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전 총리가 20년 정치 인생을 내건 최대 싸움을 시작했다. 검찰이 인사 청탁과 뇌물수수 혐의로 한 전 총리를 불구속 기소하면서 이제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한 전 총리와 검찰의 대립은 법정에서도 팽팽할 것으로 예상된다.
혐의를 전면 부인하는 한 전 총리와 혐의가 충분하다는 검찰 모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탓이다. 정계는 이번 뇌물수수 의혹의 진실여부에 따라 한 전 총리와 검찰 중 한쪽의 도덕성에 치명타가 예상된다는 관측과 함께 양측의 공방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5만 달러 수수 혐의
검찰-한 전 총리 법정다툼 시작…증언 있고 물증 없어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검찰은 대한통운 비자금 횡령 사건을 수사하던 중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정계인사에게 5만 달러를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는 곧바로 정치권 로비 사건으로 언론에 일제히 공개됐고 일부에선 참여정부시절 고위층 관계자였던 H, J, K씨 등이 연관돼 있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이후 검찰은 의혹의 인물 H씨가 참여정부시절 총리를 지냈던 한 전 총리라는 진술을 확보하고 추가 조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곽 전 사장이 공기업 사장 취임을 목적으로 한 전 총리에게 미화 5만 달러를 지급했고 이에 대한 대가로 한 전 총리가 곽 전 사장의 남동발전 사장 선임에 힘을 보탰다고 파악하고 있다.
검찰은 구체적인 정황까지 밝혔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에 따르면 2006년 12월20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오찬에 곽 전 사장이 초대됐고 정세균 현 민주당 대표와 강동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 등이 함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곽 전 사장은 오찬 후 참석자들이 자리를 비우자 한 전 총리에게 총 5만 달러가 들어있는 봉투 2개를 건넸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진실의 힘 vs
검찰 날 선 칼날
이후 불과 몇 달 뒤인 2007년 3월 곽 전 사장은 한국전력의 한 임원으로부터 한전의 자회사인 남동발전 사장에 지원해 보라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고 같은 달 곽 전 사장은 남동발전 사장에 선임됐다는 게 현재까지 검찰이 파악한 내용이다.
검찰은 한 전 총리는 곽 전 사장의 자녀 결혼식에도 참석 할 정도로 평소 친분을 유지해 왔던 점을 강조하며 한 전 총리의 인사 청탁 혐의를 주장하고 있다. 검찰의 이 같은 판단에 대해 한 전 총리 측은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는 입장이다.
한 전 총리 측은 곽 전 사장이 오찬 이후 식당에 마지막에 남아 한 전 총리와 독대를 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또한 곽 전 사장이 남동발전 사장으로 임명되기 한 달 전 이미 한 전 총리는 총리직을 사퇴해 공기업 인사에 영향력을 끼칠 상황이 아니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당사자인 한 전 총리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곽 전 사장으로부터) 단돈 1원도 받은 일이 없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한 전 총리는 이후 두 차례에 걸친 검찰의 소환통보도 거부했다. 결국 지난해 12월18일에는 소환 거부로 검찰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지만 그녀는 8시간 동안 진행된 조사시간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다.
같은 날 밤 한 전 총리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조사를 통해) 검찰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허위 조작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앞으로 이 진실을 밝히는 데 제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양측의 대립이 팽팽한 가운데 결국 검찰은 지난해 12월22일 한 전 총리를 불구속 기소했다. 이로써 뇌물 수수 의혹을 둘러싼 한 전 총리와 검찰의 진실공방은 법원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러나 지난 수개월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들만 쌓아온 이번 사건은 법정다툼 역시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 결과가 가져올 후폭풍이 그만큼 큰 탓이다. 특히 한 전 총리는 이번 뇌물수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게 될 경우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게 된다. 사실 한 전 총리는 이름 석 자가 가져다주는 네임밸류가 높은 정계 인사 중 한 명이다.
검찰과 한 전 총리
되돌아 갈 곳 없다
재야 여성 운동가 출신으로 1999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로 정치에 입문한 그녀는 국민의 정부 시절 초대 여성부 장관을 거쳐 참여정부 시절에는 환경부 장관을 지내며 정계 핵심 인물로 성장해 왔다. 2006년 4월에는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에 오르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총리 시절 뇌물을 받고 인사 청탁에 앞장섰다고 판명될 경우 그녀의 20년 정치인생이 타격을 입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뿐만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당시 노 전 대통령 공동장의위원장을 맡으며 정계 전면에 재등장해 최근 서울시장 후보로 급부상한 그녀의 미래 행보에도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민주당 소속인 한 전 총리의 ‘뇌물수수’ 타이틀은 올 6월에 치러질 지방선거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에 한 전 총리도 이번 수사를 조작수사로 규정하고 정면 돌파한다는 생각이다.
한 전 총리는 지난해 12월11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기회에 제 모든 인생을 걸고 수사 기관의 불법행위와 모든 공작정치에 맞서 싸우겠다”며 검찰과의 전면전을 선언했다. 그녀는 또한 “진실을 밝히려면 그 과정 역시 진실하고 적법해야 한다”며 “진실이 아닌 일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기도 했다.
한 전 총리 수사결과 따라 서울시장 및 지방선거 ‘후폭풍’
총리 검찰 출두 당일 재단 기부 수억원…‘노풍’ 다시 부나
‘진실 사수’를 향한 한 전 총리의 다짐은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한 전 총리 측은 치열한 법정 공방에 대비해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 민주당 이종걸·송영길 의원 등 막강한 변호인단과 함께 재판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은 검찰도 마찬가지다. 조작수사, 표적수사 등의 화살로 무장한 한 전 총리 측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한 전 총리의 혐의가 사실이 아니라고 판결되면 검찰의 신뢰는 크게 추락하게 된다.
특히 지난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검찰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여전히 차가운 상황에서 이해찬, 유시민과 함께 대표 친노 인사로 꼽히는 한 전 총리에 대한 수사결과는 검찰로서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한 전 총리의 뇌물수수 의혹을 밝혀내지 못할 경우 검찰은 국민과 정계의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한 전 총리의 검찰 수사와 함께 노무현재단이 국민들로부터 때 아닌 관심을 받고 있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노무현재단은 노 전 대통령의 화보집 제작, 대통령의 묘역에 시공할 ‘박석(얇고 작은 돌)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곳으로 현재 한 전 총리가 이사장으로 이끌고 있다. 노무현재단은 최근 한 전 총리의 뇌물수수 의혹과 관련한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되자 후원금과 회원가입이 급증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실제한 전 총리의 뇌물수수 의혹이 언론에 공개된 후 노무현재단의 신규 회원가입 인원은 하루 평균 150∼200명으로 평균 50% 이상이 늘었다. 노 전 대통령의 묘역 조성과 관련한 후원도 급증했다.
노 전 대통령 묘역에 시공할 ‘박석 캠페인’은 시작한 지 사흘 만인 지난해 12월18일까지 3500여 명이 참여했고 월 1만원 이상 후원 회원도 지난해 12월에만 2000명가량이 늘었다. 특히 한 전 총리가 검찰에 출두한 지난해 12월18일에는 재단에 2억2012만원의 기부금이 접수됐다. 고액기부 2억원과 시민특별성금 2000여 만원 등이다.
뇌물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정치인에게 국민들의 긍정적인 관심이 더해지는 것은 이례적인 경우다. 이에 정계 일각에선 검찰을 향한 반감작용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실제 한 후원금 기부자는 검찰에 맞서고 있는 한 전 총리를 응원하기 위한 기부라며 직접적인 뜻을 밝히기도 했다.
노무현재단 기부급증
검찰 향한 반감인가?
노무현재단도 한 전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자극을 미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전 총리는 정치공작 분쇄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의 양정철 대변인을 통해 “진실의 힘이다”라며 “국민들이 진실을 바탕으로 일하는 재단에 신뢰를 보내줘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