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사회팀] "사진에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사진을 배운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봤음직한 구절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 이미지의 홍수 속에 이야기는 점차 유실되고 있다. 사진작가 허원은 "사진 하나로 레포트 3장은 쓸 수 있어야 한다. 사진 찍을 때 왜 찍는가를 항상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사진에 대한 작가로서의 예의라면서.
수십 년 넘게 셔터를 눌러온 노장이 있다. 소담(笑談) 허원은 한국사진작가협회 정식 회원으로 등재된 인물이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다소 낯설다. 일흔을 앞둔 그는 "아직 어린 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며 자신을 낮췄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 뒤에 '선생'이나 '회장'과 같은 명칭 붙이는 걸 좋아하지만 전 그런 게 싫더라고요. 나서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서 저는 그냥 사진 찍고, 찾아오는 후배들 가르치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묵묵히 후배들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소박한 노장
2000년 무렵부터 유난히 증가한 사진 인구. 수많은 사진동호회가 생겨나고, 전문가를 자처한 이들도 우후죽순처럼 번졌다. 하지만 허원은 사진 인구가 양적으로 팽창한 만큼 내실 있게 발전한 건 아니라고 얘기한다.
"세상은 전부 이미지로 구성돼 있죠. 기술의 발전으로 아주 세세한 이미지까지 기록될 수 있는 건 좋은 일이에요. 하지만 빛 뒤에는 그림자가 있죠. 우리 역사만 봐도 박정희 대통령이 '한강의 기적'을 일궜지만 압축 성장에 따르는 그늘이 또 있었죠."
"경제적으로 성장했다고 시민들의 의식이 같이 성장하는 건 아니거든요. 물질만능주의라고 하잖아요. 사진도 똑같습니다. 카메라만 좋아진다고 다루는 사람들의 기술이 좋아지는 건 아니에요. 남들 따라 하기 급급하죠. 또 무엇보다 사진 찍는 사람의 인성도 중요한데 애호가 중에서는 인성이 덜 된 사람이 많습니다."
전국적인 사진 붐과 함께 인터넷을 통한 정보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프로 작가들이 찾았던 촬영지는 늘 아마추어 작가들이 순례하는 '성지'로 각광받고 있다. 입소문을 탄 촬영지가 인산인해를 이루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허원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잘 가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저마다 잘 나온 사진을 찍기 위해 삼각대를 몇 대씩 세워놓고, 자리싸움을 하는 광경이 못마땅해서다.
중학생때 부친이 선물로 준 카메라 인연
이미지 홍수시대 "왜 찍는지 고민해야"
"한 번은 지리산에서 야생화를 찍은 사람이 사진을 다 찍자마자 야생화를 꺾어서 가는 걸 본 적 있어요. 자기 혼자만 그 사진을 갖겠다는 거죠. 이렇게 자연을 훼손하면 그 사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연 고유의 풍광을 이미지로 전달하는 게 사진인데…."
"참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퇴직하고 돈을 좀 모았어요. 그래서 비싼 카메라를 사고, 가방도 샀다 이겁니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출사를 간 겁니다. 그런데 출사를 가서 한다는 게 다른 사람들은 무슨 카메라 쓰나 보는 거예요. '내건 1000만원인데 당신 카메라는 500만원 밖에 안하냐' 이런 얘기나 하고 말이죠. 참 안타깝습니다."
카메라가 지금보다 훨씬 더 귀했던 시절, 아버지로부터 중학교 입학 선물로 카메라를 받은 허원은 벌써 50년 넘게 사진과 인연을 맺고 있다. 하지만 개인전은 단 1차례 밖에 없다. 그는 평범한 사진작가가 일생에 걸쳐 개인전을 할 수 있는 횟수가 많아야 10회를 넘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리저리 요청이 들어와서 그룹전에는 몇 번 참여를 했는데 개인전은 지금도 고민이 많습니다. 제가 찍고 싶은 것들을 찍어 놓은 게 과연 하나의 '이야기'로 묶일는지. 얼마 전 돌아가신 최민식 선생의 사진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전을 할 때는 정말 만전을 기해야겠구나.' 하지만 몇몇 분들을 보면 봄에 개인전하고, 또 가을에 개인전하고 그래요. 비슷한 사진으로 1년에 2번이나 하고 말이죠.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개인전을 많이 하면 명함 팔 때는 좋을지 몰라요. 하지만 프로로서의 도리는 절대 아니란 거죠."
강직한 작가
허원은 "좋은 사진은 구도가 아닌 머리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어디서 찍을까'보다는 '어떻게 찍을까'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설명. 인터뷰 말미 허원은 "유명하지 않은 작가의 사진도 그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누가 찍었는가'보다는 '어떻게 찍었는가'가 더 인정받기를 바란다는 노작가의 오랜 바람이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허원 작가는?]
▲1972년 <매일신문> 원색사진부 입사
▲2003년 한국사진작가협회 등재
▲2006년 제31회 '영상의 적' 사진전 금상
▲2007년 제29회 '전국 흑백 사진대전' 대상
▲2011년 한국사진작가협회 광고/스톡분과 자문위원
▲2013년 한국사진작가협회 강사 및 다수 문화강좌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