피자는 치킨과 전혀 다르다. 판매는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