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400홈런 달성 국민타자 이승엽

‘라이언킹’ 살아있는 전설이 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라이언킹’ 이승엽이 기어이 400홈런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홈런 신기록이다. 한국과 일본 무대 홈런을 합치면 559개다. 그가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400 고지는 일찌감치 넘었을 것이다. 이승엽이 그동안 기록한 1호 홈런부터 400호 홈런까지, 그가 남긴 발자취를 돌아본다.  
 
 
이승엽(40)은 청소년 시절 투수와 타자로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좌완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이던 1993년 청룡기대회에서는 발군의 실력으로 맹활약하며 12년 만에 모교에 우승기를 안겼다. 그는 대회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 1994년 청소년 국가대표로 선발된 이승엽은 거듭 활약을 펼치며 우승기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고3 때 팔꿈치 부상을 당하면서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 부상이 오늘의 금자탑을 쌓는 결정적 계기가 된 셈이다.   
 
[ 1∼100호  ]
[1995-1999년]
 
이승엽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에 입학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당시 수능에서 총점 40점 이하를 기록해 대학 진학 자격을 잃게 됐다. 이 때문에 이승엽은 연고 지명을 통해 계약금 1억3200만원에 연봉 2000만원의 조건으로 1995년 연고팀 삼성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이승엽은 좌완투수 유망주였지만 경북고등학교 시절 당한 팔꿈치 부상으로 고생했다. 삼성 입단 초기부터 투수훈련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우용득 감독과 타격코치는 이승엽에게 배팅 재능이 있음을 알아봤다. 사실상 그는 청룡기 결승전에서 결승홈런을 쳤으며, 청소년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때도 타자로만 활약해 홈런상과 득점상을 받은 바 있다. 스프링캠프에서 돌연 이승엽을 타자로 전향시켜 1년간 타자로 기용한다.  
 

그의 첫 번째 홈런은 1995년 5월2일 광주 무등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KIA의 전신)를 상대로 뽑아냈다. 당시 그는 만으로 18세였다. 이승엽은 데뷔 첫 시즌 타율 0.285에 13홈런으로 신인으로서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같은 팀인 이동수에게 밀려서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1996년 삼성라이온즈에 백인천 감독이 부임했다. 백 감독은 이승엽에게 외다리타법을 전수했다. 그는 두 번째 시즌을 조정기로 보내며 전 시즌보다 저조한 기록으로 홈런 9개를 치며 3할의 타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 시기가 이승엽이 다음 시즌 홈런제조기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국프로야구 통산 400호 홈런 신기록
영원한 홈런왕…일본까지 합치면 559개
 
1997년 이승엽은 본격적으로 장타에 눈을 뜬다. 이때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화려한 타선의 중심축에 서게 된다. 그는 3할을 쳐내는 정교함과 필요할 때마다 나오는 타격 본능으로 팬들에게 ‘라이언킹’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해 이승엽은 홈런 23개(1위), 타점 114개(1위), 최다안타 170개(1위)를 기록한다. 정규시즌 MVP와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다. 
 
1998년 이승엽의 기량은 더욱 무르익었다. 이미 전반기에만 홈런 25개를 때리며 2위와 8∼9개 차이를 벌렸다. 홈런왕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뒤에서 좇아오던 두산 베어즈의 타이론 우즈가 9월과 10월에만 11개의 홈런을 추가하면서 이승엽을 앞질렀다. 이에 반해 이승엽은 후반기 들어 좀처럼 홈런을 치지 못했다. 결국, 그해 홈런왕은 타이론 우즈가 됐다. 이승엽은 38개 홈런과 102타점을 기록했다. 
 
타이론 우즈에게 홈런왕을 빼앗긴 뒤 이승엽에게 남은 것은 독기뿐이었다. 그는 1999년 5월5일 홈구장인 대구에서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100홈런을 뽑아냈다. 당시 22세로 최연소 100호 홈런 고지를 정복했다. 
 

[101∼200호 ]
[1999-2001년]
 
이승엽은 1999년 8월까지 약 34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괴력을 보였다. 7월에 이미 전년 타이론 우즈가 세운 42개 홈런을 돌파했다. 그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에 50홈런을 치며 신기원을 이뤄냈다. 한화 이글스의 장종훈이 40홈런 시대를 연 지 7년 만에 기록을 깬 것이다. 그는 홈런 54개(1위), 타점 123개(1위), 득점 128점(1위), 출루율 0.458(1위), 장타율 0.733(1위)을 기록하며 타격 5관왕에 올랐다.
2000년과 2001년은 이승엽에게 위기의 시기였다.
 
 
외다리타법의 약점이 드러나자 2000년에는 홈런 36개와 2001년에는 홈런 39개를 기록했다. 지나 시즌 50홈런을 기록한 선수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 타율도 0.279로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만 24세이던 2001년 6월21일 대구 홈구장에서 한화 이글스와 경기에서 200홈런을 달성했다. 외다리타법이 약점이 됐지만 꾸준한 기량을 과시했다.
 
또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일본과 예선전에서 괴물투수로 불리던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2점 홈런을 날렸고,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또다시 마쓰자카를 상대로 결정적인 2타점 2루타를 때려 동메달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2002년 시즌 현대 유니콘스의 심정수와 홈런경쟁을 벌여 홈런 47개를 기록해 홈런왕을 차지했다. 그해 한국시리즈 LG 트윈스와의 6차전 경기에서 마지막 타석 전까지 20타수 2안타로 극도의 타격 부진을 겪는다. 9회말 이승엽은 극적인 동점 3점홈런을 터뜨리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다음 타석에 나온 마해영의 끝내기홈런으로 이어져 삼성 라이온즈가 창단 후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는 수훈을 세웠다. 비록 상대적으로 부진한 시즌을 보냈지만, 이승엽은 시즌MVP, 홈런왕, 골든글러브 1루 부분을 수상했다. 
 
[201∼300호 ]
[2001-2003년] 
 
이승엽에게 2003년은 전성기였다. 타격폼을 수정한 그는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6월22일 대구구장, 이날은 이승엽의 300홈런 볼을 잡기 위해 관중석에 잠자리채가 등장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날 팀이 2대3으로 뒤지던 8회말 이승엽은 초구 직구가 가운데로 몰리자 주저없이 방망이를 돌렸다. 홈런임을 직감한 그는 두 팔을 번쩍 들며 경기장을 돌았다. 300홈런을 축하하는 축포가 달구벌 경기장 밤하늘을 수놓았다.
 
이날은 단순히 300홈런만 기록한 날이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연소 300홈런을 달성한 선수가 됐다. 이승엽의 경기수는 1075경기로 아쉽게도 일본 다부치 고이치가 기록한 세계 최소기록인 1072경기를 뛰어넘지 못했다. 하지만 이승엽의 당시 나이는 26세로 일본 왕정치(27세)의 세계 최연소 300홈런 기록을 무려 5개월 앞당겼다. 
 
이날 동점이던 9회말 2사 만루에서 생애 첫 끝내기 만루홈런을 터뜨리며 자신의 대기록을 자축했다. 9시즌 만에 300홈런을 달성한 이승엽은 종전 장종훈이 14시즌 만에 달성한 기록을 5시즌이나 앞당겼다. 경기수로는 490경기, 타수로는 1271타수를 줄였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해 이승엽이 몇 개의 홈런을 치느냐로 모아졌다. 그는 아시아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2003년 9월25일 광주 KIA전에서 이승엽은 아시아 한 시즌 최다 55홈런을 뽑아냈다. 그 당시 이승엽의 홈런 타구가 많이 나오는 우측 외야 쪽부터 관중석이 꽉 채워졌다. 관중들은 그곳에서 역사적인 홈런볼을 잡기 위해 잠자리채를 들고 있었다. 이승엽의 55홈런볼의 가치는 현재 1억2500만원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승엽은 아시아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을 보유한 일본 왕정치(55홈런)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승엽이 한 번만 홈런을 때리면 아시아의 신기록을 새로 쓰게 된다. 당시 모든 관심은 이승엽의 신기록 달성 여부에 모였다. 수십명의 기자들은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매일같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좀처럼 남은 홈런 한 개를 추가하지 못했다. 
 
10월2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는 이승엽이 홈런을 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당연히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날 이승엽은 2회초 공격 4번타자로 나왔다. 선발투수가 던진 공을 통타한 그는 드디어 56호 홈런을 기록했다. 일본의 왕정치가 1964년 55개의 홈런을 터뜨린 후 무려 39년 만에 나온 대 신기록이었다. 이날은 이승엽이 ‘국민타자’로 거듭난 날이었다.
 
[301∼400호 ]
[2004-2015년] 
 

이승엽은 이미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역사에 남을 만한 대기록을 세웠다.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2003년 시즌이 종료되고 FA자격을 얻게 됐다. 그의 거취는 야구팬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승엽은 이미 오래전부터 메이저리그 진출을 희망하고 있었다. 팬들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인 그가 최고의 무대 메이저리그에서 뛴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협상이 지지부진해지며 미국 진출은 불투명해졌다. 그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이루지 못하고 그해 12월 일본의 지바 롯데 마린스와 계약한다. 이후 약 8년간 일본 무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승엽은 한국에서 화려했던 전성기와 달리 일본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기복과 부침이 심했다. 그의 야구인생 중 가장 힘든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시리즈 우승반지를 껴보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2011년 10월21일 이승엽은 기자회견을 열어 8년간의 일본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귀국했다. 그해 12월5일 연봉 8억원, 플러스옵션 3억원에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
 
2012년에는 타율 0.307,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해 여전히 강타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 1차전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홈런 타이기록을 수립했고 6차전에서 결정타였던 싹쓸이 3루타를 기록하며 데뷔 후 첫 번째이자 최고령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2013시즌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서는 KIA 타이거즈의 나지완과 결승대결에서 6대2로 이기며, 데뷔 이후 첫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을 맛봤다. 두산 베어스와 맞붙었던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 타격 부진이 계속되어 7경기에서 타율 1할4푼8리(27타수 4안타)에 그쳤다. 2013년 11월1일 대구에서 열린 7차전까지 단 한 점의 타점을 뽑아내지 못하다가 7차전에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한 동점 적시타를 기록했다.
 
2014년에는 타격자세 교정을 받았고, 그 결과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역대 최고령 3할 30홈런 100타점을 달성하며 국민타자의 부활을 알렸다. 2014년 6월14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고, 7월24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타점을 쓸어담았다. 9월10일 NC 다이노스전에서는 역대 최고령 30홈런을, 한 달 후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연타석 홈런으로 최고령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투수서 타자로 전환
세계 최연소 100홈런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하였지만 2차전에서 홈런을 때리며 타이론 우즈를 제치고 포스트시즌역대 통산 최다홈런 신기록을 수립했다. 시즌 기록은 3할8리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했다. '회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며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지난 6월3일 이승엽은 포항야구장에서 벌어진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 3회말에 투수 구승민을 상대로 두 번째 타석에 올랐다. 이승엽은 초구 스트라이크에 이어 2구를 우익수 뒤로 날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통산 400홈런을 기록했다.
 
개인통산 400홈런은 1982년 KBO리그가 출범한 이후 34시즌 만의 첫 기록으로 이승엽은 1995년 데뷔 이후 13시즌 만에 대기록을 달성했다. 현역선수 중 2위는 NC 다이노스의 이호준으로 그는 299홈런으로 이승엽에 100개 이상 뒤져있다. 
 
역대 KBO에서 300홈런 이상을 때린 선수는 양준혁(351홈런), 장종훈(340홈런), 심정수(328홈런), 박경완(314홈런), 송지만(311홈런), 박재홍(300홈런) 등 총 7명이다. 이승엽을 제외하면 심정수가 15시즌으로 가장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고, 박경완은 23시즌을 소화했다.  
 
이승엽의 개인통산 400홈런은 국내에서 처음 나온 기록인 만큼 의미가 깊다. 세계에서 지금까지 400홈런의 위업을 달성한 선수는 총 70명뿐이다. 147년 역사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52명. 80년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8명만이 400홈런의 위업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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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당원의 명령인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질주다. 당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당을 휘어잡기까지 수많은 당원이 등을 밀어줬다. 비주류에서 주류 ‘인싸’로 자리 잡기 위한 정 대표의 다음 스텝이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행보가 매섭다. 윤석열정부에서 막힌 과제를 해치우는 동시에 공약이었던 각종 개혁을 빠르게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 대표는 같은 당 박찬대 의원보다 덜 알려졌다는 평이 나오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위원장으로서 보여준 ‘사이다’ 면모가 주목받으면서 강성 지지층의 환호를 받았다. 정청래가 걸어온 길 비주류였던 그가 당 대표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1대 국회 때는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수석 최고위원을 지냈고, 22대 국회에선 법사위원장으로서 국민의힘에 호통을 치며 유튜브 단골 주제가 됐다. 당시 정 대표는 국민의힘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을 밀어붙이고 상대편 의원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정 대표는 언론 대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지지자와 직접 소통해 왔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보다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지만 팬덤 정치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 대표는 최근에도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청-명 프레임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는 SNS에 ‘언론의 자유와 횡포 그리고 언론의 게으름의 관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조국 전 대표의 사면·복권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정청래 견제론’을 말한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일뿐더러 사실도 아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어 “정청래는 김어준이 밀고, 박찬대는 이재명 대통령이 밀었다는 식의 가짜 뉴스가 이 논리의 출발”이라며 “어심이 명심을 이겼다는 황당한 주장, 그러니 정청래가 이재명 대통령과 싸울 것이란 가짜 뉴스에 속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각을 세울 일이 1도 없다. 당정대가 한 몸처럼 움직여 반드시 이재명정부를 성공시킬 생각이 100(이다)”이라고 덧붙였다. 계파 갈등 프레임이 씌워질 조짐이 보이자 이를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의 정치적 뿌리를 따지자면 친노(친 노무현)에 가깝다. 그러나 문재인 전 정부서는 친문(친 문재인),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는 친명(친 이재명)으로 분류되는 등 계파색이 비교적 옅은 편이다. 1989년 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은 등 학생 운동권 출신이지만, 대표 운동권인 민주당 86 그룹과의 친분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 대표는 당의 주류보다 비주류에 가깝다는 게 여의도에 떠도는 평이다. 친문? 친명? 오히려 ‘계파 청산파’ “잘못된 586 문화 배운 97도 청산” 전당대회가 한참이던 당시 한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만난 정 의원은 아주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박찬대 의원은 특유의 재치로 호감을 얻는 편이라면 정 의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할 말은 제대로 하는 캐릭터”라며 “그래서 계파를 분류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정한 길은 꺾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 대표는 ‘계파 청산’을 외치는 인물이다. 그는 당 대표 후보이던 당시 “국민께서 비판하시는 586의 운동권 문화는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계파는 당을 좀먹는 독약”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정파와 노선은 필요하지만, 계파는 없어져야 한다. 저 스스로 계파에 가입하지 않고, 그런 데서도 저는 안 불러준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586의 질서, 운동권의 수직적 관계가 싫었다. 그런 분들과 몰려 다니는 게 너무 비생산적”이라며 “586의 안 좋은 문화를 따라 배운, 너무 빨리 늙어버린 97 세대들의 그런 것도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원들의 요구를 파악해 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8·2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는 당선 이후 “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민주당 주류가 바뀌었단 뜻이고, 민주당에서 정청래가 대표가 됐다는 것은 당의 주인인 당원들이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전당대회를 “예전에는 당원들이 국회의원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국회의원들이 당원 눈치를 봐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당의 민주화’가 드디어 그 깃발을 높이 든 8·2 전당대회”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 대표를 탄탄히 받쳐주는 건 여의도 인맥이 아닌 당원이었다. 정 대표는 이들을 대주주 삼아 힘을 키워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당원권에 힘을 쏟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평당원 최고위원’ 선출을 시도하는가 하면 당원 주권 정당 실현을 강조하기 위해 ‘대의원 1인1표제’를 띄우기도 했다. 대의원 1인1표제는 당원들의 권한을 대폭 향상하는 방안이다. 정 대표는 지난 18일 열린 국회 당원주권 정당특위 출범식에서 “10년 넘게 당원주권정당, 1인1표를 주장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열리지 않았다”며 “헌법에서 얘기하고 있는 평등 선거가 민주당에서도 구현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3대 개혁 풀가동 이어 “대한민국 헌법에는 평등 선거가 명시돼있고, 많은 선거에서 1인1표가 행사되지만 유독 더불어민주당에선 누구는 1표, 누구는 17표를 행사한다”며 “헌법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정부가 국민주권시대를 강조하는 만큼 이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권리당원의 권리를 보장하고 상징적인 ‘1인1표’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정 대표는 당헌·당규 개정을 비롯한 ▲평당원 선출 준비 지원 ▲연말 당원 콘서트 지원 등을 약속했다. 당원의 힘이 커질 수록 정 대표의 정치적 입지도 넓어진다. 정 대표는 연일 국민의힘 때리기에 집중하며 당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민주당의 목표로 3대 개혁 완수를 내걸었다. 이는 비주류였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도 읽힌다. 이 대통령이 ‘사이다’ 발언으로 당권까지 올랐다면 정 대표는 각종 특위를 띄우며 거침없는 개혁가의 모습을 굳히겠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따라 검찰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청을 폐지하는 대신 가칭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과 공소청을 신설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다음 달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 대표는 지난달 21일 의원총회에서 이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만찬 회동을 언급하며 “검찰청 폐지, 공소청·중수청 설립을 담은 정부조직법을 9월 내 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당과 대통령실이 입장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약속드린대로 추석 귀향길 뉴스에서 ‘검찰청은 폐지됐다’ ‘검찰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국민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도록 당에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임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추미애 의원 역시 “법사위원장 선출은 검찰과 언론, 사법개혁 과제를 완수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전폭적으로 힘을 실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위원회도 속속들이 들어섰다. 우선 민주당은 ‘국민주권 검찰정상화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정 대표는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지금의 시대적 과제는 내란 종식, 내란 척결, 이정부 성공에 있다”며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개혁 중 개혁이 검찰개혁”이라며 “개혁도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저항이 거세져서 좌초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시기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위의 주요 과제로는 ▲수사·기소 완전 분리 ▲국민 주권 실현 및 민생 뒷받침 등을 제시했다. 새로운 구심점 이어 언론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언론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추석 전까지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언론의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최대 5배 배상을 의무화하는 법적 장치다. 언론뿐만 아니라 ‘유튜버’도 포함하는 안이 논의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중심 사법개혁특별위원회’도 출범했다. 정 대표는 “대법관의 증원과 추천 방식을 변경하는 내용의 사법개혁안을 추석 전까지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기 위한 지역별 공략에도 나섰다. 지난 21일 호남발전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다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해서 호남이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는데, 국가는 ‘호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이제 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꼬집었다. 정 대표는 “호남만 발전시키면 되겠느냐”며 영남발전특위도 띄웠다. 이는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대비해 대구·경북 등의 표밭을 다지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광폭 행보를 보이는 정 대표를 구심점으로 신흥 세력이 탄생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정 대표는 계파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고 거듭 밝혔지만, 권력자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이다. 정 대표의 편에 선 동료 의원들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를 공식적으로 지지했거나 개혁 선봉에 함께 섰던 의원 등이다. 정 대표가 당권 도전을 선언한 국회 기자회견장에는 장경태·최기상·문정복·임오경·양문석 의원 등이 자리했다. 여의도 이야기를 종합하면, 정 대표는 ‘당원 중심 정당’ 철학에 부합하는 인사로 장 의원을 꼽았다. 현재 장 의원은 평단원 최고위원 선출 절차를 위한 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다. 최민희 의원은 정 대표를 공개 지지한 인물이다. 당시 정 대표가 수박 논란에 휩싸였을 당시 최 의원은 “심하게 비난받는 정청래 후보를 지켜보면 짠하다”며 “비난에도 역비난하지 않고 여전히 유쾌·상쾌하게 선거운동하는 정 후보를 격하게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밖에도 한민수·김영환·이성윤 의원은 경선 유세 현장에 함께하며 힘을 실어줬다. 왼쪽으로 붙는 민주당…좁아지는 공간 강성 지지층 등에 업고 개혁가의 길로 개혁가의 길을 걷는 정 대표의 존재감이 커지자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을 거치며 ‘중도 보수론’으로 넓혀놨던 민주당의 정치 공간이 다시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 대표의 강경한 태도가 민주당의 기조가 된다면 야당과의 협치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이다. 실제 정 대표는 “악수는 사람하고만 한다”며 국민의힘을 척결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 추모식에서 정 대표는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과 악수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송 비대위원장 역시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그야말로 ‘국회 빙하기’ 시대가 열렸다. 여당인 민주당은 좌우를 넓게 아우르는 정당이 돼야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서 유리한 구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민의힘이 보수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왼쪽은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에 맡겨둔 채 중도 보수를 자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원의 힘으로 대표가 된 만큼 그는 개혁을 완수하기까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주당 상임고문단도 “집권여당은 당원만 바라보고 정치를 해선 안 된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당 상임고문단 간담회에서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서도 “우리 국민은 당원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내란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전광석화처럼, 폭풍처럼 몰아쳐 처리하겠다는 대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의욕이 앞서 결과를 내는 게 지리멸렬한 것보다는 훨씬 나으나, 지나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민주당으로 민주당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포스트 이재명’ ‘이재명 키즈’가 아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새로운 길을 열어야 당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등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민주당의 주류는 강성 지지층이다. 당원이 당을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의 숫자가 얼마가 되든 목소리가 커 여론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주류의 흐름에 올라탄 사람이 정 대표다. 이 대통령이 대표이던 때와는 다른 모습의 민주당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아직 남은 정 견제 세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SNS에 올렸다 곧바로 삭제한 게시글이 화제다. 민주당은 지난달 19~20일 양일간 경주를 찾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 상황을 점검했는데 정 대표가 마치 천마총 금관을 쓰고 있는 듯한 착시 사진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정 대표가 금관을 직접 착용한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시에 왕 노릇을 한다” “벌써 왕인 것처럼 군다” 등 거친 비판이 쏟아졌다. 현재 해당 사진은 삭제됐지만 8·2 전당대회 때 불거진 박찬대 의원과의 앙금이 아직 남은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 이유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