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 산업은행과 매각을 추진 중이던 계열사 동부메탈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매각 금액의 차이를 두고 장기간 줄다리기를 해오던 김 회장이 사재출연이란 ‘최후의 카드’를 꺼내놓은 셈이다.
김 회장의 이번 결단은 그룹 내 골칫덩이로 인식되어 왔던 반도체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업계는 김 회장의 뚝심 있는 행보가 동부하이텍의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는데 해법으로 작용할지 주목하고 있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 산업은행(이하 산은)과의 동부메탈 매각협상에 ‘사재출연’이란 새로운 카드를 꺼내놓았다.
동부그룹은 지난달 19일 ‘동부하이텍 구조조정에 관한 동부그룹의 입장’이란 발표문을 통해 김 회장이 3500억원의 사재를 들여 동부하이텍이 100% 보유한 동부메탈 지분 중 50%를 인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동부그룹은 지분 인수에 투입되는 이 자금을 동부하이텍의 재무구조 개선비용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동부하이텍 내 농업부문 매각과 부동산 등을 팔아 추가적인 자금을 조달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동부그룹은 동부하이텍 내 최대 사업인 농업부문과 지난해 가동을 중단한 유화부문이 보유한 부동산을 매각하는 한편 남은 동부메탈의 잔여 지분 상장을 통해 총 1조5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는 자체 구조조정안을 마련했다.
“제 값 안주면 못 팔아!”
사실상 채권단 협상중단
동부그룹은 이를 통해 동부하이텍 반도체부문의 차입금 1조9000억원 중 4000억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해소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업계는 김 회장의 이 같은 결단에 대해 “김 회장이 산은과의 동부메탈 매각협상이 지지부진해지자 사실상 채권단과의 협상을 중단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동안 동부그룹은 동부하이텍 반도체부문의 지속적인 적자와 과다 차입금 등으로 재무구조가 나빠져 지난 5월부터 동부하이텍의 계열사인 동부메탈을 주채권은행인 산은에 매각하는 협상을 벌여왔다.
그러나 산은과의 협상은 동부메탈의 적정 시장가격에 대한 시각 차이가 현저해 장기간 평행선을 달려왔다. 동부그룹은 동부메탈 100% 지분과 경영권의 가격가치를 최소 7000억원으로 평가한 반면 산은은 4번의 실사 결과 4000억원 이상은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
지난 8월에는 산은이 동부메탈 인수 후 이익을 나눠 갖는 언 아웃(Earn-out) 방식을 제시해 협상 진전이 이뤄지는 듯 했지만 이 또한 무산됐다. 결국 지난달 산은과의 협상을 중단한 후 한 달이 채 안 돼 동부그룹이 특단의 구조조정 추진이란 초강수를 들고 나온 것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김 회장은 그동안 ‘동부메탈은 이익을 꾸준하게 내는 기업인만큼 헐값 매각은 곤란하다.
3500억원 사재출연… 동부메탈 지분 50% 인수
동부메탈 품고… 동부하이텍 농업부문 버리고…
팔더라도 나중에 우리가 다시 사올 것이다’고 밝히는 등 계열사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 왔다”며 “결국 헐값에 넘기느니 사재동원을 통해서라도 품고 가겠다는 의지 아니겠냐”고 해석했다. 물론 김 회장이 모든 것을 안고 가겠다는 뜻은 아니다. 김 회장은 사재출연에 이어 동부하이텍의 농업부문을 팔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동부메탈을 끌어안는 대신 그룹의 주축사업이었던 동부하이텍 농업부문은 매각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구조조정안을 통해 동부하이텍은 반도체사업만을 남겨두고 유화부문과 농업부문을 다 팔게 된 셈이다. 동부하이텍의 농업부문은 매출 1조원 규모의 알짜 사업인 만큼 그룹 내 큰 부분을 도려내는 것과 같다. 김 회장의 이 같은 결심은 업계의 지속적인 우려에도 불구하고 반도체사업을 확대해 나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동안 업계는 동부그룹의 반도체사업 진출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왔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 김 회장이 지난 2002년 아남반도체를 인수해 비메모리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이후 반도체사업은 만성적자를 기록해왔고 재무구조도 불안정하다는 지적이 수시로 제기되어 왔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2006년 말 기준 영업 손실은 2000억원 수준으로 육박했고 부채비율은 400%를 넘겼다.
당시 김 회장은 반도체사업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깊어지자 현금흐름과 안정적 수익구조의 우량계열사인 동부한농화학과 반도체사업 부문을 합병해 재무구조 안정을 꾀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지난 2007년 이름을 바꾼 동부하이텍이다.
반도체는 미래성장 동력
무조건 안고가기 ‘뚝심’
그러나 이후 국제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농업·화학 부문과 반도체사업의 만남은 건실하게 성장할 틈도 없이 반도체 부문의 부채 부담만 커졌다. 결국 동부하이텍 반도체사업이 장기적인 적자행진으로 동부그룹의 수익성에까지 악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 제기되면서 동부하이텍을 매각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어왔다. 그럼에도 김 회장은 반도체사업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반도체사업은 기업의 미래성장 동력인만큼 이 부문만은 반드시 살리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다”며 “투자 없는 성공은 있을 수 없으며 반도체사업은 국가 경제적으로도 중요하기 때문에 밀고 나가겠다”고 강조해 왔다.
김 회장의 뚝심 있는 결정에 우선 금융시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증시 전문가들은 김 회장의 사재출연이 그룹 유동성 위기설을 진화시키고 핵심 사업 분야로의 집중 의지를 보여줬다며 반겼다.
헐값에 넘기느니 내가 ‘꿀꺽’
반도체사업 ‘올인’ 의지 표명
업계 한 관계자는 “김 회장의 사재 출연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 소식은 동부그룹 내 반도체사업에 대한 투자 의지를 내보인 것인 만큼 향후 주가 흐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도 “그동안 동부그룹 전체의 골칫거리로 여겨져 왔던 동부하이텍의 반도체사업은 실제 아무런 지분관계도 없는 동부그룹 다른 계열사에도 악영향을 미쳐왔다”며 “대주주인 김 회장이 직접 재무구조 조정을 선언한 만큼 동부그룹 전체로까지 번지던 유동성 위기설을 잠재우는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김 회장의 사재출연 소식이 전해진 지난달 19일, 동부하이텍의 주가는 가격제한폭인 14.97%까지 오르면서 7830원에 거래를 마쳤다. 덩달아 동부그룹 전체 계열사 주식도 들썩였다. 동부정밀이 6.22%, 동부CNI가 4.38%, 동부화재도 3.02% 올랐다. 동부건설과 동부제철도 랠리에 가담했다.
업계 일단 긍정적 반응
사재출연 방법 관심 집중
업계는 다만 김 회장이 어떤 방법으로 3500억원을 조달할 지에 대한 의문점을 지적하고 있다.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김 회장이 기존의 그룹 지배구조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3500억원이나 되는 자금을 어떤 방식으로 마련할지는 이번 구조조정의 또 다른 평가요소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동부그룹도 이에 대해선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상태다.
동부그룹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출연하기로 공표한 3500억원을 조성해 동부메탈 지분을 인수할 계획”이라면서도 “아직 구체적인 방법이 정해지지 않은 만큼 지금 시점에서 계열사 주식을 거론하거나 하긴 이른 상황”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김 회장은 부동산을 제외하고도 1조원이 넘는 유가증권을 보유하고 있다”며 “최대한 빨리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을 마련하기 위해 부동산 보다는 보유 주식이나 유가증권을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업계 한편에선 김 회장의 사재출연이란 승부수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란 점을 꼬집기도 했다.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 현재 막대한 자금을 추가로 투입해 위기를 넘긴다고 하더라도 동부하이텍 반도체사업이 자생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이번과 같은 재무구조 불안은 얼마든지 거듭될 수 있다”며 “그때마다 자금이 추가로 투입된다면 김 회장의 뚝심이 결국 그룹 전체의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프로필
1944년 12월 4일 강원 동해시 출생
1964년 2월 경기고등학교 졸업
1969년 1월 미륭건설(현 동부건설) 설립
1973년 8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2002년 동부아남반도체 회장
2005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