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일요대담> ‘5선 국방통’ 안규백 ‘군발’ 12·3 사태를 말하다

“또다시 계엄? 문민통제가 답”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 5선 안규백 의원은 제20대 국회 전반기에 국토교통위서 활동한 것 외엔 의정 생활 대부분을 의원들이 꺼리는 국방위서 활동했다. 제20대 국회 후반기엔 국방위원장을 맡았다. 보기 드문 민간인 출신 국방통으로 알려진 그가 보는 12·3 계엄사태의 본질은 무엇일까?

12·3 내란 사태 이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안규백 의원은 당내 상황실장과 진상 파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 특위 위원장을 맡았다. 안 의원은 2024년 끝자락서 <일요시사>와 만나 비상 계엄사태의 본질과 흐름을 짚었다. 다음은 안 의원과의 일문일답.

-민주당은 지난 8월부터 계엄 가능성을 언급했다.

▲처음엔 우리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충암파를 주축으로 방첩사·정보사 등 정보라인을 장악하고,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공관 회동 멤버가 수방사·특전사 등 군의 요직을 독식했다. 그래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주장하게 된 계기는?

▲특히 지난해 11월엔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취임했다. 정보·방첩 라인은 특성상 내부 인사를 승진시킨다. 사령관은 외부서 부임하더라도, 그 휘하는 내부 진급을 시켜야 한다. 그런데 여 전 사령관과 소형기 전 참모장·김철진 전 기획관리실장은 모두 외부 인사였다. 소 전 참모장은 여 전 사령관과 방첩사 부임 전까지 함께 근무했다.


김 전 실장은 여 전 사령관의 53사단장 시절 예하 여단장이었고, 계엄 직전 김 전 장관의 군사보좌관으로 부임했다. 

이번 인사에서 해군·공군과는 달리 육군은 중장급 인사를 하지 않았다. 여 전 사령관을 비롯해 같은 시기 함께 임명된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과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은 1년이 넘었지만 교체되지 않았다. 지난해 4월 군 인사 당시 드론작전사령부 첫 사령관 이보형 소장이 뚜렷한 이유 없이 임기를 못 마치고 8개월 만에 교체됐다.

후임자 김용대 사령관은 여 전 사령관과 이 전 사령관의 육사 48기 동기였다. 51일 만에 김봉수 전 합참차장을 교체한 후 부임해 임명 나흘 만에 계엄부사령관이 된 정진팔 중장도 육사 48기다. 충암파·육사 48기 라인이 주축이 되어 주요 보직들을 토대로 이너서클을 만들어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본다.

-이재명 대표는 2차 계엄 가능성도 거론했다. 

▲1차 계엄이 국회서 해제돼 실패한 후, 윤 대통령은 약 3시간30분 후 계엄 해제를 발표했다. 그 사이에 2차 계엄을 시도한 것 같다. 합참 결심실서 김 전 장관과 계엄법을 검토하고, 계엄 해제에 대한 거부권 행사가 가능한지 검토한 것이다. 이것이 계엄해제 불복 혹은 2차 계엄 시도 의혹이 불거진 이유였다.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은 새벽 3시경 육군본부서 계엄사 편성을 위해 육본의 주요 장성들에게 서울행을 지시했다. 수방사도 계엄 해제 가결 이후에도 오전 2시30분까지 국회 인근 KBS와 성산대교서 대기하고 있었다. 미군도 통신감청이 가능한 초정밀 정찰기 RC-135S 코브라 볼 두 대를 한반도 상공서 전개했다. 후방서 이동하는 부대가 있는지 확인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정황으로 봐선 2차 계엄 가능성은 유력했다.

육사 출신들 이너서클 구축
왕정·독재·장기집권 꿈꿔


-계엄에 참여했던 장성들은 대부분 윤 대통령으로부터 돌아선 것 같다. 

▲박근혜정부의 계엄 문건이 발각된 후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 등 연루 장성들은 패가망신당했다. 그들은 재판을 받고 있고, 연금도 받지 못한다. 계엄 참여 장성들도 살길을 찾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나? 충암파들은 입을 맞춰서 “계엄 선포를 TV 보고 알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곽 전 사령관이 지난 10일 국방위 전체회의서 실토했다. 당시 출석한 군인들은 현장서 김 전 장관 구속 소식을 들은 후 크게 흔들렸다. 이후 수사 과정서 정보사령관이 예하 영관급 장교들에게 자신의 국방위 증언대로 증언하라고 지시한 것도 다 드러났다. 

-김 전 장관도 윤 대통령으로부터 돌아섰다고 봐야 하나?

▲김 전 장관은 사실상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 선고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김 전 장관은 처음엔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 윤 대통령과 부하의 죄를 자신에게 몰아넣으려고 했다가 지난 12일 윤 대통령의 담화 이후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곽 전 사령관도 “김 전 장관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본회의장에 의원 150명 이상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끄집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이 전 사령관과 조지호 경찰청장은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도 윤 대통령을 향한 삐뚤어진 충성심과 형량을 줄여야 하는 필요 사이서 방황하는 것 같다.

-12·3 내란 사태는 강경파 대통령·육군 중장 출신 강경파 국방 장관과 고교 동문 인맥의 조합으로 발생했다.

▲계엄사령관은 합참의장이 맡는 것이 원칙이다. 계엄과를 하위 부서로 두고 있는 곳은 합참밖에 없다. 하지만 김명수 합참의장은 해군 출신이다. 그래서 걸림돌이 될까 봐 육사 출신 박 전 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앉힌 것이다. 그들만의 이너서클을 구축해 왕정·독재·장기집권을 꿈꾼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김건희 여사가 ‘계엄 이후 개헌을 통해 남편이 통일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극우 유튜브 채널을 많이 봐서 그 세계에 매몰돼있고, 맹목적 충성·추종으로 뭉친 군부 내 강경파들이라는 인(人)의 장벽에 갇혀 사리분별도 정확히 안 되는 것 같다.

-하나회는 1990년대 없어졌다. 그런데 박근혜정부 말기엔 알자회가 거론됐고, 이번엔 충암파가 거론됐다. 군서 계속 사조직 논란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군인복무기본법과 군형법에 따르면, 군은 위법하지 않고 정당한 명령에만 상명하복 원칙을 적용한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명령에 살고 죽는다”는 생각이 박혀 있다. 군 인사가 충암고·육사 출신 일색으로 진행돼, 집단사고에 빠지기 쉬운 환경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근친혼으로 인해 유전병에 시달렸다. 다양성이 무너져 독식이 이뤄지면, 필연적으로 부패하고, 붕괴한다. 충암파와 육사 카르텔이 결합돼 내란을 초래한 것이다.

-방첩사는 보안사 시절 12·12 쿠데타를 주도했고, 기무사 시절 박근혜정부 계엄령 문건 작성에 개입했다. 그런데 이번에 또 개입하면서 문제가 됐는데…


▲‘숙습난방’이라는 말이 있다. 몸에 밴 습관은 고칠 수 없다는 의미다. 하던 대로 한 거다. 윤 대통령도 그렇다. 지난 11월7일 대국민 담화 후 진행된 기자회견서 사회를 맡던 정혜전 대통령실 대변인에게 반말을 했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데도 말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사고방식에,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바라보는 검찰 시야에 갇혀있다. 방첩사의 숙습과 윤 대통령의 만남은 마치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과 같았다.

-이 사태가 문민통제 문제와 관련이 있는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군은 문민통제가 돼야 한다. 이 사태의 핵심은 문민통제다. 문민통제가 공고했다면, 대통령이 내란을 지시하더라도 시작 단계서부터 군이 앞장서 반대하면서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내건 국가 중 문민통제를 하지 않는 나라는 우리와 북한밖에 없다. 북한은 허울만 민주국가니까, 민주국가들 중 사실상 우리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 군은 
부당한 명령에도 
양심 놓지 않았다”

미군도 군 출신이 국방 장관으로 취임하려면, 전역 후 7년이 지나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어제 군복 벗고 오늘 넥타이를 맨 다음 국방 장관에 취임하진 않는다. 문민 출신 장관이 군을 통제해야 한다. 강철로 만든 바늘과 부드러운 섬유로 만든 실이 만나야 찢어진 옷도 수선한다. 그런데 우린 강경파들이 사조직을 만들어 내란에 앞장섰다.

-스페인의 고 카르멘 차콘 전 국방 장관은 지난 2008년 스페인 최초 여성 국방 장관으로 취임해 2011년까지 재임했다. 취임 당시 임신 7개월이었고, 만삭 임신부의 몸으로 해외 파병군을 사열했다.


▲만난 적 있는 분이다. 포르투갈의 헬레나 카레이라스 국방 장관도 지난 2022년 3월 최초 여성 국방 장관으로 취임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선 여성도 국방 장관으로 취임할 수 있다. 우리처럼 어제 예편해서 오늘 국방 장관으로 취임하면, 문민통제 사고방식을 갖추기 어렵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민간인 출신 국방 장관 임명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는가?

▲진지하게 논의해봐야 할 시점이다. 문재인정부서 미처 못했다. 신냉전이 격화되고 북한과 러시아가 동맹을 복원하는 등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적과 타협이 없는 군의 대결적 사고방식보다 문민 출신 유연성·협상력·타협적 자세 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으로 보인다.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계엄군이 돼 사기가 저하됐을 장병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계엄 당일 본회의장으로 가는 지하 통로서 10여명의 계엄군과 마주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은 나를 체포하지 않았고, 본회의장으로 가도록 길을 터줬다. 나중서야 그들이 707특임대 병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흥분한 시민을 껴안아 다독이는 계엄군과 “액션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던 계엄군 분대장을 봤고, 계엄 해제 이후 시민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군인들도 봤다. 이들은 부당한 명령을 강요당하면서도 양심을 놓지 않았다. 

지난 10일 국방위 전체회의서 김선호 국방부 장관 직무대행에 “영관급·초급 장교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지 않도록 심리치료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주요 임무 종사자들이 아니라면 심리치료도 하고, 군에서 계속 복무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줘야 한다.

물론 국회 창문을 깨고 넘어온 것과 같은 적극적인 가담자들과 동조자들은 식별해야 한다. 아무리 계엄이 선포됐어도 입법부는 장악하지 못한다. 국회엔 그렇게 들어오면 안 된다.

-국민의힘은 탄핵심판과 관련해 헌법재판관 3명의 임명 절차에 참여하지 않은 채 6인 체제를 이어나가려고 하는데…

▲국회서 이미 3명의 후보자를 추천했고 인사청문회에 착수했다. 임명 절차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소아병적인 생각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국회의 권능을 그렇게 포기하면 안 된다. 국민의힘은 포기할지 모르지만 우린 포기할 수 없다. 윤 대통령과 똑같이 독선·아집에 빠져 있다. 대통령이 내란 수괴가 된 사건은 9인 완전체로 구성된 헌재가 역사의 응징을 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바로 선다.

-일각선 윤 대통령에 대해 조현병·알코올성 치매 등 정신과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삶의 고난과 고통·힘든 여정을 겪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 같다. 그리고 나이가 만 64세밖에 안 됐는데도 5분도 서 있지 못하고 앉아서 대국민 담화를 진행했다. 언론 보도를 보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해서 정시 출근도 못했다고 한다.

윤, 국민을 범죄자로 보는
검사 시각 줄곧 못 벗어나

상황이 이렇게 심각하니 일각서 조현병·알코올 중독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극우 유튜브 채널의 음모론에도 중독돼있다고 한다. 망상이 가짜 뉴스를 실어나르는 알고리즘에 의해 선택적으로 강화돼 일종의 강력한 확증편향·필터버블이 생긴 것 같다. 대선후보가 구독 중인 유튜브 채널을 국민 앞에 공개하는 과정도 필요할 것 같다.

-윤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서 부정선거 음모론을 언급했다. 일부 정치인들이 강성 지지자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정치의 극단화’가 이 사태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없나?

▲강성 팬덤과 같은 정치의 극단화를 넘어선 문제다. 총구를 겨눈 남북정상도 대화를 위해 만난다. 이번 내란은 검찰공화국의 연장선서 발생했다. 윤 대통령은 검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내가 말하면 다 들어야 한다”거나 “이 세상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올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같은 생각을 한다. 모든 국민을 범죄자로 보는 모양이다. 

정치서 중요한 것은 타협·협상·존중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극복하면서, 서로 조절하는 가운데 국정을 협의해야 한다. 검찰력으로 야당을 와해시킬 궁리만 하다가 터진 명태균 게이트가 결정적 도화선 역할을 했다고 본다.

-탄핵이 인용되면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한다. 앞으로 민주당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민생·외교·안보의 회복을 최우선으로 놓고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부존 자원이 없고 수출과 무역 중심인 우리 특성상 가치 외교는 어렵다. 실용 외교·줄타기 외교를 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론 작지만, 지정학적으론 크다. 힘이 있으면 대륙과 해양으로 나갈 수 있다. 반대로 힘이 없으면 침략을 받는다.

지정학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한 북방 외교를 튼튼히 하고 한미동맹을 공고히 해서 미국도 최대한 활용하면 얼마든지 그들을 우리 편으로 조정할 수 있다. 

특히 러시아와 북한 문제의 키맨은 중국이다. 그들과도 협력해야 북한을 제압할 수 있다. 또 추락한 대외신용도를 되살리고, 민주적 질서로 내란을 극복한 저력을 다시 세계에 알려야 한다. 송년회 취소 등 깊어진 자영업자의 한숨을 놓치지 않고 살필 것이다. 

-끝으로 <일요시사> 독자들에게 덕담 한마디.

▲‘국가흥망 필부유책’이란 말이 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엔 모든 사람의 책임이 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선출한 후에도 나라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국민의 감시·감독이 필요하다. 우리 민주당 의원들도 경거망동하지 않고 세심하게 잘하겠다. 

<ctzxp@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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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구 친윤(친 윤석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공개 갈등엔 ‘옹립의 정치학’이 숨어 있다. 특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거나 지도자 교체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도자 옹립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정당성·생존 본능이 적절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래서 복잡한 조건이 가미된다. 지도자 옹립을 위한 조건으로는 대체로 ▲적절한 상징성 ▲새 기득권이 될 주도 세력과의 조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나 못 갖는 지도자 조건 이 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새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지도자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 본능은 강한 권력 의지로 연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옹립한 주도 세력과 마찰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빈번하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귀족은 이를 막으려고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과 귀족은 끊임없이 정치적 다툼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왕이 교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옹립된 지도자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다. 옹립된 지도자는 지배 질서가 규정한 정통성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립되는 과정 자체가 지도자로선 주도 세력에게 빚을 진 격이 되는 사례도 많다. 조선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즉위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를 중시하는 유교 질서에선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조는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악수를 뒀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다. 새 질서를 왕이 직접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침범하려고 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대접을 받던 형 정종을 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