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국회의장이 연초부터 벼랑 끝에 몰렸다. 새해 첫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직권상정으로 강행처리한 데 대한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는 것. 야당은 당초 오는 2월 임시국회 처리 입장을 밝혔던 김 의장이 말을 바꾼 것에 대해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보내고 있다.
이 같은 비난은 최근 김 의장이 직권상정 직전 이명박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더욱 거세지고 있다. 야당은 법적 대응과 함께 사퇴까지 요구하며 그를 압박하는 모양새다.
노조법 직권상정 직전 ‘MB와의 30분 통화’ 사실 드러나 곤혹
야당 “날치기 법안 통과 배후 밝혀졌다”…김 의장 사퇴 압박
“양심상 하나도 거칠 것이 없고 거짓이 없다. 고민 끝에 직권상정 했다.” 지난 1일 새벽, 제4차 국회 본회의에서 노조법 개정안이 통과된 뒤 밝힌 김형오 국회의장의 소감이다. 김 의장은 이날 야당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조법을 직권상정으로 강행처리했다. 민주당 등 야당은 앞서 노조법을 직권상정 하지 않겠다던 김 의장이 여당의 압박에 스스로 말을 바꿨다며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새해 벽두 날치기 통과
알고 보니 MB 입김
홍영표 민주당 의원은 “(김 의장은) 어떻게 아침에 한 얘기가 다르고 오후에 한 얘기가 다른가. 안 한다고 했다가 직권상정하고”라며 김 의장의 태도 변화를 지적했다. 원색적인 비난도 들려왔다. 김상희 민주당 의원은 “이 한밤중에 국회에서 굿이 벌어졌다. 국회의장 무당이 지금 살아난 우리 노동자들의 단결의 권리를 죽이고 있다”며 노조법 날치기 통과를 이끈 김 의장을 비난했다.
김 의장은 “내가 말한 부분은 소관 상임위인 환경노동위원회의 논의 중에는 직권상정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환노위에서 토론을 끝내라는 의미였다”고 해명하며 자신은 말을 바꾼 적이 없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노조법 직권상정에 대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불길은 더 거세져만 가고 있다. 논란의 불씨를 키운 것은 지난 5일 <중앙일보>의 보도다.
<중앙일보>는 이날 ‘김형오 의장의 노조법 직권상정은 MB가 전화로 30여 분 설득했기 때문’이라는 보도를 통해 김 의장이 직권상정 직전 이명박 대통령과 통화한 사실이 있음을 공개했다. 신문은 복수의 의장실 관계자의 말을 빌어 지난해 12월 31일 이 대통령이 김 의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노조법안이 반드시 처리돼야 하는 이유를 장시간 설명하며 의장을 설득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당시 국회 본회의장의 국회의장석을 지키던 김 의장의 전화 통화는 주위 사람들에게 들릴 정도로 간혹 큰 소리가 오고 가기도 했다고 밝혔다. 신문은 또 김 의장이 이 대통령과의 전화를 마친 뒤 밤 10시쯤 임태희 노동부 장관을 불러 대화를 나눴고 이후 법안 직권상정을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해당 보도는 애초 노동법을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약속했던 김 의장이 갑작스레 입장을 선회, 직권상정한 원인이 대통령의 입김에 있다는 지적이었다.
국회 대변인실은 즉각 반박에 나섰다. 노조법 직권상정은 김 의장의 독자적 결단일 뿐 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와는 무관하다는 것. 대변인실은 지난 5일 보도 자료를 통해 “이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는 예산안 연내 처리를 당부하고 준예산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는 취지였다”며 “노조법은 지나가는 말로 걱정하는 정도뿐이었다. 김 의장과 대통령의 통화가 노조법을 주제로 장시간 이뤄졌다는 보도는 전혀 사실과 맞지 않다”고 해명했다.
김 의장 사퇴 압박
법정 투쟁 움직임도
대변인실은 또한 “노조법 직권상정은 김 의장이 노조법이 개정되지 않을 경우 사회에 미칠 파장을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법안을 직권상정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변인실의 해명은 논란을 잠재우기는커녕 부채질한 모양새다. 김 의장과 이 대통령의 전화 통화 사실이 대변인실을 통해 공식 확인됨에 따라 야당의 비난이 더욱 거세지고 있는 것.
입법부의 수장이 여야의 대립이 팽배한 국회 법안 처리를 앞두고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논란을 키우고 있다. 민주당은 이날 성명을 통해 “김 의장은 이 대통령의 전화 때문에 직권상정을 결심했다는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오히려 이 대통령의 개입 사실을 확인해준 꼴이 됐다”고 지적하며 “이 대통령이 국회의장에게 직접 전화해 우려를 표한 것이 압력이 아니면 무엇이냐”며 강하게 비판했다.
김 의장에 대한 야당의 사퇴 압박 공세도 더해졌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은 “의회의 수장으로서 중립성과 독립성을 밝히고 그 권위를 세워야 할 김 의장은 대통령의 전화 한 통화에 자신이 내뱉은 대국민 약속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대통령의 오더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지적한 뒤 “김 의장은 의회의 수장이 아니라 수치다. 당장 그 의자에서 내려와야 한다”며 의장 사퇴를 촉구했다.
유은혜 민주당 수석부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국회를 행정부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킨 김형오 의장이 즉각 물러나는 것만이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밝혔다.
야당은 김 의장에 의해 강행처리된 노조법 개정안에 대한 법적인 대응을 예고하기도 했다. 민노당은 조만간 헌법재판소에 노조법 개정안에 대한 권한쟁의심판 청구소송을 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국회 대변인실 “김 의장 독자적 결단” 현 정부 개입의혹 부인
2010년 예산안 및 노조법 통과 등 당권 도전 위한 줄서기 의혹
민노당은 추미애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이 지난해 12월30일 환노위 전체회의에서 한나라당 소속 위원들만 회의장에 참석시켜 심의표결권이 침해됐다는 주장이다. 정치권은 김 의장이 애써 날치기 통과시킨 개정안이 본격적인 사법투쟁이 진행될 경우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인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한편 김 의장이 노조법 직권상정을 두고 현 정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했다는 해석들이 대두되자 정계에선 김 의장의 차기 당권 도전설이 더욱 힘을 받는 분위기다.
사실 정계 일각에선 오는 5월 임기 만료를 앞둔 김 의장이 차기 당권에 도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져있다. 김 의장이 직접 한나라당 대표직에 도전하겠다는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대표직 도전설은 측근들 입을 통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다. 일부 언론은 최근 차기 당권 도전이 주목되는 김 의장과 안상수 원내대표가 만난 자리에서 서로 당 대표 경선에 나갈 것인가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이에 정계는 김 의장의 이번 직권상정이 현 정부와 여당 내 지지세력을 모으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김 의장이 2월 국회상정을 약속했던 기존의 입장을 변경할 시 예측되는 야당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당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 것은 임기 종료 이후 자신의 행보를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인 것이다.
실제 김 의장은 앞서 예산안에 대해서도 국회법까지 무시하며 여당의 힘을 실어줬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31일 한나라당이 2010년 예산안을 장소를 바꿔 편법적으로 통과시키자 김 의장이 불과 3시간 만에 예산 처리에 필요한 예산부수법안에 대한 심사를 마칠 것을 국회 법사위에 요구한 것.
임기 뒤 당권 도전
염두에 둔 밑밥작전(?)
그러나 이에 앞서 유선호 법사위원장이 이미 법사위 산회를 선포한 뒤였던 것이 확인되면서 이는 1일 1회기 원칙에 따라 심사기간 지정이 무효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김 의장은 국회법이 정한 권한에 따라 심사기일 지정을 통보할 수 있다며 직권상정을 강행했다. 이로 인해 앞서 12월29일부터 3일간 연내 예산안 국회 처리를 두고 의장직까지 내건 채 본회의장 의장석을 지키고 있던 김 의장은 야당으로부터 “누구를 위해 자리를 미리 맡아두고 있는 것이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논란의 중심에 선 김 의장은 이에 대해 지난 6일 국회 조찬기도회 신년 예배 신년사를 통해 “국회의장의 말을 왜곡하고 아전인수 식으로 몰아치는 버릇은 없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형오 국회의장 프로필
1947 경상남도 고성 출생
1971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 졸
1992 ~ 현재 14, 15, 16, 17, 18대 국회의원
1998 한나라당 제1사무부총장
1998 한나라당 정보통신위원장
2004 한나라당 17대 총선 선거대책본부장
2004 한나라당 사무총장
2006 한나라당 원내대표
2007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
2008 제18대 국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