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 트렌드' 방송가 장악한 우먼파워

드라마도 예능도 여주인공 중심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여자가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은 비로소 옛말이 됐다. 드라마도 예능도 여성의 땀과 대립, 경쟁, 연대를 담아내는 데 여념이 없다. 능동적인 여성이 일궈내는 서사에 모두가 감동한다. 한 번 반짝이고 마는 게 아닌, 꾸준히 지속하는 메가 트렌드다. 

수년 전만 해도 여배우들의 볼멘소리가 많았다. 멋있고 능동적이며 어떤 사건이든 핵심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매력적인 인물이 대부분 남성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TV 속 여성은 밋밋하고, 우유부단하며 수동적으로 움직이기 바빴다.

노골적인
우유부단

이른바 ‘민폐 캐릭터’는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갈등이 해결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릇된 판단으로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저지르는 것은 여성의 몫이었다. 

때론 노골적으로 ‘여자의 적은 여자’를 드러낸 작품도 많다. 불륜과 출생의 비밀, 고부간의 갈등을 극대화한 ‘막장 드라마’에서 순진한 남자를 두고 모함과 음모를 꾸미는 건 대부분 여자였다. 

드라마 초반부에 진취적인 여성상을 그려내도, 막바지에 치달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남자의 말에 휘둘리는 답답한 얼굴이 그려지기도 했다. 여성이 남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대장금>, JTBC <스카이 캐슬>, 영화 <암살> 등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에서 능동적인 여성이 나왔지만, 거대한 물결처럼 흐르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 최근 1~2년 사이에 여성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가 늘어났다. 남성 대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성보다 더 현명하고 올바르며 행동력이 있는 여성이 대거 보이기 시작했다. 미디어의 주인공이 여성으로 변모하는 모양새다. 

이야기의 주제의식도 여성 중심으로 흐른다. 대표적인 흥행작으로는 JTBC <부부의 세계>가 있다. 남편을 뺏긴 지선우(김희애 분)를 중심으로 그려진 <부부의 세계>는 기존의 남녀 구도를 완전히 바꿔버린 작품이다.

남성은 지질하고 이기적이었고, 여성은 똑똑하고 현명했다. 실수나 갈등에 대한 대처를 할 때 남성 캐릭터보다 여성 캐릭터의 판단이 더 스마트해졌다.

지난 5월 방송된 tvN <마인>은 여성의 연대를 다뤘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전투구를 벌였던 여자들이 서로 힘을 합친 것이다. 위기의 상황에 놓인 서희수(이보영 분)와 정서현(김서형 분)은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를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하며 위기를 헤쳐나간다. 

특히 성소수자였던 정서현이 자신의 목소리를 멋있게 내는 지점은 새로운 카타르시스가 됐다. 또 <마인>은 우정과 협업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됐다.

민폐 캐릭터서 슈퍼우먼이 되기까지
전지현 한소희 이영애…원톱 드라마


<마인>의 성공 이후 여성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가 물밀 듯 밀려왔다. 조여정을 중심으로 상위 0.5%의 민낯을 드러낸 tvN <하이클래스>, 전도연이 우울한 가운데서도 힘겨운 현실을 극복해나가는 JTBC <인간실격>, 맨몸으로 마약조직을 부수는 한소희가 나온 넷플릭스 <마이네임>, 이하늬의 1인 2역이 눈부신 SBS <원더우먼>이 좋은 예다.

이 외에도 호쾌한 레인저로 변신한 전지현의 tvN <지리산>, 고현정과 신현빈의 치정 복수극 JTBC <너를 닮은 사람>, 산소 같은 이영애가 180도 변신한 JTBC <구경이>, 송혜교 원톱의 SBS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 술에 미친 세 여자의 일상과 우정을 다룬 TVING 오리지널 <술꾼도시여자들> 등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여성 서사는 거대한 물결처럼 다가오고 있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과거에도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많았다. 최근의 변화는 여성이 동일시하기 어려운 캐릭터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라며 “<마인>이나 <원더우먼> <마이네임>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틀을 깨는 여성이 나오는데, 많은 여성이 쉽게 이입하기 어려운 포지션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형태가 다변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그간 남성 중심의 서사로 지겨워진 콘텐츠 시장에서 새로운 돌파구로 여성 서사 드라마가 대두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전까지만 해도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제외하고 스릴러나 공포 등 강력 사건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에서 여성의 역할은 대부분 장치적으로 활용됐다.

갈등을 키우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는 임무는 여성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성이 조력하고 여성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작품이 늘어나는 추세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원더우먼>이나 최근 주목받는 <구경이>가 그 예다. 

이 같은 변화의 이유로 너무 많은 남성 서사로 인해 생긴 결핍과 공백을 여성 서사로 메우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같은 구도더라도 여성이 중심이 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이야기와 반응이 나온다. 예전에는 남자 주인공에 여성을 조연으로 세웠다면, 지금은 반대 구도가 나온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이야기가 도출된다”며 “여성 서사 자체가 새롭고 강렬한 느낌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눈에 띄는
여성 연대

여성 서사가 늘어나면서 톱스타급 남자 배우들은 드라마에 출연이 저조해졌다. 인지도가 높은 여배우와 비교적 인지도가 떨어지는 남배우가 투톱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의 송혜교와 장기용 커플, <인간실격>의 전도연과 류준열 커플, <너를 닮은 사람>의 고현정과 김재영은 나이 차이가 꽤 크다. 이전에는 자주 보기 힘들었던 연상연하 구도가 최근 눈에 띄게 늘어났다.

심지어 <구경이>는 이영애, 김혜준, 김해숙, 곽선영 등 네 명의 여배우가 주축이 돼 작품을 끌고 간다.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대본을 볼 때 여성 서사면 S급 남자배우들이 출연을 고사한다. 이 배역을 탐낼 만한 비교적 인지도가 낮은 배우들이 자리를 채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드라마 소비층이 대부분 여성인데, 최근 여성 사이에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에 대한 반응이 좋다. 메가 트렌드가 된 여성 서사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드라마가 거대한 변화 속에 있는 가운데, 예능계 역시 여성이 중심이 되는 흐름이다. 최근 메가톤급 흥행을 거둔 작품은 대부분 여성이 앞에 서 있다. 예능계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그우먼에게 기회가 없다는 볼멘소리가 적지 않았다.

특히 예능에서의 여성 출연자들은 재미없다는 편견이 강했다.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밋밋한 캐릭터로 소모되는 경향이 있었다. <개그콘서트>만 하더라도 강하고 센 역할은 주로 남자의 몫이었다. 여성이 두각을 나타낸 캐릭터는 손에 꼽았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남성이 예능계를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포츠 선수 출신의 여성 출연자가 방송에 나오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점차 여성 출연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MBC <나혼자 산다>나 <전지적 참견 시점> 등 관찰 예능에 출연한 여성 스타들이 기죽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특히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연경과 박세리다. 

멋진 언니
전성 시대

두 사람은 남자보다도 더 멋있게 자신의 영역에서 이른바 플렉스를 발휘하면서 많은 여성의 워너비가 됐다. 최선의 노력으로 주어진 일을 잘 해낼 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존중도 가미돼있으며, 옳지 않은 것에 분명히 옳지 않다고 말하는 그들의 모습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매료시켰다.


그런 변화의 과정에서 여성 서사 예능의 정점을 찍은 건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다. 

방송 전 <스우파>는 기대보다 우려가 컸던 작품이다. <프로듀스 101> 조작 사건의 잔상이 여전히 각인돼있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우려먹은 서바이벌 방식의 오디션의 포맷을 그대로 가져왔다. 더구나 가수의 무대를 뒤에서 돕는 댄서를 앞세우는 점 역시 가산점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대목이다.

아울러 <스우파> 제작진은 ‘노리스펙 약자 지목 배틀’과 같은 노골적인 대결 구도로 여성 댄서를 몰아세웠다. 이른바 ‘여자의 적은 여자’의 구도로 자극적인 경쟁을 보여주겠다는 심산이다. 

댄스 크루들은 인터뷰부터 진짜 싸움을 하듯 으르렁댔고, 그 모습은 마치 M.net <언프리트 랩스타>의 댄스 버전과 같은 이미지였다. 성공 요인보다는 패배 요소가 더 많은 방송으로 여겨지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제작진이 세워 놓은 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건 댄서들이다. 제작진이 준 미션을 놀라운 실력과 리더십, 절실함으로 바꿔냈다. 단 한 장면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최선을 넘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악을 쓰면서도, 승패가 결정 나면 다른 댄스 크루를 분명히 인정하고 존중했다. 패배 자체에 흔들리지 않았고, 보완할 점을 찾아 다음 무대에서 더 좋은 퍼포먼스를 냈다. 

참가자들을 존중할 줄 모르는 M.net 제작진은 과거부터 그래왔듯 <스우파> 참가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언어를 방송에 내보내며 경쟁적인 면을 강조했지만, 그 과정을 멋있게 만들어낸 건 댄서들의 동료애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는 댄서들에 대중은 감동했다. 

강인해 보이기만 하는 <스우파> 댄서들은 눈물을 자주 흘렸다. 승자가 돼서도 패자가 돼서도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이 눈물에는 기존 방송에서 보인 연민이나 동정이 담겨있지 않다. 결과를 만들어낸 것에 대한 감동이나,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에 아쉬움과 절실함만이 있다. 

<스우파> <골때녀> 도전기 인기
피와 땀 및 눈물에 남성들도 환호

그 진심이 모두 전해진 덕분에 우승 크루인 홀리뱅을 비롯해 8팀의 크루 모두 승자로 인식된다. 도전하는 여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스우파>가 보여줬다.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 외에도 모니카, 립제이, 아이키, 리정, 가비, 노제 등 대다수 스타가 생겨났다. 

<스우파> 참가자들이 보인 진심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프로그램은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다. 어쩌다 참가한 축구에 모든 여성이 빠져들고 있다. 각 직업군을 대표해 모인 여성들은 점차 승리에 목말라 하며, 골을 넣었을 때 환희를 경험하고 패배했을 때의 아픔에 눈물을 쏟는다. 

대부분 축구 동호회가 남성으로 이뤄진 현실에서 팀 스포츠를 하는 여성 자체가 생경했던 가운데 골대에도 슛을 쏘는 여성들의 협동은 각별하게 다가온다. 

혹자는 ‘그깟 공놀이’라고 폄훼할 수 있지만, 공놀이에 진심을 다하는 여성들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누구 하나 설렁설렁 뛰지 않고, 하나같이 이를 악물고 승리를 향해 달려든다. 한 치의 양보 없는 치열한 경쟁과 승패가 결정되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눈물은 안타깝거나 측은함과는 거리가 멀다. 

얼마나 오랜 연습과 노력이 있었는지가 성장한 모습을 통해 느껴지기에, 이들의 눈물 자체가 멋있게 여겨진다. 

도전하는 여성들에게 뜨겁게 반응하는 건 여성만이 아니다. <골때녀>는 남성 커뮤니티에서 더 뜨겁게 타오른다. 남성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던 축구 분야에서 피, 땀, 눈물을 흘리는 여성에게 마음을 열고 응원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예능 역시 기존의 구도에 남녀의 역할이 바뀌었을 뿐이다. <스우파>나 <골때녀>나 경쟁구도는 같다. 하지만 여성이 주인공이 되자 서사가 완전히 달라지고, 그 안에서 나오는 카타르시스도 새롭다. 그래서 더 열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방송가에서는 주도적인 여성이 방송에 많이 나오고 있다. 각종 관찰 예능의 패널은 남녀가 고루 분배하고 있으며, 메인 MC도 남성의 전유물로만 볼 수 없다. 특히 연애나 사랑을 주제로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홍진경, 장도연, 김숙, 곽정은, 유라, 김윤주 등 여성이 두각을 나타낸다.

여성이 주체가 된 예능 프로그램은 그 자체로 블루오션이자 경쟁력을 갖는다. 기존과는 다른 서사와 재미가 나온다. 남성만이 웃기고 재밌다는 편견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전환되고 있다.

젠더 갈등이 더욱 첨예하게 가속화되는 작금의 시대에 <스우파>나 <골때녀> 등은 남녀가 화합할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만큼은 남녀의 우열 따윈 없기 때문이다.

여성 중심
카타르시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이 줄곧 주장했던 ‘기울어진 운동장’이 도전하는 여성들로 인해 균형을 잡아가고 있는 모양새다. 이 같은 변화가 오랫동안 곪은 젠더 갈등을 모두 씻어내기엔 아직 미흡하지만, 점차 멋있는 여성이 늘어난다면 남녀 간의 지겨운 대립조차 좀 더 완만해질 것으로도 예상된다.

<intellybeast@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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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신흥시장 라오스는 지금···

범죄 신흥시장 라오스는 지금···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라오스가 동남아의 마지막 프런티어이자 신흥 투자처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면에는 국제 범죄자들의 주요 거점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 수력발전과 광물, 인프라 개발을 앞세운 투자시장이 활발하게 성장하는 반면, 불법 콜센터를 중심으로 한 사이버 범죄 산업도 동시에 팽창하기 때문이다. 합법과 불법, 투자와 범죄가 교차하는 이 구조는 라오스를 단순한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국제 금융·사이버 범죄의 회색지대로 바라보게 만든다. 최근까지 라오스에서 발생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과거 한국이나 중국에서 인식해 온 단순 전화 사기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대거 이동 범죄 온상 라오스 스스로도 더 이상 ‘내륙 봉쇄국’이 아니라 ‘육상 연결국’을 자임하며 철도와 도로, 에너지, 도시 인프라를 국가 도약의 기반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밝은 전면 뒤에는 국제 범죄도시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함께 드리워지고 있다. 투자시장과 범죄 산업이 동시에 팽창하는 이중 구조다. 라오스에서 발생하는 보이스피싱과 온라인 투자사기는 전화와 메신저, SNS를 결합한 다층적 구조가 정착됐다. 가짜 투자 플랫폼과 암호화폐, 외환(FX) 거래를 미끼로 한 고도화된 금융사기가 핵심 수법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 범죄는 국경 지대와 특별경제구역을 거점으로 운영된다. 미얀마·태국과 맞닿은 북부지역 경제특구 일대는 외국 자본과 외국 인력이 밀집한 구조를 악용하기 쉬운 환경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겉으로는 카지노나 리조트, 개발사업사무소로 위장하지만, 내부에서는 각국 언어를 담당하는 인력이 분업 형태로 사기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발송한다. 최근에는 캄보디아 내 대규모 범죄조직들이 현지 단속을 피해 라오스 등 인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황도 잇따라 포착되고 있다. 지난 10월19일 양기대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라오스에 체류 중인 한국인 민간봉사단체 관계자는 국제 통화에서 “라오스 정부 고위 인사들에게 캄보디아 범죄조직의 라오스 이동 가능성을 물었지만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들었다”고 전했다. 교민사회에서는 태국발 마약 범죄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캄보디아발 범죄조직까지 유입되면 감당이 어렵다며, 한국 정부가 후임 대사를 조속히 임명하고 경찰·영사 인력을 보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문제는 이 범죄들이 ‘라오스 현지 범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 피해자는 한국과 중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 전역, 유럽과 북미까지 확산돼있다. 라오스는 범죄가 실행되는 물리적 공간일 뿐, 자금은 국제 금융망과 가상자산을 통해 순식간에 국경을 넘는다. 캄 ‘프린스그룹’ 라 ‘킹스 로만스’ 해외투자 뒤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 보이스피싱 조직은 가짜 투자 수익 인증 화면과 조작된 거래 내역을 제시해 신뢰를 쌓고, 일정 금액 이상이 입금되면 추가 투자나 긴급 송금을 요구한 뒤 출금을 차단하는 전형적인 수법을 반복한다. 일부 사례에서는 실제 존재하는 라오스 광산 개발, 에너지 프로젝트, 부동산 사업을 사기 시나리오에 끼워 넣어 ‘현지 실물 투자’처럼 포장하기도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범죄 구조가 인신매매와 강제노동과 결합돼있다는 점이다. 고수익 IT·마케팅 일자리를 제안받고 라오스로 입국한 외국인들이 여권을 압수당한 채 콜센터에 감금돼 사기를 강요받는 사례가 국제 언론과 인권단체 보고서를 통해 반복적으로 드러났다. 성과를 내지 못하면 폭행과 협박이 뒤따르고, 탈출을 시도하면 몸값을 요구받는 구조도 확인됐다. 이는 단순 금융사기를 넘어 국제적 인권 범죄이자 조직범죄로 분류되는 이유다.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일대에 밀집했던 대형 범죄단지가 해체되며 조직이 점조직 형태로 흩어지고 있다는 점도 불안 요인이다.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현지 단속 이후 웬치로 불리는 범죄단지 상당수가 텅 비었고, 이들 조직원 상당수가 라오스와 태국, 미얀마 접경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골든 트라이앵글’은 과거 세계적인 마약 생산지였지만, 최근에는 다국적 피싱 사기의 온상지로 탈바꿈했다. 울창한 산림 지역에 스타링크 위성 인터넷 장비를 설치해 전 세계를 상대로 보이스피싱과 로맨스 스캠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라오스 북부 보케오 지역에는 ‘범죄단지’를 넘어선 ‘범죄마을’도 존재한다. 중국 카지노 그룹 킹스 로만스가 99년간 임차해 카지노와 호텔을 운영하는 이 지역은 사실상 외부 접근이 차단된 치외법권에 가깝다. 불법도박과 마약 밀매, 스캠 사기, 암호화폐 자금세탁이 복합적으로 이뤄진다는 의혹이 제기돼왔고, 미국은 이미 2018년부터 킹스 로만스를 초국가범죄 기업으로 지정해 제재하고 있다. 캄보디아에 프린스그룹이 있다면, 라오스에는 킹스 로만스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국경 넘는 나쁜 놈들 마약 범죄 역시 라오스의 또 다른 어두운 단면이다. 최근 라오스 공항에서 마약을 소지한 채 출국을 시도하다 적발되는 한국인이 급증했다. 비엔티안과 지방 공항에서 잇따라 체포된 사례들은 대부분 헤로인과 케타민, 필로폰 등 대량의 마약을 포함하고 있다. 라오스 형법은 마약 범죄에 극히 강경하다. 일정 기준을 초과하면 사형이나 무기징역까지 선고될 수 있고, 미수나 공범 역시 동일하게 처벌된다. 실제로 2019~2020년 비엔티안 공항에서 필로폰을 소지하다 적발된 한국인 2명은 현재까지도 장기 복역 중이다. 주라오스 한국대사관이 “타인으로부터 물건을 위탁받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경고하는 배경이다. 라오스 정부 역시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불법 콜센터 단속과 외국인 범죄자 검거, 장비 압수와 추방 조치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며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단속이 강화될수록 범죄조직이 인접 국가로 이동하는 ‘풍선효과’는 반복되고 있다. 구조적 취약성이 해소되지 않는 한, 범죄의 위치만 바뀔 뿐 산업 자체는 유지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같은 범죄 환경은 라오스 투자시장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복합적인 영향을 미친다. 라오스는 여전히 매력적인 투자 요소를 갖춘 국가다. 수력발전과 광물, 재생에너지, 일부 농업·임산물 가공 분야는 실질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행정 절차의 불투명성, 계약 집행의 불확실성, 외환 규제와 금융 접근성 문제는 오래된 리스크다. 여기에 사이버 범죄가 결합되면서 정상 프로젝트와 사기성 프로젝트의 경계는 더욱 흐려지고 있다. ‘정부 승인’ ‘양허권 보유’ ‘현지 고위 인맥’ 같은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공식 검증 없이는 실체를 가늠하기 어렵다. 동남아 마지막 남은 블루오션 라오스의 개발 모델 역시 기회와 위험이 교차한다. 인프라를 외부 차관과 ODA로 먼저 구축하고 성장을 통해 상환하는 구조는 철도와 도로, 병원, 상수도 같은 가시적 성과를 냈다. 그러나 정부 부채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60% 후반으로 추정되고, 낍(KIP)화 약세는 상환 부담을 키우고 있다. 빚으로 지은 인프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자산이 아니라 부담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경고다. 현장에서는 인프라가 완공돼도 운영 시스템과 인력, 수요가 따라오지 못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다만, 한국 정부는 ‘메콩강 내륙국’으로 외교적 지평을 넓히기 위한 포석으로 라오스를 지목했다. 해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 개발 속도가 더딘 메콩강 유역 내륙국 시장을 선점해 경제협력의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판단도 깔려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올해 마지막 정상회담 대상국으로 라오스를 선택한 이유다. 이 대통령은 지난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통룬 시술릿 라오스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했다. 이날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라오스 국가주석이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것은 12년 만이다. 라오스는 대표적인 메콩강 유역의 내륙 국가로 꼽힌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젖줄인 메콩강은 중국 칭하이성에서 발원해 윈난성과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을 거쳐 남중국해로 흐른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에 이어 '3대 교역국'으로 꼽히는 베트남을 비롯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세안의 해양국과 활발한 경제·문화·인적 교류를 해온 반면 라오스와 미얀마, 캄보디아 등 메콩강 유역 내륙국과 비교적 교류가 적었다. 조원득 국립외교원 아세안인도연구센터장은 “(한국의) 경제협력이나 투자는 베트남 등에 집중됐고 동남아의 내륙 국가에 대한 실질적인 투자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최근 몇 년간 (한국이) 한미일 외교에 집중하다 보니 (내륙국에 대한) 정치·외교적인 관심이 많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범죄로 얼룩 이면엔 ‘기회의 땅’ 무궁무진 천연 광물과 수력발전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메콩강 유역 국가들은 베트남처럼 경제적으로 한 단계 높은 층위를 차지하는 국가들과 아닌 국가들로 구분돼있다”며 “메콩강 지역 개발의 최대 수혜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국가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얀마는 군부독재라는 문제가 있고 캄보디아는 온라인 ‘스캠’(사기)으로 대표되는 치안 문제가 있다”며 “한국이 메콩 지역 개발을 위해 손잡고 일할 수 있는 국가는 현재로선 라오스”라고 했다. 이 대통령이 해양국들뿐 아니라 내륙국들과 교류·협력 등을 통해 아세안에서 영향력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된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아세안의 GDP 규모는 약 3조8000억달러(약 5590조원)로 국가로 치면 세계 5위 수준이다. 인구 규모는 6억7000만명으로 세계 3위다. 미중 갈등을 계기로 국제사회의 불확실성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4강’을 넘어 아세안 등 신흥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약 6개월 만에 G7(주요 7개국), 유엔(UN·국제연합)총회,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 참석해 상생과 연대의 가치를 강조하며 자유무역 질서 및 다자주의 회복에 힘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통룬 주석과의 확대회담에서 “라오스가 통룬 주석의 리더십 하에 내륙 국가라는 지리적 한계를 새로운 기회로 바꿔 역내 교통·물류의 요충지로 발전한다는 국가 목표를 성공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확신한다”며 “이 과정에서 한국이 든든한 파트너로서 함께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양국 간 호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더욱 확대·발전시켜서 양국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성과를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수익 보장? 의심부터 결국 라오스의 투자시장과 보이스피싱 범죄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적 공백과 국경 지대의 느슨한 관리, 외국 자본과 인력 유입이 만들어낸 회색지대라는 동일한 토양에서 자라난 두 개의 얼굴이다. 라오스는 여전히 기회의 땅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이제 철저한 검증과 리스크 관리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이 됐다. 높은 수익률을 약속하는 투자 제안일수록, ‘이미 현지에서 잘 돌아가고 있다’는 말일수록 냉정하게 의심해야 하는 이유다. 라오스 투자시장의 성장과 국제 범죄 산업의 확산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구조가 낳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결과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