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남은 재판 막전막후

벌써 12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대두된 지 12년이 지났다. 정부도 가해 기업도 피해구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왔다. 이제야 법원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참고해 법적 책임을 묻고 있다. 이번 판결로 피해자 구제 범위가 큰 폭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가습기살균제 3단계 피해자에 관한 제조사의 책임을 인정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의 보고서가 사실상 증거로 인정된 것이다. 차후 다른 재판에도 영향이 미칠 가능성이 커졌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지난 9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인 김모씨가 제조·판매사인 옥시레킷벤키저(이하 옥시)와 납품업체 한빛화학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서 “원고에게 위자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997년 출시
2011년 중단

김씨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옥시와 한빛화학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 ‘옥시싹싹 뉴(New) 가습기당번’을 사용하고 2013년 5월 분당서울대병원서 원인불명의 간질성 폐질환을 확진받았다.

질병관리청(당시 질병관리본부)은 당시 원인불명의 폐질환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신고 및 조사 요청을 받아 역학조사를 실시한 결과, 가습기살균제와의 관련성이 드러났다. 질병관리청은 폐 손상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질병관리청은 2013년 9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역학조사를 통해 가습기살균제의 영향 가능성을 4단계로 나눠 판정했다. 판정 결과는 ‘가능성 거의 확실함(1단계)’ ‘가능성 높음(2단계)’ ‘가능성 거의 없음(3단계)’ ‘판단 불가능(4단계)’였다. 

질병관리청은 2014년 3월 김씨에 관해 “거주환경에 대한 환경노출평가와 김씨가 제출한 임상자료 판독에 따르면 김씨의 질병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말단기관지 부위 중심의 폐질환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3단계로 판정했다. 당시 3단계 피해자는 1, 2단계와 달리 정부 지원금 지급 대상서 제외됐다.  

김씨는 2015년 법원에 3000만원의 위자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지만 1심서 패소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공동대리인단의 도움을 받아 항소했다.

2심 재판부는 2019년 “옥시와 한빛화학이 김씨의 질병이 가습기살균제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김씨를 비롯한 사용자들은 ‘인체에 무해하다’는 제품상 표시를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며 위자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하지만 옥시는 3단계 판정을 받은 피해자에 관해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병증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며 책임을 부정하고 상고했다.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며 피해자의 증명 책임을 완화한 2심 판단을 확정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질병관리본부의 3단계 판정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말단기관지 부위 중심 폐질환 가능성을 판정한 것일 뿐”이라며 “손해배상소송서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그로 인한 질환의 발생·악화에 관한 인과관계 유무 판단은 구체적 증명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전제로 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옥시 500만원 배상 판결
제조사 책임 최초 인정

한국 기업의 발명품이었던 가습기살균제는 1994년 최초 출시된 이후 2011년 판매 중단되기 전까지 연간 60만개가 팔렸다. 시장 규모는 20억원에 달했다. 

가습기살균제에는 유독물질인 폴리헥사메탈렌구아니딘(PHMG)와 메틸클로로이소티아졸리논(CMIT·MIT) 성분이 포함됐다. 염화벤잘코늄(BKC), 에틸알코올, 이염화이소시아뉴산나트륨(NaDCC),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성분의 제품도 있었다.

이 중 화학물질 원료의 흡입독성을 확인하고 제품의 위해성 평가를 한 뒤 출시된 제품은 없었다. 

오히려 기업들은 제품에 원료와 성분을 정확하게 표시하지 않았으며 일부 제품에는 ‘인체에 무해’ 같은 문구를 표시하기도 했다. 정부는 화학물질과 공산품의 안전관리 체계에 있던 혼선과 허점을 인지하고도 개선하지 않았다.

정부와 기업의 무책임 속에서 참사의 피해자들은 소외됐다. 정부는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기업이 소비자에게 배상해야 하는 문제로 봤고 기업은 책임을 회피하기 바빴다. 법적 책임 추궁 없이 자발적 책임을 끌어내지 못한 셈이다.

참사 초기 가습기살균제 피해는 ‘환경보건법상 환경성질환’으로 인정됐지만 피해자에 관한 지원은 축소되고 기업의 부담은 경감됐다.

2017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기업들은 배·보상을 진행했다. 가습기살균제의 영향력이 높다고 판단된 1, 2단계 피해자들에 관한 기업의 배·보상은 이뤄졌지만 3, 4단계의 피해자에 관한 피해구제는 지지부진했다.

대법 첫 판단
국가 책임은?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 7월 공식적으로 인정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5176명이며 3, 4단계로 판정받아 큰 보상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은 2020년 4월 기준 5083명에 달한다.

민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공동대리인단 소속인 이정일 변호사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건강상의 피해를 입은 사람에 관해 다른 원인이 있었음을 가해 기업이 증명하지 못한다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이번 대법 논리를 다른 피해자에도 적용하면 구제 범위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형사재판서 기업들의 유무죄는 성분에 따라 갈렸다. 가습기살균제에 PHMG를 담은 옥시, 롯데마트, 홈플러스 관계자들은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옥시와 롯데마트·홈플러스가 판매한 가습기살균제에 담긴 PHMG가 피해자들의 건강상 피해에 영향을 미쳤다는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제조사가 안전성 검토를 미흡하게 했거나 위험성을 알고도 개선하지 않은 ‘주의의무 위반’ 또한 재판서 받아들여졌다.

일부 피고인들은 ‘인체에 안전한 성분 사용’ ‘아이에게도 안심’ 등의 문구를 사용해 판매한 혐의(표시광고법 위반)도 인정됐다. 신현우 전 옥시 대표(징역 6년), 김원회 전 홈플러스 본부장(징역 4년), 노병용 전 롯데마트 본부장(금고 3년) 등은 2018년 1월 대법원서 형이 확정됐다.

반면 CMIT·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 제작사인 SK케미칼, 애경산업, 이마트의 전직 임원들은 1심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심 재판부는 흡입 독성물질과 이용자들의 건강상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기업들이 안전성 검토를 충분히 했는지 위험성을 알고도 판매했는지 등도 판단하지 않았다.

흡입 독성물질과 건강 피해 사이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혐의 적용의 전제조건이 성립되지 않은 상황서 기업들의 주의의무 위반까지 따져볼 필요가 없다는 취지였다. 

성분 따라
처벌 달라

법원의 판단에 학계 전문가들은 과학적 방법론에 무지한 재판부가 지엽적인 연구 결과만 보고 판단했다고 비판했다. 전형배 강원대 로스쿨 교수, 김성균 서울대 환경보건학과 교수 등 7명은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면서 판시한 주요 논거 3가지를 반증하는 논문을 환경보건학회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검찰은 해당 논문을 참고해 지난달 26일,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서승렬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된 항소심 결심공판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홍모 이마트 상품본부장에게 원심 구형과 마찬가지로 각각 금고 5년형을 구형했다.

검찰은 조모 SK케미칼 팀장 등 다른 피고인들에게도 금고 3~5년 형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수십건의 민사소송도 진행 중이다. 지난 7월 기준 옥시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340명이며 소송 건수로는 105건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은 각각 249명, 565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이마트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인원도 305명에 달한다. 다만 핵심 관계자에 관한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라 현재 소송이 일시 정지된 기일 추정 상태다.

이정일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단으로 가해 기업들에 대한 소송이 대폭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이 변호사는 “옥시 제품을 썼든 애경 제품을 썼든 제조사가 피해자들의 건강상 피해에는 흡연이든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며 “옥시뿐만 아니라 다수의 가습기 피해자가 발생한 애경, SK케미칼 등에도 역시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3단계 피해자에 위자료
피해자 90% 3·4 단계

국가의 책임 여부도 여전히 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세퓨’라는 업체의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해 1~2세의 자녀들이 숨지거나 가족이 위중한 폐질환을 얻게 된 이들은 2014년 국가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피해자들은 세퓨 가습기살균제 성분 PGH의 유해성 심사 과정서 환경부가 흡입독성 자료는 요구하지 않아 이 성분을 유해 물질로 지정하지 않은 점, 보존제로 허가를 받은 뒤 다른 용도로 판매됐음에도 규제가 없었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국가가 손해배상할 의무는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가습기살균제를 유해 물질로 지정해 관리하지 않은 것에 관해 주의의무를 소홀히 한 과실이 있었다고 보기 힘들고 유해성을 확인해야 할 의무나 이를 확인할 제도적 수단이 없었다”고 판시했다. 피해자들은 항소해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 변호사는 “환경부는 당시 법령에 따라 유해성 심사를 했다는 입장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조사 결과를 사참위가 내놓은 바 있다”면서 “지난 9일 열린 변론서 재판부가 사참위 보고서를 인용하며 ‘환경부가 충분히 반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 바 있어 기대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가 측에서도 공제 주장 금액을 특정해달라고 요청했다”며 “공제 금액 특정 역시 인용을 전제로 하는 영역”이라고 덧붙였다.

세퓨 국가배상소송은 오는 12월21일 최종변론을 마치고 내년에 선고될 예정이다. 세퓨 외에 다른 업체의 피해자들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했지만, 아직 1심 재판이 끝나지 않은 상태다.

정부의 책임회피 문제도 현재진행형이다. 정의당 이은주 의원이 국무조정실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사참위가 권고한 내용 26건 중 9건에 대해 정부 부처들은 “해당 사항 없음”이라며 이행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스모킹건 된
사참위 보고서

구체적으로 대통령실은 참사 관련 공식 사과 권고안에 관해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7년 8월8일 피해자들을 만나 사과한 것을 언급하면서 “해당 사항 없음”이라고 답했다. 환경부는 화학물질 관리체계의 개선을 권고한 내용에 관해 고용노동부와 법무부는 기업실사의무화법 제정 권고에 대해 “해당 사항 없음”이라며 권고안 수용을 거부했다.

이밖에 중대시민재해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하기 위해 인과관계 추정 조항을 신설하는 방향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을 개정하라는 내용에 관해서는 법무부, 고용노동부, 환경부, 공정거래위원회도 “해당 사항 없음”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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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