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특집④>2009년 뒤흔든‘신드롬 9’

기쁨보단 눈물이 환희 보단 분노가

2009년 국민들이 열광한 신드롬은 어떤 것일까. 거성들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쏟은 국민들은 모질게 불어닥친 불황 앞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이런 와중에 유행한 신종플루는 ‘죽음의 공포’에까지 떨게 만들었다. 미중년 열풍에 동참하려는 중년남성들의 꽃단장은 길어졌고 고단한 하루의 마감은 막걸리 한 사발이 함께했다. <일요시사>에서는 2009년 한 해를 물들였던 신드롬 9가지를 뽑았다.

정신적 지주였던 거성들의 죽음 잇따라 눈물 마를 날 없어
최악의 불황 닥치면서 불황타파 신 풍속도 여기저기 등장

2009년 대한민국을 흔든 신드롬 중 하나는 정신적 지주였던 거성들의 죽음이 몰고 온 파장이다. 유난히 큰 인물들의 죽음이 많았던 2009년,국민들의 안타까운 눈물도 끊이지 않는 해였다.

1>영웅들의 죽음

그중 하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국민들의 슬픔과 충격은 더욱 컸다. 때문에 전국에 마련된 분향소에서는 몇 달 동안 향냄새가 가실 줄을 몰랐다. 노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도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때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서거 당시 전국에서 추모객들이 찾아와 못다 이룬 그의 꿈과 안타까운 죽음을 기렸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도 여전히 국민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있다. 한평생 화해와 사랑을 전한 김 추기경은 지난 2월16일 향년 87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1969년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된 김 추기경은 종교와 세대를 뛰어넘는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가난한 자와 약한 자,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서 언제나 바른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은 연일 이어진 조문행렬이 말해줬다. 고인이 된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명동성당으로 달려간 국민들의 수는 무려 40만명. 늦겨울의 추운 날씨 속에서 수 시간을 대기해야 했지만 누구도 불평 없이 김 추기경의 마지막을 눈물로 보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줬던 또 하나의 인물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몇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김 전 대통령이었기에 그의 서거는 많은 이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인동초의 삶을 살며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던 김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도 이념과 지역을 초월한 슬픔은 가실 줄 몰랐다. 더구나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뜬 지 불과 3개월 만에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을 잃어 국민들의 허망함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2>불황이 부른 슬픈 신드롬

거성들의 죽음이 가슴을 시리게 했다면 돌아온 불황은 몸을 시리게 했다. 외환위기 10년 만에 닥친 불황은 갖가지 신풍속도를 만들었다. 가장 큰 변화는 돈을 쓰는 방식이다. 불황에 잘 팔린다는 제품들이 어김없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 것.그중 하나는 야한 속옷이다. 비싼 겉옷보다는 상대적으로 싼 속옷으로 기분전환을 원하는 이들의 손길이 야한 속옷으로 향한 것이다. 또 외출을 자제하고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속옷 매출을 늘리는 요인이기도 했다.

나영이 사건, 마약인구 증가 등 해결 못한 사회문제들
낮에는 신조어, 밤에는 막걸리로 하루 시름 달래기도


미니스커트 열풍 역시 불황방정식과 맞아떨어졌다. 심지어 23cm의 ‘마이크로 미니스커트’까지 등장해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칼바람 속에서도 미니스커트는 여전히 사랑받는 아이템 중 하나다. 도시락 열풍도 불황의 단면을 보여줬다. 학창시절 등교 버스 안에서나 날 법한 김치 냄새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풍긴 것도 도시락 열풍이 가져온 현상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데 돈을 아껴야 하는 샐러리맨들의 선택이다.

불법 사채업자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악행들도 불황의 그림자로 남았다. 돈이 궁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사채업자들은 이들의 절박한 심정을 악용해 뱃속을 채웠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고리의 이자를 갚지 않을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행각이 이어졌다. 감금과 협박, 폭행을 서슴지 않는가 하면 채무자를 자살로 내몰기도 했다. 특히 여성 채무자들은 성희롱, 성폭행을 당하거나 성매매업소에 팔려가는 등 수치스런 대가가 뒤따랐다.

3>신종플루에 국민들 ‘벌벌’

2009년 4월 멕시코에서 발생한 신종플루 역시 사망자의 등장과 함께 각종 신드롬을 퍼트렸다. 가정에서 직장, 공공장소까지 신종플루가 만든 다양한 신풍속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먼저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공공장소에선 마음 놓고 기침 한번 못하는 각박한 세태가 생겼다. 직장인들의 변화도 눈에 띄었다. 점심시간 메뉴선정부터 회식문화까지 생활 전반의 모습이 바뀌었다.

그런가 하면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많은 장소는 피하는 분위기로 인해 여행이나 외식업 등 관련 산업이 된서리를 맞기도 했다. 건강염려증이 확산되는 풍조도 생겨났다. 건강식품을 과하게 챙겨 먹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건강염려증의 한 단면이다. 2009년 후반에 들면서 신종플루 공포가 서서히 줄어들었지만 해가 바뀌어도 신종플루가 만든 풍속도는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4>어린이 성범죄 현주소

이른바 ‘조두순 사건’으로 촉발된 어린이 성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 역시 2009년 대한민국을 우울하게 만든 신드롬 중 하나다. 2008년 12월, 초등학생 나영이를 화장실로 끌고 가 성폭행을 저지른 범인 조두순은 나영이가 평생 겪어야 할 아픔에 비해 너무나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이는 한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져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이와 함께 아동성폭력의 심각성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어린 시절 성폭력을 당해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과 성폭력을 당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주변인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피해사실을 알리면서 파문은 날로 커졌다. 이에 따라 관련 법규가 제정되는 등 어린이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 진일보한 결과를 얻기도 했다.

5>‘엽기동영상’ 신드롬

‘저런 걸 도대체 왜 찍어서 유포하는 거야?’ 보기만 해도 손사래를 치게 되는 엽기동영상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 것도 2009년이다. 이 동영상들은 대부분 청소년들이 촬영하고 인터넷에 올린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제목도 끔찍한 엽기동영상 중 하나는 ‘여학생 알몸 폭행’이란 동영상. 화면 속에는 옷을 벗은 채 또래 여학생에게 폭행을 당하는 여학생들이 등장한다.

동영상을 찍은 목적은 더욱 흉악했다. 성매매를 원하는 남성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주고 여학생들에게 성매매를 시킬 목적이었던 것. 이밖에도 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을 성희롱하는 장면이 담긴 ‘선생님 꼬시기’, 초등학생들을 때리거나 괴롭히는 장면이 담긴 ‘초딩 낚기’ 등의 제목을 단 동영상들이 등장해 충격을 준 바 있다.

6>백색가루 유혹 ‘마약 열풍’

환각의 세계를 잊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 2009년 마약신드롬은 어느 때보다 거셌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연예계 마약파문에 신종마약의 습격까지 백색가루는 어디서나 국민들을 유혹했다. 특히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서울 홍대나 이태원 일대의 클럽은 마약으로 신음한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와 달리 마약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기호식품’쯤으로 전락하면서 죄의식없이 마약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수도 급증했다.

이태원의 한 클럽 관계자는 과거에 비해 요즘 젊은이들은 마약을 접하는 일이나 환각에 빠져드는 것을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말해 최근의 마약열풍을 짐작케 했다. 그는 “과거 마약쟁이들이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마약에 손을 댔다면 지금은 좀 더 신나게 놀고 춤추기 위해 스스럼없이 마약을 하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마약인구가 증가하자 정부는 단속과 마약범 색출에 주력하겠다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그 효과가 새해부터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아직 미지수다.

7>미중년 신드롬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인기로 꽃남 열풍에 불이 붙은 가운데 중년층의 반란도 심상치 않았다. 축 처진 뱃살에 근육이라곤 없는 몸, 술과 피로에 찌들어 주름살과 기미로 가득한 얼굴로 대변되던 중년남성들이 외모 가꾸기에 돌입한 것. 외모에 관심이 많은 중년남성들을 일컫는 노무족(No More Uncle의 줄임말)이란 신조어가 생긴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일주일에 2~3일은 폭음에 시달리던 중년남성들은 헬스클럽에 가기 위해 과감히 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내에게 맡긴 채 나 몰라라 했던 패션에도 관심을 가진다. 죽기보다 싫은 게 쇼핑이었지만 옷차림에 신경을 쓴 이후로는 유행하는 스타일을 공부하려 백화점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고스톱을 치거나 증권현황을 알아보는 것이 전부였던 인터넷생활도 바뀌었다. 피부관리법이나 뱃살 줄이는 비법을 찾아보는 데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년남성들의 반란이 일어난 이유 중 하나는 ‘꽃중년’ 연예인의 등장이다. 배 나오고 머리숱 빈약한 남성들로 그려지던 드라마 속 중년남성의 변화는 남성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중년남성도 충분히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사회분위기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매력적인 외모를 가꾸게 된다는 것. 이로 인해 중년남성들의 성형열풍, 남자 화장품 판매량 급증 등의 현상이 뒤따르기도 했다.


8>막걸리의 귀환

맥주와 와인에 밀려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던 막걸리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번화가마다 막걸리집이 속속 생기는가 하면 콧대 높은 백화점 진열대에도 막걸리 병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최근엔 홍대 클럽에까지 막걸리가 등장하는 등 그 열기가 날로 뜨겁다. 중년들에겐 아련한 추억으로, 젊은이들에겐 촌스러운 술로 기억되던 막걸리가 돌아온 것에는 불황이 자리한다.

싼값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이 막걸리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기 때문이다. 서양 술에 비해 어울리는 안주도 비교적 싸다. 두부김치, 빈대떡 등 싸고 맛좋은 안주들이 막걸리와 안성맞춤이다. 복고열풍 역시 막걸리의 인기를 불렀다. 즐겁기만 했던 시절을 함께한 술을 마시면서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추억을 더듬으려는 이들에게 막걸리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날로 세련미를 더해가는 막걸리 맛의 변신도 혀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들쩍지근하고 텁텁했던 막걸리는 수십 년의 개량과정을 거쳐 감칠맛나면서도 깔끔하게 변모했다. 한국인을 넘어 세계인들의 입맛까지 유혹하는 막걸리의 변신은 앞으로도 기대할 만하다.

9>‘신조어’ 열풍

한 해 만들어진 신조어는 그 사회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증거다. 2009년에도 기발한 신조어들이 등장해 울고 웃게 만들었다. 특히 2009년 등장한 신조어에는 새로운 남녀상을 표현하는 단어가 많았다.  먼저 남성을 지칭하는 신조어에는 결혼할 생각 없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초식남, 김밥에 들어가는 우엉처럼 존재감 없고 비실비실한 우엉남, 근육질 몸매에 마초 같은 행동으로 여심을 유혹하는 짐승남, 잘나가는 ‘부인 남편 친구’를 뜻하는 부친남, 한 오락프로그램에서 키 작은 남성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여 파문이 일었던 ‘루저남’ 등이 있다.

반면 여성을 지칭하는 신조어는 많지 않다. 직장에서는 똑 부러지는 커리어우먼이지만 집에 들어오면 건어물에 맥주를 마시며 외로움에 떠는 건어물녀가 대표적이다. 인터넷에는 더욱 아리송한 신조어들이 넘쳐났다. 주로 한 문장을 세 글자 정도로 줄인 말이 대세를 이뤘다.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을 줄인 ‘넘사벽’, 닥치고 본방 사수를 줄인 ‘닥본사’, 스크린샷을 줄인 ‘스샷’,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를 줄인 ‘솔까말’, 개인소장을 줄인 ‘갠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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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