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의 아이콘’ 황장엽 전 북한조선노동당 비서

왜 하필 북한 ‘세자 책봉식’ 날 떠났을까?


지난 10일 황장엽 전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가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그의 삶은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을 오롯이 담고 있다. 북한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황 전 비서. 어째서 그는 모든 영화를 뒤로한 채 남한땅으로 넘어와 북한 민주화를 목 놓아 울부짖었을까. <일요시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황 전 비서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불과 40세 나이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발탁
김일성종합대서 김정일 주체사상 개인강사로

황장엽 전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는 1923년 1월23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제에 강제징용 돼 강원도 삼척탄광에서 노역하던 그는 해방 이후 모교인 평양상업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46년 11월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교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당에 가입해야한다는 동료 교사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후 1948년, 6개월 과정의 중앙당학교 이론반에 들어가면서부터 사상적 발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회고록을 통해 그는 “야간대학생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뒤떨어진 공부를 메우기 위해 잠도 안자고 매달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49년에는 러시아 유학길에 올랐다.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마르크스-레닌 철학을 본격 공부한 그는 1953년 북한으로 돌아와 김일성종합대학 철학강좌장에 발탁됐다. 당시 그는 명석한 두뇌와 논리정연한 사고 등으로 당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 학교 출신인 김정일의 주체사상 개인강사를 맡기도 했다.

마르크스 공부해
주체사상 아버지

그는 특히 김일성이 1955년 12월 처음으로 ‘사상에서의 주체’를 표방했을 때 이를 이론적으로 보좌했다. 70년대 초반에는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완성하기까지 북한체제의 대표적 이론가로 통했다.

이후 황 전 비서는 1958년 과학원 사회과학부문 위원에 임명된 데 이어 이듬해 노동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임명되면서 당내 주요 인물로 급부상했다. 이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내각 참사관 등 굵직한 자리를 거쳤다. 1965년에는 불과 40세의 나이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발탁됐을 정도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북한의 대외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75년 북한이 비동맹회원국이 된 이래 그는 최고인민회의·정부·당의 대표단장, 주체사상토론회 대표단장 등의 자격으로 20여 차례에 걸쳐 30여개국을 방문하며 주체사상연구회를 만드는 등 이른바 ‘인민외교’를 전개해 비동맹국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1990년에는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총서기와 면담하기도 했다. 1993년부터는 노동당 국제담당비서와 당 국제부장,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등을 맡아 인도·중국·쿠바·유럽 등을 방문했다.

황 전 비서는 김정일 우상화 작업에도 깊이 관여했다. 김정일이 백두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백두산 출생설’을 정론화하고 ‘친애하는 지도자’ 등의 호칭을 붙이게 한 것이 모두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다보니 그는 김 주석 부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984년 김일성 주석의 비공식 중국방문 당시 단독 수행을 맡았을 정도다. 1996년 김일성 사망 2주기 중앙추모대회에서 주석단 서열 26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 내에서 승승장구하던 그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과 90년대 중반 북한 내 대기근이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나는 중국이 개방정책으로 전환하는 걸 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북한의 권력에는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김일성 생전에도 중국식 개혁·개방의 길을 가는 것이 옳다는 식의 의견을 폈지만 김일성 부자는 남한과 수교하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한 중국을 못마땅해 했다. 김일성 사후에도 김정일이 중국식 개혁·개방 노선을 취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지자 그는 결단을 내렸다.

공개 활동 제약에도
비판의식 잃지 않아

황 전 비서는 1997년 2월12일, 김덕홍 전 북한 여광무역 사장과 함께 베이징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뒤 필리핀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베일에 싸여 있던 북한 정권의 비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일성 부자는 독일 제3제국(1934∼1945년) 시절의 아돌프 히틀러처럼 주민들을 완전히 복속시켰다” “김일성 주석 시대보다 김정일의 독재 정도가 10배는 더 강하다” “북한은 나를 반역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반역자는 국민을 굶어죽게 하고 있는 김정일”이라는 등 맹비난을 퍼부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 전 비서는 그의 저서를 통해 김정일의 통치술과 전쟁관, 북한의 전쟁 준비 상황 등을 비판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의 공개 활동에 제약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그는 비판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는 북한 사정을 가장 잘 알기에 남한에서 가장 무섭게 북한의 치부를 공격할 수 있는 인물로 통했다.

개혁·개방 노선을 취할 기미 보이지 않자 탈북
가장 무섭게 북한의 치부 공격할 수 있는 인물

반대로 북한의 입장에서 그는 조국을 버린 ‘배신자’였다. 북한은 그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당 간부들의 추가 탈북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황 전 비서의 귀순 직후 김정일은 연설을 통해 그를 “개보다 못한 짐승”으로 매도하며 “모든 일꾼들은 우리나라 주체의 사회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우리의 사회주의를 옹호고수하며 더욱 빛내 나가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돈 착복, 여자문제 등이 원인이 돼 권력핵심부의 눈 밖에 나 탈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루머도 흘러나왔다.


황 전 비서는 김정일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됐다. 때문에 그는 북한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실제로 올 6월에는 황 전 비서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받고 위장 탈북한 2인조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바 있다. 이들은 북한 정찰총국으로부터 “황장엽이 당장 내일 죽더라도 자연사하게 놔둬서는 안된다”는 지령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화 운동에 여생을 바치겠다”던 황 전 비서는 자신이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던 당 창건일이자 남한 망명 후 그토록 각을 세웠던 북한 세습체제에서 김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은이 주석단에 공식 등장한 날에, 굴곡 많던 삶을 뒤로 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비록 황 위원장이 이날 안타깝게 세상을 등졌지만 그가 남긴 북한 민주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평가다.

황 전 북한노동당 비서의 장례식에는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자 하는 각계각층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지난 14일 오전에만 조현오 경찰청장, 한나라당 서상기 의원 등 180여명의 조문객들이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헌화, 분향을 하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황 전 비서의 빈소가 마련된 이후 현재까지의 조문객은 2000명을 넘어선다.

정정길 전 대통령실장과 정운찬 전 총리는 내실까지 찾아 황 전 비서의 수양딸 김숙향(68)씨를 직접 위로했다. 또 이날 빈소에 있던 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 박관용 전 국회의장에게는 장례 절차에 각별히 신경 써 줄 것을 당부했다.

통일 전까지 현충원
결국 평양에 모실 것


특히, 황 전 비서가 ‘탈북자의 아버지’ ‘북한 민주화의 기여자’라고 평가 받았던 만큼 탈북자, 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측 조문객이 빈소를 많이 찾았다.
이날 오전 황 전 비서의 대전 국립 현충원 안장이 결정되자, 유족과 탈북 단체 관계자들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묻어났다. 현충원 안장 소식에 힘을 얻은 듯 유족과 탈북 단체 소속 자원봉사자들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밀려드는 조문객을 맞이했다.
장례위원인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선생님의 뜻대로 결국은 평양에 모셔질 것”이라며 “통일 전까지만 현충원에 잠시 모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장엽 프로필

1923년 1월23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출생
1941년 평양공립상업학교 졸업, 일본 도쿄 주오대 야간 법과 입학
1945년 삼척탄광 징용 생활 중 해방 맞아 평양공립상업학교 교사로 복귀
1946년 조선노동당 입당
1949년 김일성종합대 재학 중 모스크바대 유학,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 공부해 박사학위 취득
1954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19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1965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 김정일의 주체사상 개인교사
1970년 당 중앙위원 선출
1972년 최고인민회의 의장
1979년 당 과학교육담당 비서
1980년 노동당 비서
198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당 국제담당 비서
1987년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1993년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중국으로부터 개혁·개방 제안 받고 김정일에게 방중 건의했다 거절 당함
1995년 세계 인민들과의 연대성 조선위원회 위원장
1997년 2월12일 주체사상 강연 위해 일본 방문 후 베이징에서 한국대사관에 망명 신청
1998년 국정원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1999년 탈북자동지회 고문
2003년 전주대 석좌교수
2008년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상임고문,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2010년 10월10일 자택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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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법 개정안’ 급물살 내막

‘간첩법 개정안’ 급물살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정치권이 ‘간첩법 개정안’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보사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여야 모두 공감한 분위기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이번 개정안이 진일보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강력한 처벌보다 더 많은 간첩을 잡으려면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권이 부활해야 한다는 지적이 거세다. ‘간첩법 개정안’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건 여당이다. 한 달여 전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당론 추진’을 언급하면서부터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는 국가정보원장 출신인 박지원 의원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다만 두 당의 개정안에는 국정원 대공수사권 부활과 관련해 차이가 있다. 국회 본회의 테이블 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상 못한 내부 세작 간첩법 개정안은 지난달 군검찰이 군 정보요원의 신상 정보를 유출한 혐의를 받는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군무원 A씨를 구속 기소하면서 언급됐다. 앞서 국방부 검찰단은 정보사 요원 A씨를 기소하면서 ▲군형법상 일반이적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뇌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등 혐의를 적용했다. 국군방첩사령부가 처음 A씨에게 간첩 혐의를 적용해 송치했으나 군검찰은 수사기록 검토 결과 적용하기 어렵다고 봤다. 군형법과 형법은 ‘적’을 위해 간첩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해 간첩죄를 적용하는데, 여기서 적은 북한을 의미한다. 군검찰이 A씨에게 간첩죄를 적용하지 않은 것은 북한과 연계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A씨에게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자 정치권에서는 연일 논란이 이어졌다. 먼저 한 대표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부활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힘은 ‘적국’으로 한정했던 간첩죄 적용 범위를 ‘외국’으로 대폭 넓히는 간첩법 개정안도 당론으로 추진 중이다. 한 대표는 지난달 말 국회서 열린 간첩법 개정 입법토론회에 참석해 “이번 국회서 두 가지를 반드시 해내자”며 “간첩법서 ‘적국’을 ‘외국’으로 바꾸자. 그리고 그 법을 제대로 적용할 수 있도록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부활시키자”고 강조했다. 그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 스파이를 적국에 한정해 처벌한 나라가 있느냐”며 “형법 조항서 ‘적국’을 ‘외국’으로 바꾸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대표는 지난 1일 당 최고위원회의서도 “민주당이 찬성만 하면 ‘적국’서 ‘외국’으로 바꾸는 간첩법 개정안이 반드시 통과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명 간첩법은 형법 98조다. ‘적국’을 위해 간첩 행위를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북한 연관성 없으면 관련법 적용 불가 적국 아닌 외국으로 조항 신설 추진 간첩죄 적용 대상을 적국인 북한으로 한정해 북한 외 다른 나라를 위해 간첩 행위를 하더라도 간첩죄로 처벌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에 ‘적국’을 ‘외국 및 외국인 단체’로 고치는 개정안이 지난 2004년부터 끊임없이 발의됐으나 매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간첩법 개정안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건 국민의힘이다. 강승규 의원은 지난달 같은 당 의원 24명과 함께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엔 허위·조작 정보를 유포해 사회 혼란을 초래하는 ‘영향력 공작’(인지전)을 수행하다 적발된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담았다. ‘외국, 외국인 단체나 외국 등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자(안보위협인물)가 허위 사실과 왜곡된 정보를 유포할 경우 3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안보위협인물이 간첩 행위를 하거나 간첩을 방조한 경우 5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안보위협인물이 인지전을 통해 정부 정책 결정 또는 외교관계에 부당한 영향력을 미쳐 국가안보를 위협한 경우 10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특히 정보기관 소속으로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경우 가중처벌하도록 했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도 지난달 말 간첩죄의 적용 범위를 적국서 외국과 국내외 단체 및 비국가행위자로 확대하는 간첩법 개정안(형법·군형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이 법안은 외국이 국내에 단체를 만들어 간첩 활동을 할 경우에도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군사기밀뿐 아니라 국가의 핵심기술 및 방위산업기술에 대한 유출 행위에 대해서도 간첩죄를 적용토록 했다. 윤 의원 측은 “현행 간첩법인 형법 98조는 적국을 위해 간첩 행위를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를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 징역에 처하게 돼있다”며 “군형법 13조서도 비슷한 취지의 조항을 두고 있지만 실질적인 적국에 해당하는 북한 외에 어느 나라를 위해서든 간첩 행위를 하거나 방조할 경우나 외국이 국내 단체를 만들어 간첩 활동을 하게 되면 처벌을 할 수 없어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고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신중한 민주당 민주당은 국정원장을 지낸 박 의원을 필두로 간첩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박 의원의 법안은 법망 미비를 보완하기 위해 ‘적국’은 물론 ‘외국 정부 또는 그에 준하는 단체 및 외국 정부 산하단체’를 이롭게 하기 위해 간첩 행위를 한 자도 7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간첩 행위는 ‘국가기밀을 수집·탐지·보관·누설·전달·중개하는 행위’로 명확히 규정했다. 허위·날조 정보를 온·오프라인상에서 가짜뉴스 형태로 퍼뜨려 사회 혼란을 일으키고 정부 정책과 외교관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향력 공작’(인지전)을 처벌하는 조항도 담았다. 이런 행위를 외국 등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저지르는 경우 5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신분을 위조한 외국 정보기관원(흑색요원)이 인지전을 하다 적발될 경우 가중처벌하도록 했다. 국가핵심기술 유출 행위도 간첩죄로 처벌하겠단 구상이다. 박 의원은 “지금도 사이버상으로 자생적 공산주의 친북 세력이 교류하고 있다”며 “우리나라서 접선을 하지 않고 중국, 동남아시아 쪽에서 접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 의원은 특히 산업기술 보호를 위해서도 간첩법 개정이 필수라고 강조하며 “진보적인 민주당서 내가 주장해야 국민을 설득하고 법안이 통과돼 국가를 지탱하고 산업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국민의힘 측 법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국정원 대공수사권과 관련해 이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국정원 대공수사권은 문재인정부 시절인 지난 2020년 12월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국정원법 개정안이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 주도로 통과돼 올해부터 시행 중이다. 한 대표가 국정원 대공수사권 부활을 당론으로 추진했다고 해도 야권의 반대가 심한 상황이다. 야권은 대공수사권 폐지는 불법사찰과 간첩 조작 사건 등 국정원의 공안 탄압을 없애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한반도 지금 정보전쟁 중 특히 여야는 최근까지도 대공수사·조사와 관련한 국정원 역할을 놓고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나아가 대공수사권을 넘어 조사권까지 대폭 축소하자면서 사실상 국정원의 대공수사 ‘완박(완전박탈)’을 추진 중이다. 실제로 민주당 이기헌·김현·박홍근·윤건영 의원 등은 지난달 국정원의 대공조사권과 관련 사실조회 및 자료 제출 요구권을 폐지하는 국정원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가정보원법은 ▲방첩·대테러·국제범죄조직에 관한 정보 ▲국가보안법 위반, 반국가단체와 연계가 의심되는 안보침해행위에 대한 정보 ▲사이버안보와 안보 관련 우주 정보 등에 대해 ‘조사권’을 보장하고 있다. 대공수사권이 없는 대신 현장 조사·문서 열람·시료 채취·자료 제출 요구와 진술 요청 등의 방식으로 조사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개정안에는 이 조사권이 오히려 수사권보다 광범위하게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이를 폐지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수사권의 경우 헌법상 적법절차 원칙과 영장주의가 엄격하게 적용되지만, 조사권은 이런 견제는 받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압수수색과 신문 조사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게 골자다. 다만 민주당 내부서도 국정원의 대공조사권까지 없애는 건 과도하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에 따라 민주당 내에서 국정원 근무 경력이 있는 박지원·박선원·김병기 의원은 해당 법안 발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경찰의 대공수사가 제대로 자리 잡히지도 않은 상황서 과거로 회귀하면 경찰 내부의 불만이 폭발할 것”이라며 “국정원이 경찰 대공수사에 힘을 실어주는 협력관계로 가는 게 더 옳지 않겠냐”고 전했다. 이 의원은 “대공수사와 정보수집 기능을 분리하는 게 글로벌 스탠다드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한 핵심요소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일요시사>와 접촉한 복수의 국정원 및 정보기관 출신 전문가들은 간첩법 개정이 10년 전부터 추진됐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20~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으며 외국 간첩과 스파이들이 국내서 활동하는 경우가 적었으나 경제 대국이 된 지금은 다르다는 설명이다. 여야 국정원 대조권 두고 기싸움 한국은 미·중·러·일 스파이 ‘천국’ 국정원 파견 업무를 수행했던 부장검사는 “국정원 대공수사권이 사라지면서 간첩과 산업스파이 등 국익에 해가 되는 조직과 인물의 범죄 행위를 포착해도 법률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크게 축소된 건 사실”이라며 “중국과 북한 간첩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표면적으로 우리의 우방국도 간첩이 존재한다. 미국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한 정보기관 출신 관계자는 “중국, 북한은 기본이고 일본, 미국, 러시아, 독일 등 해외 강국들은 국내 수도권서 정보활동을 벌인다. 이들은 외교관(회색), 언론사 특파원, 유학생 등으로 신분을 세탁해 블랙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해외 각국 대사관에는 정보기관 담당 인사만 2명 이상 근무 중”이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최근 국내 대학가에서는 학생 신분으로 위장한 중국인 ‘산업스파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중국 산업스파이들이 유학생과 연구자로 위장해 국내 대학의 연구실, 연구기관 등에서 암약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은 대학의 연구실을 매개로 대기업 등의 첨단기술 연구소까지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들 역시 이 같은 현실을 알면서도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학령인구가 줄면서 중국인 유학생을 받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학교 운영이 불가능한 대학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산업스파이 문제를 공론화했다가 중국인 학생들의 집단 반발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현재 국내 대학에 유학 중인 외국인 학생 수는 2022년 기준 16만6892명으로 2013년(8만 5923명) 대비 2배 가까이 늘었으며 이 중 중국인 비중은 통상 40%를 웃도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강대 등 일부 대학은 중국인 전용 강의까지 개설할 정도다. 본희의 통과 가능성은? 앞으로 한국을 향한 중국의 기술 탈취 시도가 더 강력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중 갈등이 심화함에 따라 중국이 기술 자립에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 비영리기구인 국제교육원(IIE)에 따르면 미국 내 중국인 유학생 수는 2022~2023학년 28만9526명으로 집계돼 37만2532명을 기록했던 2019~2020학년 대비 22% 급감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