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태극전사’ 18년만의 8강…FIFA도 ‘서프라이즈’
‘선수출신 지도자’ 편견 깨고 소통과 신뢰로 팀 이끌어
U-20 월드컵 청소년대표팀이 무서운 기세로 세계 강호들을 물리치면서 수장인 홍명보 청소년 축구대표팀 감독이 연일 화제다. 국민들에게 ‘영원한 리베로’ ‘한일 월드컵 4강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한 그가 이제는 탁월한 전술과 리더십으로 노련한 축구감독으로서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스타선수는 지도자로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편견을 당당히 깨버린 홍명보 감독의 성공의 기술을 살펴봤다.
‘리틀 태극전사’를 이끌고 있는 홍명보 감독의 기세가 무섭다.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 홍명보호는 지난 3일 ‘죽음의 조’로 불리던 C조 조별리그 최종 3차전에서 미국을 3대0으로 완파하고 ‘6년 만의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승리의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6일 새벽에는 또 한 번 완벽한 승전보가 전해졌다. 청소년 축구대표팀이 이집트 카이로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치러진 16강전에서도 승리를 거머쥔 것.
18년 만에 8강 진출
초보 감독 “일냈다!”
대표팀은 후반 10분 김보경의 선취골을 시작으로 후반 15분과 25분 연속골을 터트린 김민우의 활약에 힘입어 남미의 강호 파라과이를 3대0으로 완파했다. 이로써 한국은 지난 1991년 포르투갈 대회 때 남북 단일팀으로 출전해 8강에 오른 뒤 18년 만에 8강 진출의 영광을 재현했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상대를 몰아붙인 한국 축구의 저력 앞에 국제축구연맹(FIFA)은 곧바로 찬사를 쏟아냈다. FIFA는 대회 16강전에서 한국이 파라과이를 꺾고 8강에 오르자 홈페이지에 ‘Surprise, Surprise(놀랍고, 놀랍다)’란 기사를 올렸다.
FIFA는 “한국이 파라과이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했다”며 “파라과이는 조별리그를 치르면서 쌓은 기대감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FIFA는 김민우가 후반 15분 쏘아올린 추가골을 ‘오늘의 골’로 선정하며 “날카로운 슛으로 골을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국내 축구인들도 한 목소리로 “결승진출도 가능하다”며 칭찬 릴레이를 펼쳤다. 정몽준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은 지난 6일 경기도 수원시에서 열린 ‘박지성 축구센터(JSFC)’ 기공식에 참석해 “오늘 새벽 열린 한국-파라과이전을 봤냐”며 “정말 대단하다. 이겼을 뿐 아니라 경기 내용도 훌륭했다. 새로운 ‘홍명보 축구’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허정무 축구대표팀 감독도 “청소년대표팀의 지금과 같은 경기력과 조직력이면 충분히 우승도 가능하다. 현재 선수들의 기량과 팀 전력이 예전 대회보다 훨씬 강하다”며 ‘홍명보호’를 극찬했다. 대표팀 합류를 위해 귀국한 이영표는 “우승이 왜 불가능하겠나? 독일과도 비겼다. 청소년대표팀의 4강 진출은 신화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강조했다.
수장인 홍명보 감독에 대한 박수도 이어졌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맹활약 중인 이청용은 지난 6일 ‘박지성 축구센터’ 기공식에서 “홍명보 감독님의 지도를 받고 있는 청소년대표팀 선수들은 행운아다. 홍 감독은 큰 경기 경험이 많아서인지 항상 선수 입장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지도자”라고 전했다.
스타선수 출신 감독
‘안 된다’ 편견 버려
지난 2007년 캐나다대회에서 청소년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조동현 감독도 언론을 통해 “홍 감독은 타고난 지략가 같다”며 “조영철, 이승렬과 같은 기존 선수들을 과감히 빼고 적절한 시점에서 승부수를 띄우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호평했다.
당사자인 홍명보 감독도 평소와는 달리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과거 선수시절부터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조용한 카리스마를 내뿜던 그가 이 날만은 골이 터지는 순간 선수 및 코칭스태프를 끌어안으며 감정을 드러냈다.
홍 감독은 경기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8강 진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파라과이를 3골차로 이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면서 “외국에서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우리 선수들이 이런 결과를 기록한 건 조사를 해볼 만한 일이다”라고 흥분된 마음을 전했다.
그는 또한 “8강에 올랐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제 세 게임(8강전·4강전·결승전) 남았는데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하겠다”며 우승에 대한 욕심도 숨기지 않았다.
홍명보 감독이 평소와 달리 승리를 자축하며 자신감을 숨기지 않는 것은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 올 초 그가 청소년대표팀의 사령탑을 맡을 당시 주위에서 쏟아낸 우려의 시선은 깊었다. ‘스타선수는 지도자로서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축구계의 통설이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라고 하더라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해석됐기 때문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홍 감독은 그를 모르는 국민이 없을 정도로 스타플레이어였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만 21세의 나이로 태극마크를 달았던 그는 2002 한일월드컵 4강신화의 견인차 역할까지 12년간 한국 축구의 한 역사를 장식한 주인공이다.
이후 2002년 11월에 열린 브라질과의 친선경기를 끝으로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은 그는 2004년 10월 현역선수 생활에서 은퇴해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홍 감독은 2005년 9월, 이듬해 ‘2006 독일 월드컵’을 준비하던 딕 아드보카트 감독으로부터 코치직 제의를 받고 지도자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독일 월드컵 직후에는 핌 베어벡 감독과 박성화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의 코치로 연이어 활동하며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다져왔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3월 U-20 월드컵 청소년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가 기대와 우려 속에 맡게 된 청소년대표팀은 초기 운영상의 어려움이 많았다. 프로 선수들은 대표팀에 차출되거나 K-리그 참가로 불규칙한 일정 때문에 차출 자체가 어려워 대학생 위주로 팀을 꾸려야 했다.
한국 축구의 간판 미드필더로 성장한 기성용은 “A대표팀에 전념하라”는 대한축구협회의 결정에 따라 청소년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다. A매치 135경기 출전이란 명성은 ‘경험 없는 초짜감독’이란 비난 속에 축구팬들과 언론의 외면을 받아야 했다.
그는 그러나 초보감독답지 않은 노련한 리더십으로 청소년대표팀을 보란 듯이 이끌었다. 청소년대표팀은 지난 4월 이집트 초청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지난달 수원컵 국제대회에서도 3전 전승 우승을 지휘했다. 홍명보호의 U-20 월드컵 직전까지 국제대회 성적은 6승3무로 9경기 연속 무패를 자랑했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총출동한 U-20 월드컵에서도 국내 대표팀의 맹렬한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현 청소년대표팀에는 2005년 박주영, 2007년 이청용처럼 축구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스타가 없었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언론과 축구계는 청소년대표팀이 걸출한 스타급 선수 하나 없이 연일 승전보를 전하는 데는 ‘홍명보식 리더십’이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한다.
홍명보식 리더십은 한마디로 철저한 수평적 관계에서 비롯된다. 홍명보 감독은 늘 “선수들과 나는 직책이 다를 뿐”이라며 선수와 감독의 격의 없는 관계를 강조해 왔다.
그는 공식적인 팀 미팅에서 선수들과 경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원칙은 그가 청소년대표팀의 사령탑을 맡은 이후 한 번도 어김이 없다. 선수들의 눈높이에 맞춰 인격체로 대우하며 각자의 본분을 지키자는 홍명보 감독의 의도가 내포돼 있다.
경기 이후에도 선수들에게 윽박지르기보다는 한마디 말로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게 홍명보 감독의 스타일이다. 지난달 27일 카메룬과의 1차전에서 청소년대표팀이 0대2로 패한 직후에도 그는 선수들에게 질책이 아닌 “여러분들 오늘 잘 싸웠습니다. 충분히 잘했어요”란 말로 기 살리기에 나섰다.
홍 감독의 탈권위적 리더십은 선수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현 청소년대표팀을 살펴보면 후보 선수와 주전의 격의가 없다. 파라과이전 당시 경기 내내 벤치를 지켜야 했던 후보 선수들은 골이 터지는 순간 어김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골 세레머니에 동참했다.
공석에선 경어 사용
존중과 원칙주의 빛나
홍 감독도 경기가 끝나자마자 벤치에 앉아있는 후보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선발과 후보로 나뉘었지만 한 팀이란 인식을 늘 강조하는 모습이다.
철저히 실력으로 선수들을 평가하는 것도 홍 감독이 높이 평가받는 수장으로서의 덕목이다. 스포츠계 한 관계자가 “홍명보호는 경기 시작 전까지 베스트 11을 알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듯이 그는 선수의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는다. 청소년대표팀 내 선수 전원에 대한 믿음과 탁월한 판단력으로 전략을 세울 뿐이다.
그의 이 같은 승부수가 진가를 발휘한 경기가 지난달 29일 독일과의 2차전이었다. 그는 카메룬과 1차전에서 0대2로 패한 뒤 독일과의 경기에서 무려 5명을 베스트 11에서 교체하는 강수를 뒀다. 이름값을 무시하고 독일의 사이드 공세를 막아내려면 스피드와 수비 가담 능력이 뛰어난 김민우와 서정진 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게 스포츠계의 해석이다.
결과적으로 홍 감독의 승부수는 적중했고 우승 후보 독일을 상대로 1대1 극적인 무승부를 연출하며 국내 청소년대표팀의 거친 행보에 불씨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