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일요시사 대기획> 법의학으로 본 죽음의 격차 ⑬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 르포

국가가 일생을 정리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스님의 거침없는 독경과 달리 제단으로 향하는 이들의 걸음은 주춤거렸다. 국화꽃을 놓고 물 한 잔을 올리는 손길도 조심스러웠다. 재배를 올리고 돌아서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제단을 바라보는 눈시울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디 편안히 영면하시라는 청아한 소리 너머로 나비가 날아들었다.

죽다, 숨지다, 사망하다, 운명하다, 별세하다, 서거하다, 타계하다, 작고하다, 그리고 처리되다. 무연고 사망자는 처리의 대상이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사법) 제12조는 ‘무연고 시신 등의 처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무연고 시신 등을 처리한 때에는’ ‘처리 방법 등에 관해’ ‘처리하는 경우’ 등의 표현이 눈에 띈다. 

늘어나는
무연고자

사단법인 나눔과나눔은 애도할 권리와 애도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단체다. 서울시와 업무협약을 맺고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를 지원한다. 공영장례는 사체의 안치부터 염습·입관, 화장 후 봉안까지의 절차뿐 아니라 고인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유족과 지인 등이 고인을 애도할 수 있도록 공공이 빈소를 마련하고 장례의식을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2018년 3월22일 서울시에서 ‘서울특별시 공영장례 조례’를 공포하면서 법률적 근거를 마련했다. 무연고 사망자와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의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저소득 시민을 위한 공영장례 지원은 서울시가 전국 최초다. 이전까지 무연고 사망자는 안치실에서 화장장으로 바로 이동하는 무빈소 직장 형태의 장례를 치러왔다.

무연고 사망자는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가 사체 인수를 거부‧기피하는 사람을 말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무연고 사망자는 3603명으로 2020년(2947명)과 비교해 656명 늘었다. 2018년 2447명, 2019년 2656명 등 매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 중 70%는 연고자가 사체 인수를 거부한 이른바 ‘만들어진’ 무연고 사망자다. 


나눔과나눔은 올해 1월1일부터 8월31일까지 243일 동안 722명의 무연고 사망자를 위해 354번의 공영장례를 지원했다. 175명의 공영장례에서 무연고 사망자 가족, 친구, 이웃이 함께 했고 112명의 영정 사진을 올렸다. 무연고 사망자 가운데 76.2%(550명)는 기초생활수급자로 확인됐다.

10월17일은 UN이 정한 ‘세계 빈곤퇴치의 날’이다. 이날 오후 1시부터 경기 파주의 서울시립승화원 제1묘지 무연고추모의집에서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이하 사노위)의 진행으로 ‘무연고 사망자 합동 추모제’가 열렸다. 무연고 사망자의 유골함을 모아놓은 무연고추모의집은 1년에 딱 한 번 추모제 날에만 개방된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무연고 추모의집
추모객 찾아 유골함 보고 인사 올려

지난달 17일은 평균기온이 4도 이상 떨어져 쌀쌀한 날씨였다. 3호선 구파발역 버스정류장에는 두툼한 코트를 입은 두 여성이 팔짱을 낀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용미리 묘지 입구’ 정류장으로 가는 간선버스 774번에 두 여성과 함께 올라탔다. 다음 정류장에서 모자를 쓰고 파란 점퍼를 입은 남성이 버스에 탔다.

버스는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이 계속 나아갔다. 40분 정도 흘렀을까. 용미리 묘지 입구를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 구파발역에서 본 두 여성과 파란 점퍼의 남성, 손에 뭔가를 잔뜩 든 한 여성 등 7~8명이 한꺼번에 내렸다. 파란 점퍼의 남성의 말을 걸어왔다. “1시에 뭘 한다는데… 무연고… 아내가…” 

지난 4월 아내를 잃은 남성은 5분 남짓 함께 걷는 내내 아들들에 대한 서운함을 내비쳤다. 아들이 잘 먹고 잘사는 데도 불구하고 엄마를 모시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통이 터지는 듯했다. 그는 조계종 사노위 관계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안내판도 표식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건물만 멍하니 바라봤다. 무연고추모의집이었다. 


30여명쯤 모인 추모객은 맨 바닥에 앉아 스님의 독경 소리를 들었다. 서로 팔짱을 끼고 있던 두 여성도 제단 근처에 앉아 있었다. ‘한 분씩 나와서 인사를 드려도 된다’는 사회자의 말에 금세 줄이 길게 생겼다. 버스에서부터 손에 잔뜩 비닐봉지를 들고 있던 여성은 막걸리를 꺼내 제단 옆에 놨다. 

양한웅 사노위 집행위원장은 “무연고추모의집은 상시 개방이 아니라 1년에 한 번만 열립니다. 왜 닫아놓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추모객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도록 계속 열어둬야지, 1년에 한 번이 말이 됩니까? 그리고 표지판도 없습니다”라며 “여기에 모실 수 있는 분이 2000분밖에 안 돼요. 2000분이 넘으면 유골함을 처리해 버립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처리되는
사체들

추모객은 고인과 살아생전 함께 정을 나눈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유골함을 모신 무연고추모의집으로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나눔과나눔 관계자가 내부에서 추모객에게 유골함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줄은 길게 늘어섰지만 누구 하나 재촉하지 않았다. 유골함을 보고 나온 추모객의 눈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난달 21일 경기 고양 서울시립승화원에서 두 명의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가 진행됐다. 서울 동대문구에 살던 1963년생 이○○(60세)씨는 지난달 8일 요양병원에서 직장암으로 숨을 거뒀다. 서울 성북구에 살던 1960년생 이○○(63세)씨는 지난 8월11일 내재적 질병으로 거주지에서 사망했다.

고인들은 생전에 일면식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 여러 사람의 애도 속에 나란히 떠났다. 

2평 남짓한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를 위한 ‘그리다’ 빈소는 장례의식을 진행하는 나눔과나눔, 장례서비스업체 해피엔딩 관계자, 수녀님과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오전 10시 정각에 고인 소개를 시작으로 장례의식이 시작됐다. 묵념 이후 향을 피우고 고인에게 마지막 식사를 올리는 상식의 예를 진행했다. 이어 술을 올린 뒤 상주가 두 번 절했다. 

임정 나눔과나눔 팀장이 축문을 읽었다. “아무리 슬퍼도 헤어져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외롭고 힘들었을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영원히 가시는 길이 아쉬워 이렇게 술 한 잔 올려 드렸습니다. 잠시 후면 장지로 떠나도록 돼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 그지 없으나 고이 길 떠나소서.”

모르지만
국화꽃 헌화

빈소에 있는 모두가 고인을 애도하며 헌화했다. 사진 없이 비어있는 영정사진 앞에 놓인 두 고인의 위패 옆으로 국화꽃이 나란히 놓였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이날만큼은 우리 모두가 그들의 조문객이었다. 그들은 살아생전 한 번도 본 적 없었을 사람들에게 분명한 애도를 받았다. 

임정 팀장은 “서울시립승화원에 공영장례를 위한 빈소가 마련된 이후 지나가던 시민이 불쑥 들어와 술을 올리고 절을 하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유족이 또 다른 고인을 위해 애도를 전하는 ‘애도의 선순환’ 현장이 된 셈이다. 

고인 예식을 마치고 사체를 운구해 화장장으로 이동했다. 임정 팀장과 수녀님은 둘로 나뉘어 관망실로 향했다.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관을 보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곧이어 두 고인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1시간30분 후 두 고인은 말 그대로 ‘한줌의 재’가 됐다.


60세 이씨는 무연고추모의집에 봉안, 63세 이씨는 서울시립승화원 유택동산에 산골됐다.

3년째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를 지원하고 있는 임정 팀장은 원래 장례지도사로 일했다. 장례지도사로 활동하던 때 오랫동안 안치실에 놓인 사체를 보게 됐는데 나중에야 무연고 사망자인 사실을 알았다. 수소문 끝에 무연고 사망자의 공영장례를 지원하는 나눔과나눔을 알게 됐고 자원봉사를 하다 정식 직원이 됐다.

무빈소 직장 방식에서
애도 시간과 공간 제공

놀라운 점은 임 팀장이 나눔과나눔에서 처음으로 모신 무연고 사망자가 바로 병원 안치실에 오래 놓여있던 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눔과나눔은 사회가 무연고 사망자를 보는 시각에 편견이 많다고 지적했다. 김민석 나눔과나눔 팀장은 “무연고 사망자라고 하면 굉장히 외롭고 쓸쓸하게, 그리고 빈곤하고 안타까운 슬픈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장례 현장에서 만나보면 그렇지 않다. 사망하기 전까지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었고 분명한 자신의 삶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연고자’라는 제도적인 기준과 경제적인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그 두 가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무연고 사망자가 되고 있다. 이른바 ‘제도가 만들어낸 피해자’다. 이 지점에서 죽음 이후의 격차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영장례는 무연고 사망자에게 생긴 ‘죽음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장례의식에는 고인을 배웅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고인과 관계를 맺었던 이들이 고인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명복을 비는 행위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이 의식이 없다면 고인과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박탈된 애도’를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나눔과나눔은 장례를 가족과 가구의 영역을 넘어 사회로 확장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책임질 수 없는 국가로, 그 정도 여력도 없는 국가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물론 가야 할 길은 멀다. 아직 지자체 중에는 공영장례 조례가 없는 곳도 많다. 서울의 시스템으로 서울만큼 하고 있는 곳은 서울이 유일하다. 예산의 규모도 다른 지자체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무덤까지
배웅했다

63세, 60세의 짧은 생을 살다간 두 고인은 사망할 때는 외로웠을 수도 있다. 요양병원 병상에서, 집에서 배웅하는 사람 한 명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승으로 떠나는 길만큼은 외롭고 쓸쓸하지 않았을 듯하다. 그들은 더 이상 무연고자가 아니었다. 국가가 그들의 연고자였고 조문객이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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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