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치유소 ‘은혜의 뜰’ 찾는 사람들

“잠시 들러 무거운 짐 놓고 가세요”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서울역 맞은편 동자동 쪽방촌. 전쟁이 끝난 1950년대 초,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이 빈민촌을 형성한 곳이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정비구역으로 묶여 집을 짓거나 늘릴 수 없었다. 지난해 30층짜리 오피스텔 6동이 들어서면서 남산 조망을 막아섰다. 오피스텔을 제외한 주변 풍경은 수십년째 그대로다. 이곳에 마당과 넓은 테라스를 가진 아담한 2층집이 들어섰다.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서울분원에서 운영하는 ‘은혜의 뜰’이다.

서울역 맞은편 후암시장을 따라 100m가량 올라오면 왼쪽으로 노란색 담이 보인다. 그 골목으로 들어오면 우대성 오퍼스 대표가 “빌딩 속의 사랑채”라고 명명한 은혜의 뜰이 보인다. 이름 그대로 이곳을 처음 찾은 이들은 “빌딩 숲 한가운데 이런 공간이 있냐”며 놀란다.

아픈 사연 경청

우씨는 서울 가회동 성당을 설계한 건축가다. 그는 수녀회의 의뢰를 받아 지은 지 60년이 넘었고 사람이 살지 않은 지 20년이 된 수녀원 숙소를 리모델링했다. 지난해 9월14일 문을 연 이래로 지난 5월까지 2413명이 다녀갔다. 동자동에선 유일하게 마당을 가진 집이라고 했다.

지난 14일 찾은 은혜의 뜰엔  김 마리로사·김 로사리아 수녀와 이 가옥의 원래 주인이었던 암코양이 점순이가 취재기자를 맞이했다.

뜰지기 김 로사리아 수녀는 “잠깐 쉬면서 사색할 수 있는 여유를 주자는 뜻에서 지었다”며 “누구라도 언제든지 와서 편안히 머무는 흔들의자처럼 이용해 줬으면 좋겠다. 방문자들이 처음엔 편안하다고 하고 갈 때는 행복하다고 한다”며 미소지었다.


성분도(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의 약칭) 은혜의 뜰 창밖으로 푸른 잔디와 인동초 넝쿨이 보였다. 로사리아 수녀는 “바람이 사방으로 통하는 집”이라고 했다. 리모델링 후 첫 여름을 나는 가옥은 사방에 큰 창과 출입구가 있어 냉방기를 가동하지 않아도 시원했다. 로사리아 수녀는 직접 만든 팥빙수와 핸드드립 커피, 방문자가 가져온 빵을 대접했다.
 

그는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시대”라며 “아픔과 사연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여기 와서 아픈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그것부터가 치유”라고 말했다. 천주교 수녀회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해서 종교를 가지라고 권하거나 기도를 하자고 하지도 않는다. 로사리아 수녀는 “교황님도 그런 것은 싫어하신다”며 “신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동자동 빌딩 속 사랑채 “누구나 환영”
억울하고 아프고 외로운 마음 위로

그저 대화하길 원하는 이는 대화를 하고, 책을 보고 싶은 이는 책을 보고, 혼자 조용히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한다. 동자동에서 10년 넘게 노숙자를 돌봐온 개신교 목사도 자주 들른다.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2층에 꾸며진 기도방으로 올라가 같이 기도도 한다.

손자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독서를 하러 오는 노인도 있고, 근처에 직장이 있는 이들이 잠깐 와서 졸다 가기도 한다. 로사리아 수녀는 굳이 기자에게 소파에 앉아 보라고 권유했다. 2층의 안락한 소파에서 수면을 취하다 가는 이들이 많단다. 방문자들은 그림도 그리고 커피도 마시고 대화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은혜의 뜰은 사람 사이를 ‘매개’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족이 아픈 사람, 가족 중 자살자가 있는 사람들이 왔다. 한번 다녀간 사람들이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을 데리고 온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기도하고 나면 또 다른 이를 데리고 오는 것이 반복됐다.

로사리아 수녀는 “서로가 같이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거 같다”며 “그런 공간을 여기서 내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어느 날 찾아온 한 여성은 탈모를 앓고 있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여성의 중학생 딸이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병동에 입원하고 보니 또래 아이들이 의식 없이 몇 달을 누워 있었다. 엄마들끼리 만나서 친해지고 서로 의지하게 됐다.

한 30대 청년이 자주 찾아왔다. 그는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가족 이야기도 했다. 마침 자리를 함께했던 어머니 또래의 여성이 청년의 마음을 다독여줬다. 이 여성은 “내가 낳지 않은 아이를 자식으로 받아들여 3명이나 키웠다. 너 하나를 또 자식으로 삼지 못하겠냐”고 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모자의 인연을 맺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한 유태인이 “은혜의 뜰 공사과정을 다 지켜봤다”며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수녀님들이 계속 드나드는 것을 봤다”며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물었다. 그는 출국을 앞두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가져가라”며 물품을 기부하고 떠났다. 

은혜의 뜰에선 차를 무료로 제공하는 데도 빈손으로 떠나지 않으려는 방문자가 많다. 이들은 쟁반 밑이나 식탁보 밑에 1만∼2만원씩 숨겨두고 간다. 그래서 은혜의 뜰에선 작은 기부상자를 주방에 하나 뒀다. 굳이 찻값을 놓고 가려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꼭 금전이 아니어도 사람들은 커피나 빵, 과일, 음식을 가져와 서로 나눠먹기도 한다. 

은혜의 뜰은 다양한 프로그램도 열고 있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엔 피정(생활하는 곳을 옮겨서 하나님과 시간을 갖는 것)이 열리고, 생활성가 콘서트, 야외음악회 등도 여러 차례 개최했다. 마당에서 음악회를 열면 100명도 수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성화(이콘) 강좌, 이해인 수녀와 함께 하는 시교실, 성경공부 모임, 재능기부 형태로 열리는 각종 강좌 등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지난 14일 만난 한 20대 여성은 “여기에 오면 치유를 받는 느낌이 든다”며 “수녀님들이 반갑게 맞아주시고 마음이 편하고 뭔가를 찾아가는 곳이다. 월 2∼3회 찾아와 심층 면담을 한다”며 웃었다. 지난 3월에 수녀원에 들어온 친한 언니를 통해 은혜의 뜰을 알게 됐다. 그는 성소자 모임(수녀원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여성 모임) 과 성경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은혜의 뜰을 자주 찾고 있다고 했다.

대화하고 책보고 기도
“따뜻한 마음 담아간다”

은혜의 뜰은 지난해 가을께 문을 연 이후로 건축학도와 건축 관련 종사자들도 자주 방문하는 곳이 됐다. 원래 가옥은 1958년에 지어진 일본식 다다미 형태였는데, 용산구청에서 문화재 지정을 염두에 둘 정도로 건축학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았다. 건축사학자가 부근 후암동의 한옥과 적산가옥을 답사하다가 우연히 들르기도 했다. 

로사리아 수녀는 “용도가 다양한 재밌는 집”이라며 “그때그때 어떤 쓰임에든 들어맞는 집이다. 신축했으면 이런 느낌이 안 났을 거다. 옛 것과 새 것이 어우러져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가옥을 리모델링하면서 벽돌집, 박공지붕, 마당과 나무 등의 원래 요소를 그대로 살렸다. 오래된 공간에 담긴 체취와 역사를 자연스럽게 새 것과 어우러지게 했다.

가옥의 외양이 카페처럼 예쁘고 차도 마실 수 있어서 방문자가 점점 늘고 있다. 처음엔 인근 주민과 직장인이 왔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멀리서도 찾아오고 있다. 맞은편에 30층 규모 오피스텔이 생기면서 인근에 음식점과 카페가 점점 늘었다. 지역민들을 위해 지었지만 주변 영업장으로부터 볼멘 소리를 들을까 염려돼 직장인들이 몰려나오는 12∼1시 사이엔 문을 닫고 있다. 일요일엔 개방하지 않고, 평일엔 오전 10시에 문을 열고 오후 5시에 닫는다. 

오는 9월이면 은혜의 뜰이 문을 연지 1년이 된다. 뜰지기 로사리아 수녀는 “이 집이 제 구실을 제가 만들어간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또 “하나님이 와야 될 사람을 오게 해주시는 것 같다”고도 했다.


흔들의자 역할

그는 “이웃들이 이 뜰에 들어와 억울하고 아프고 외로운 마음을 내려놓고 후련하고 위로 받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간다”면서 “혼자 또는 여럿이 와서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속말을 꺼내놓고, 상담도 하고, 기도도 받고 하는 사이에 이런 일이 이뤄지고 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이들의 흔들의자 역할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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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