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살해위협’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후계구도’ 딴지에 ‘제거작전’ 본격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를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고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2명이 검거됐다. 망명 이후 13년 간 끊임없이 신변위협을 받아왔던 황 전 비서. 하지만 이번 사건은 다르다. 북한이 현역 장교로 짜인 공작 조직을 직접 투입해 살해를 기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위협은 남한 내 고정간첩이나 친북세력에 의한 것으로 추정됐던 것. 이처럼 북한이 극단적인 계획을 시도한 것은 최근 황 전 비서의 행적과 발언이 원인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살해 위해 북 간첩 남파 드러나
망명 후 수백 차례 테러 위협…공작 조직 투입은 처음


북한의 테러대상 1호 황장엽(87)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암살지령을 받은 간첩이 검거되면서 남북을 오갔던 황 전 비서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23년 평안남도 강동에서 일본인 회사 사무원이었던 부친 아래 태어난 황 전 비서는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으며 성장했다.
함북 주을의 경성중학을 마치고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에 들어가 대학과정을 마쳤다. 그 뒤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을 공부했다. 이 과정을 통해 공산주의 이론의 모태가 된 학문을 연마한 그는 1954년 고국 땅에 돌아와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엘리트 코스 학자 인생
망명으로 ‘테러 인생’

승승장구한 엘리트 인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1958년 노동당 핵심지위로 발탁되면서 김일성의 철학비서, 김일성대학 철학강좌장과 학부장을 거쳐 1965년 총장자리에 올랐다. 42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룬 성과였다. 그 후 10년 동안 총장자리를 지킨 그는 김일성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관여하면서 당시 후계자였던 김정일을 후원했다.

또 1970년 당중앙위원, 1980년 당비서, 198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87년 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적 입지도 다져갔다. 이처럼 북한 내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던 황 전 비서는 뜻밖의 선택을 한다. 일흔 넷이라는 나이에 가족을 버린 채 남한으로 망명한 것. 그는 1997년 2월 북경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뒤 필리핀을 거쳐 1997년 4월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황 전 비서의 망명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던져줬다.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당대의 이론가이자 후계자 김정일에게 ‘제왕학’을 가르친 스승의 갑작스런 남한 행은 파문을 낳기에 충분했다. 각종 의혹도 불러일으켰다. 자신이 이룬 모든 성과와 가족들을 버리고 망명을 시도한 동기와 당시 정부의 미심쩍은 대응, 안기부의 사건 개입 여부 등 숱한 미스터리를 남겼던 것.

하지만 황 전 비서를 괴롭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망명 신청 직후부터 그의 목을 조여오던 테러 위협이 그것.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당시 황 전 비서의 망명에 대해 “배신자여 갈 테면 가라”고 언급해 그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예고했다. 이 때문에 황 전 비서 곁에는 늘 7~8명의 경호원이 그를 감싸곤 했다.
이 같은 철통보안 속에서도 테러의 위협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2001년에는 당시 민주당 정대철 위원이 “황장엽씨가 지난 4년간 국내에 거주하면서 270여 차례나 신변 위협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황 전 비서를 향한 어둠의 그림자가 끊이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줬다.

황 전 비서에 대한 위협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 김정일국방위원장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다 대내외적인 자리에서 북한 체제의 만행을 비판했다는 것이 일순위로 꼽힌다. 철저히 비밀에 묻혀있었던 북한의 내부사정이 그의 입을 통해 발설될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황 전 비서를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2004년 3월에는 황 전 비서가 회장으로 있던 탈북자동지회 사무실에 식칼과 위협적인 문구를 넣은 유인물이 발견돼 테러 공포를 고조시켰다. 당시 사무실 출입문에 피로 추정되는 붉은 색 물질이 묻은 황 전 비서의 사진과 식칼, ‘죽여 버리겠다’는 글이 적힌 유인물 10여 장이 뿌려져 있었다. 유인물에는 황 전 비서는 물론 함께 망명한 김덕홍 전 여광무역 사장, 주 콩고 북한 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있다 1991년 망명한 고영환씨 등을 살해하겠다는 문구도 적혀 있었다.

또 현장에서 발견된 ‘민족 반역자 황장엽은 각오하라’는 제목의 유인물에는 황씨의 반북 활동에 대한 경고가 담겨져 있었다. 이 유인물에는 “이북의 사랑과 믿음에 배신과 변절로 대답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한 마리 미친×처럼 반북모략에 나서고 있다”며 “그것도 모자라 변절자 황장엽은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손을 잡고 북을 모략하기 위해 방일 행각까지 계획하고 있다”는 내용의 비난 글이 적혀있었다.

피로 물든 협박 편지
끊이지 않는 테러공포

이뿐만 아니다. 2006년 6월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황 전 비서를 응징하겠다는 내용의 협박편지가 배달됐고 그해 12월에는 빨간 물감이 뿌려진 황 전 비서의 사진과 손도끼가 사무실로 왔다. ‘황장엽은 쓰레기 같은 그 입을 다물라’,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내용이 담긴 경고문도 함께였다.

하지만 황 전 비서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신변위협에 대해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지난 3월3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초청 강연에서는 자신의 신변안전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바 있다. 그는 “경호는 내가 요구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한국 정부 측에서 테러를 우려해서 배려하는 것”이라며 “조금도 김정일의 테러를 겁내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낮추지 않았다. 이날 강연에서 황 전 비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나는 김정일 사생활이나 성격 이야기하러 한국에 온 게 아니다. 내가 김정일 욕하면 뭐하겠나. 업적 가지고만 평가하면 된다. 300만을 굶겨 죽인 게 누구냐”고 전했다.

후계자로 알려진 3남 김정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황 전 비서는 “그 녀석 만난 일도 없고 그깟 녀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며 “김정일보다 못하면 못했지. 그깟 놈 알아서 뭐하나”라며 “미국 같은 위대한 나라가 관심을 돌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천안함 침몰사고에 북한이 관여했을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그럴 가능성이야 있다. 하지만 가능성만 갖고 책임을 추궁할 수 없다”며 “현재로선 그것과 관련된 정보도 없고 증거가 없어 말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황 전 비서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북한정권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4월8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황 전 비서는 “지금 북한은 부친인 김일성 주석 시대보다 독재의 정도가 10배는 더 강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 “북한은 나를 반역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반역자는 국민을 굶어 죽게 하고 있는 김정일이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4월4일에는 황 전 비서가 망명할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수령을 배반한 개만도 못한 짐승”이라고 황 전 비서를 비난한 문건이 일본 언론에 공개됐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이날 “김정일이 황 전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했을 때 황씨를 격렬하게 매도했다”고 보도했다. <마이니치신문>은 “김정일은 황 전 비서에 대해 ‘인간도 아니다. 개만도 못한 짐승이나 다름없다. 인생도 얼마 남지 않은 74세에 당과 수령의 신임을 배반한 자를 어떻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라고 매도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김정일 비난 수위 높아져 극단적 방법 동원했다는 의혹 제기
후계구도 정당화 논리에 문제 생긴다는 우려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여


또 지난 4월5일 북한 매체는 “추악한 민족 반역자 황가(黃家)가 미국, 일본을 싸다니며 미친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고 비난하며 “무사치 못할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위협은 현실로 다가왔다.

지난 4월20일 북한이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를 살해할 목적으로 남파한 간첩 2명이 검거된 것.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와 국가정보원은 이날 위장 탈북한 후 국내로 들어와 황 전 비서를 살해하려한 혐의로 김모(36)씨와 동모(36)씨를 구속했다.

13년 만에 왜 암살지령?
북한 의도 의혹 모락모락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1992년 인민무력부 정찰국(현 정찰총국) 소속 전투원으로 선발된 뒤 1998년 북한 노동당에 입당했다. 본격적으로 남파 훈련을 받은 것은 2004년부터였다. 이후 2008년 11월 인민무력부 정찰총국장인 김영철 상장으로부터 황장엽 암살 지령을 받고 같은 해 11월 말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옌지로 향한다. 중국 옌지에서 중국 내 연락책을 통해 탈북 브로커를 소개받아 12월에 일반 탈북자와 함께 태국으로 갔다. 그리고 올해 1월말 김씨가, 2월 초에는 동씨가 한국에 입국했다.

이들은 남파를 앞두고 다른 사람으로 신분을 위장했다. 이들 중 동씨는 황 전 비서의 친척인 것처럼 신분을 위장한 뒤 “황씨 친척이라 더 이상 승진을 못해 남조선행을 택했다”고 탈북 이유를 둘러댄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이들은 황 전 비서가 자주 다니는 병원이나 장소, 지인 등을 파악해 보고한 뒤 구체적인 살해계획을 지시받기로 했다. 하지만 국내에 들어온 뒤 탈북자 심사과정에서 꾸며낸 인적사항과 동일지역 출신 탈북자와 대질신문을 받다 가짜 경력이 탄로났고 결국 암살지령을 받고 남파된 간첩임을 털어놨다.

이처럼 북한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황 전 비서를 제거하려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설이 나오고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최근 황 전 비서의 행적이 원인이 됐다는 것. 망명 이후 김정일 독재정권을 비난해 온 그는 정권교체 이후 김정일에 대한 비난 수위를 한층 높였다. 이런 황 전 비서가 북한에게는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고 암살시도를 택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황 전 비서의 최근 행보가 ‘3대 세습’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것. 후계구도의 정당화 논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불안감에 암살이란 극단적인 카드를 썼다는 설이다.

한편 이번 간첩 사건에 대해 황 전 비서는 “살해 위협 신경 안 쓴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의 한 측근은 “어제 저녁 간첩들이 붙잡혔다는 뉴스를 보고 황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러냐’고 말씀하셨다”며 “황 선생님은 2006년 손도끼 협박 때도 ‘어차피 죽을 거 그쪽한테 죽어도 상관없겠지’라고 말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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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무원’ 여야 수장 동병상련

‘고립무원’ 여야 수장 동병상련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과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당내 강경파의 반발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동병상련을 느낄 법한 두 사람은 여야 지도부 회동이라는 전략적 제휴에 가까운 선택으로 각자의 어려움을 풀고 정국에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용산 대통령실로 초청했다. 오찬은 약 1시간 동안 진행됐고, 이 대통령과 장 대표는 30분 동안 비공개 영수회담을 진행했다. 유튜브 권력자? 이 대통령과 장 대표는 여야의 수장이지만, 각자의 이유로 자신의 진영에선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두 사람의 회담은 이 때문에 더욱 주목받았다. 정 대표는 지난달 26일 장 대표가 선출된 이후 줄곧 ‘무시’ 전술로 대응했다. 정 대표는 장 대표 선출 여부와 관계없이 국민의힘에 대해 정당해산심판 청구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강공 기조를 잇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여야 지도부 회동과 영수 회담을 진행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이 대통령이 장 대표와 만난 것 자체가 고립무원에 처한 이 대통령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겪는 어려움은 여당인 민주당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이 대통령과 민주당의 관계에 대해선 “대통령 위에 방송인 김어준씨가 상왕으로 군림한다”는 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 대통령은 문재인 전 대통령 등 친문(친 문재인) 진영과 오랜 갈등 관계에 있었고 “민주당에서 세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김어준 상왕설’은 이젠 진보 성향 언론에서도 공공연하게 거론한다. <주간경향>은 지난 8일 ‘김어준 상왕설’을 다루면서 “김씨가 비판·견제가 어려운 신성불가침 영역이 됐다”는 민주당 내부 반응과 “김씨는 민주당의 고정 상수고, 당의 일부 기능이 김씨의 유튜브 채널로 이관됐다”는 일부 정치평론가 반응도 소개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위로 알려진 민주당 곽상언 의원은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유튜브 권력이 정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면서 김씨를 강하게 비판했다. 다음 날엔 “저는 ‘유튜브 권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정치할 생각은 없다”며 “이 방송에 출연하면 공천받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는 의견을 밝히셨다”고 강조했다. 곽 의원은 곧바로 반격을 받았다. 같은 당 최민희 의원은 지난 9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곽 의원을 일컬어 ‘부화뇌동 국회의원님’이라고 지칭하면서 “자존감을 좀 가지시라. 부끄럽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최 의원이 곧바로 반격한 것은 역설적으로 김씨와 이 대통령의 위상을 확인시켜 줬다. 이 대통령은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5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검찰 해체 ▲각종 외교 현안 ▲조국혁신당 성범죄 의혹 등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위에서 누르고 옆에서 치받고 이 대통령 앞에 수북한 난제 민주당에선 정 대표가 검찰개혁 관련 공세를 주도한다. 현재 진행 중인 3개의 특검(내란·김건희·채 상병)과 관련해 수사 기간·범위·인력 대폭 확대와 관련 재판 녹화 중계를 추진하는 특검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개정안은 이미 국회 법사위를 통과했고, 국민의힘은 헌법재판소에 효력정치 가처분을 신청했다. 검찰을 겨냥해선 “추석 전 검찰을 해체하고, 중대범죄수사청(이하 중수청)과 공소청을 설치하겠다”는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사법부를 겨냥해선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민주당과 이재명정부 내부에선 중수청의 소속 부처를 놓고 이미 갈등이 있었다. 친명(친 이재명)계 좌장으로 알려진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지난달 27일 “중수청을 행정안전부에 설치하면 민주적 통제가 어려워질 수 있다”면서 사실상 ‘법무부 설치’를 주장했다. 그러자 친민주당 진영은 정 장관에게 강하게 반발했다. 그동안 친민주당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던 임은정 서울동부지검장은 지난달 29일 검찰개혁 공청회에서 “정 장관도 검찰에 장악돼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검찰개혁 후속 법안을 마련하는 정부 기구 구성과 관련해 정 대표와 대통령실 우상호 정무수석이 크게 언쟁을 했다”는 설까지 불거졌다. 장 대표는 이 대통령과 만났을 당시 공개 발언에서 특검 연장·특별재판부 설치와 관련해 이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청했다. 장 대표가 거부권 행사를 요청한 명분은 ‘견제와 균형 붕괴’였다. 장 대표는 이어진 비공개 회동에서도 “오랫동안 되풀이된 정치 보복 수사를 끊어낼 수 있는 적임자는 이 대통령”이라면서 특검 연장·특별재판부 설치에 강한 우려와 유감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장 대표에게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이 대통령의 반응을 놓고 “이 대통령이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정 장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수청 소속 부처도 행정안전부로 결정됐다. 이에 대해서도 “이 대통령이 당의 의사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4일(현지시각) 미국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현대차·LG 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의 한국인 노동자 300여명 구금 사태도 이 대통령에게 비판의 화살이 집중되는 계기가 됐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5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그로부터 불과 10일 후 발생한 사태였다. 안팎 모두 꼬인 실타래 한미 양국은 정상회담 후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펀드를 조성하기로 합의했고,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는 관세율은 15%로 확정했다. 일본은 5500억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기로 한 후 15% 관세율을 받아냈다. 그런데 일본의 관세율 15%가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내려지면서 명문화된 것과 달리, 우리는 아직 문서를 받아내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3500억달러 투자처를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 300여명이 구금된 구체적인 이유는 이들이 최대 90일 동안 단기 체류만 할 수 있는 무비자 전자여행허가 제도를 통해 입국해 근무한 것이었다. 단기 체류 비자로 입국해 근무한 이상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까지 진행한 이 대통령에겐 “미국을 왕래하는 국민의 비자 문제에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냐”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커진다. 일본과의 외교도 난항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진행한 후 17년 만에 공동언론발표문을 채택했다. 정상회담도 그만큼 훈훈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하지만 낮은 지지율과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의 지난 7월 참의원 선거 패배로 인해 사퇴 압력에 시달리던 이시바 총리는 지난 7일 결국 사퇴를 선언했다. 후임 총리 후보로는 자민당 다카아치 사나에 의원과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이시바 총리와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자민당 내에서 파벌 색이 짙지 않아 비교적 온건한 정치 성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다카이치 의원은 강경한 우익 포퓰리스트였던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알려졌다. 다카이치 의원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 ▲헌법 개정 ▲재무장 추진 ▲아베노믹스 계승 등 아베 전 총리와 거의 비슷한 정치색을 드러냈다. 지난 1994년엔 <히틀러 선거전략>이란 책의 추천사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책엔 “단기간에 여론을 모아 권력을 빼앗았다”거나 “긴급조치로 적을 섬멸했다”는 등의 독일 나치의 선거전략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설득할 수 없는 유권자는 말살한다”는 등 작전을 일본 정치인의 선거 승리 전략으로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호의적인 국내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고의로 신사 참배를 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와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민주당 소속임에도 강경한 우익 성향으로 유명했던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와 갈등하면서 지난 2012년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하는 강수를 뒀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재임 중 아베 전 총리와 상당한 갈등을 빚으면서 대중국 외교에 공들였다. 다카이치 의원이 후임 총리가 되면, 이 대통령도 전임 대통령들처럼 상당한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 혁신당 나비효과 게다가 우원식 국회의장은 지난 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경축 행사에 참석한 것으로 보수 성향 유권자들에게 큰 비판을 듣고 있다. 우 의장은 행사에 함께 참석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짧게 인사를 나눴다. 반면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김 위원장을 2번이나 불렀음에도 아무 반응을 얻지 못해, 이 역시 보수 성향 유권자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이후 친서방 외교에 유화적인 방향으로 선회하려고 했다. 하지만 민주당의 전통적 방향과 충돌하는 상황으로 해석되고 있다.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 내부에서 불거진 성추행·성희롱 사건도 이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 혁신당은 조국 비상대책위원장 등 친문 핵심 일부가 창당했다. 이 사건은 혁신당 강미정 전 대변인이 탈당하면서 폭로해 외부에 알려졌다. 가해자로 지목된 김보협 수석대변인은 문 전 대통령과 친분이 돈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우석 전 사무부총장은 조 비대위원장이 민정수석이었을 당시 민정수석실 행정관을 지냈다. 조 비대위원장은 그동안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 여파는 민주당과 이 대통령에게 번지고 있다. 기성세대 남성의 위선과 운동권 특유의 성 문화 논쟁으로 확대되면서,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범죄 사건까지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으로선 친문계와 빚고 있는 광범위하면서도 조직적인 엇박자가 국정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그 뒷감당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장 대표도 이 대통령 못지않은 고립무원 상황에 직면했다. 시작은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로부터도 신임받았던 김도읍 의원을 지난 1일 정책위의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러자 “장 대표 당선에 큰 공을 세웠다”고 자부하던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이 크게 반발했다. 특히 고성국 ‘고성국TV’ 대표는 지난 2일 “내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려면, 국민의힘이 지자체장 30석을 자유통일당 등 자유 우파 정당 4개에 양보하면 된다”고 요구했다. 강경 보수 공세 친한 숙청 시동 민주당의 각종 입법 공세 방어 등 대여 공세 수단도 마땅치 않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노란봉투법 통과를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동원했지만, 큰 의미를 두기 어려웠다. 노란봉투법은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 종료 직후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민의힘이 할 수 있는 일은 본회의 불참밖에 없었다. 3개의 특검은 이미 국민의힘을 사정권에 두고 있다. 현실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장외 집회밖에 없다. 장 대표는 강경한 대여 공세를 약속하면서 당 대표에 당선됐지만, 강경한 대여 공세를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은 처음부터 없었다. 따라서 여야 지도부 회동은 장 대표에겐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기회였다. 최소한 “이 대통령에게 우리의 요구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고 자부할 만한 명분이 마련된 것이었다. 내부 사정도 녹록하진 않다. 장 대표에겐 지난해 12월 결별한 친한계(친 한동훈)와의 내부 투쟁도 숙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만 장 대표가 당선된 것 자체가 이미 친한계엔 큰 타격이었다. 아울러 친한계엔 ▲김종혁 전 최고위원 ▲신지호 전 사무부총장 ▲윤희석 전 대변인 ▲송영훈 전 대변인 등 국민의힘을 대표해 각종 시사프로그램 패널로 출연하는 인사들이 다수 소속돼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친한계의 이해관계를 각종 방송에서 대변했다. 장 대표는 지난 7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서 “방송에서 당의 의견을 가장해 당에 해를 끼치는 발언을 하는 것도 해당 행위”라며 “국민의힘을 공식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임을 알리는 패널 인증제도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장 대표의 방침은 “국민의힘 몫 토론자로 출연해 친한계를 대변하는 인사들을 방송에서 솎아내려는 것”이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이처럼 장 대표는 당내에서 양면 전선을 펼쳐놨기 때문에 현재 상황이 녹록지 않다. 강도 높은 내부 투쟁을 진행하는 이 대통령과 장 대표로선 여야 지도부 회동이 동병상련에 가까운 전략적 제휴였을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는 비공개 회담에서도 국민의힘의 의견을 모두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도 뚜렷한 확답만 하지 않았을 뿐, 대통령 당선 이전 강성 이미지를 중화하려는 듯 유화적으로 대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장 대표가 이 대통령과 정 대표의 불화를 이용하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장 대표도 내부 반발이 있고, 강도 높은 내부 투쟁을 진행해야 해서 제 코가 석 자”라고 보고 있다. 아울러 이 대통령과 장 대표는 그동안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중도를 지향하고자 강경파와 투쟁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분간 이들이 전략적 제휴를 맺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정 대표는 이 대통령과 장 대표의 회담 분위기를 무색하게 하듯이 다음 날인 지난 9일 진행된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내란 청산은 정치 보복이 아니”라며 “국민의힘이 내란 세력과 단절하지 못하면, 위헌정당 해산심판 대상이 될지도 모르니 명심하라”고 경고했다. 수북한 현안들 ‘내란’은 민주당이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일반 명사가 됐다. 정 대표는 대표적인 당내 강경파로서, 국민의힘에 대한 강경한 태도가 정치적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이 대통령과 장 대표가 마주 보고 성과를 낼수록 정 대표는 설 자리를 잃는다. 정 대표의 제동은 “고립무원에 처한 여야 수장이 서로에게 동병상련을 느껴도 큰 의미가 없을 것”이란 경고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바퀴들이 삐걱대는 사이 현안은 더욱 수북이 쌓이고 있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