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나뉘는 신 계급사회 해부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1.09.27 15:15:30
  • 호수 13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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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살아도 얼굴 못생기면 강등…명문대 나와도 대머리는 감점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최근 현대판 신분 계급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이 국민을 갈라놨다. 서열을 나누는 등급표는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젊은 세대들은 차별과 혐오를 부르는 등급표 놀이에 왜 빠진 것일까.

정부가 코로나19로 인해 힘든 국민을 위로하고자 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지급 대상은 소득 하위 88%이며 1인당 25만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국민 소득에 따라 지급 기준도 달라졌다. 

현대판
골품제도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재난지원금 등급표’라는 글이 공유됐다. 작성자는 이번 국민지원금 지급과 관련해 성골(상위 3%), 진골(상위 7%), 6~4두품(상위 12%), 평민(상위 90%), 노비(상위 100%) 등 계급을 총 5개로 분류했다.

재산세 과세표준 기준 초과로 미지급 대상인 사람은 성골이다. 금융 소득 기준 초과로 미지급 대상인 사람은 진골, 보험료 기준 추가로 미지급 대상인 사람은 6~4두품에 비유됐다. 재난지원금을 받은 사람들은 ‘평민’이나 ‘노비’로 부르고 있다.

재난지원금 유무에 따라 계급을 나눈 것이다.


이 등급표가 공개되면서 네티즌들은 주로 자조 섞인 반응을 보였다. 이를테면 ‘지원금을 받았지만, 평민이어서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노비였구나’ 등이었다. 

또 직장인 커뮤니티나 인터넷 카페에서는 이른바 ‘자부심상’ 게시물도 회자됐다. ‘고소득자’가 수여자인 이 상은 “위 사람은 평소 돈을 많이 벌었기에 재난지원금 대신 자부심상을 드립니다”라고 쓰여있다.

앞서 김부겸 국무총리가 “재난기에도 전혀 소득이 줄지 않았던 고소득자들한테는 사회적 기여를 한다는 자부심을 돌려드릴 수 있다”고 말한 내용을 비꼬아 만든 것이다.

해당 등급표를 두고 우스운 장난쯤이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계급을 분류하는 이 등급표가 서민에게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논란이 나오고 있다. 현대판 골품제도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등급표를 만들어 공유하는 놀이는 예전부터 있었다. 외모, 직업, 패딩, 핸드폰 등을 계급별로 분류했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계급 사회를 부추기고 있다. 계급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건 결혼정보 회사에서 사용한다는 등급표에서다. 

결혼 등급표에는 직업과 학벌, 재산, 외모 등이 구체적이다. 일부 결혼정보 회사는 이 등급표를 토대로 점수를 매긴 뒤 고객을 분류했다. 

예를 들어 키 185㎝, 몸무게 75㎏으로 보기 심한 흉터가 없고 집안 재산이 100억원이 이상인 서울대 법대 출신 남성 판사는 A+ 등급으로 최상위 상품에 가입이 가능하다.


반면 키 166㎝, 몸무게 73㎏에 머리가 벗겨졌고 집안도 넉넉하지 않으며 2년제 대학교를 졸업한 중소기업 직원이라면 D 등급이 된다. 이 남성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의 폭은 좁아진다.

등급표에 따르면 남성의 경우 법대 출신 판사는 1등급, 서울대 법대 출신 검사와 서울대 행정고시 합격자, 비 서울대 포함해 5대 로펌 변호사는 2등급이다. 같은 판·검사라도 비 서울대라면 3등급으로 매겨진다. 서울대 의대 출신 의사와 같은 등급이다. 해외파 스포츠 스타는 5등급에 위치한다. 

“평민이냐 노비냐” 차별 부르는 등급표 
외모, 세금, 직업, 핸드폰 등으로 분류

서울·연세·고려대 외국계 대기업 재직자나 금융권 공기업 재직자도 5등급이다. 최고경영자(이하 CEO)라도 직원이 몇 명 있느냐에 따라 등급이 달라진다. 300명 이상 CEO는 4등급, 100명 이상 CEO는 7등급, 10명이상 CEO는 9등급이다.

초·중·고 교사, 단순 대기업 재직자, 공무원 9급 합격자는 하위권에 속했다. 전체 15등급 가운데 2년제 대학 출신의 남성 등급은 가장 아래에 있었다. 

1등급은 서울대 법대 출신 판사로 100점을 주고 그 아래 등급부터 3점씩 차감하는 방식으로 계산되며, 2등급은 서울대 법대 출신 검사 97점, 3등급 서울대 의대 출신 의사 94점 등으로 매긴다.  

직업과 출신학교를 같이 묶어 놓고도 학부 졸업 학력은 따로 분류했다.

서울대·카이스트대·포항공대·미국 명문대는 1등급으로 분류하고 연세대·고려대·미국 100위권 대학교는 2등급으로 분류했다. 그 다음부터는 등급이 확 벌어진다. 기타 서울·수도권 4년제는 7등급, 지방 4년제 9등급, 2년제 대학은 10등급이다. 

재산은 부모와 본인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부동산, 주식, 현금 등을 모두 포함시켜 무조건 많으면 후한 점수를 줬다. 100억원 이상은 1등급, 60억~100억원은 2등급, 10억~20억원은 7등급, 3억~5억원은 9등급에 속한다. 

이 같은 등급을 받으려면 얼굴과 몸매가 ‘무난하다’는 전제 조건이 깔려있어야 한다. 만약 선호하는 외모가 아니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대머리일 경우 10점 차감, 흉터는 5점 차감한다. 

여성의 경우 부모 직업과 재산, 자신의 미모 등이 등급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몇 해 전 유출된 결혼정보회사의 등급표에 따르면, 전체 점수 100점 만점에 외모가 40점이나 배점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설령 집안 배경, 직업, 학벌도 조금 떨어진다 해도 외모에 대한 가중치가 중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인뿐 아니라 청소년들도 등급표를 만들어 공유했다. 가치관이 아직 형성되지 않다 보니 청소년들은 등급표에 과몰입해 사회적인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적나라한
결혼 등급

예를 들면 고가의 롱패딩이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청소년들 사이에서 ‘패딩 계급표’가 유행했다. 가격과 브랜드에 따라 등급을 나눈 것이다. 50만원 이상 해외 브랜드 제품은 1등급, 아이돌 그룹이 모델이 된 30만~50만원대 국내 브랜드 제품은 2등급으로 매겨졌다.

다운패딩·롱패딩·플리스 등 고가 제품 유행이 모방 심리에서 비롯하면서 또래 집단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패딩 브랜드가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부모 등골을 빼먹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패딩 계급론’으로 인해 학생 사이에서 위화감이 조성돼 고가 패딩 구입을 희망하기도 했다. 

실제 고가의 패딩 때문에 학교폭력이 발생했다.

지난해 인천 중학생 집단폭행 추락사 사건의 가해 학생이 구속 당시 피해 학생의 패딩점퍼를 입어 논란이 된 바 있다. ‘노스페이스 패딩’이 한창 유행했던 2012년 부산의 중학교 3학년생 5명이 친구들에게 폭행을 가해 120만원 상당의 패딩 네 벌을 빼앗아 입고 다니다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바람직한 소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만족할 수 있는 것으로 사는 것이지만 패딩 계급론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알려지면서 합리적 소비가 이뤄지지 않았다.

계급론에 불을 지핀 건 수저 계급표였다. 자본 상태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심지어 흙수저라는 말로 나뉘며 유행어로 자리잡았다. 

자산 20억원 또는 가구 연 수입 2억원 이상일 경우 ‘금수저’, 자산 10억원 또는 가구 연 수입 1억원 이상일 경우 ‘은수저’, 자산 5억원 또는 가구 연 수입 5500만원 이상일 경우 ‘동수저’ 등으로 나뉜다. 흙수저는 여기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우다.

구체적으로는 자산 5000만원 미만 또는 가구 연 수입 2000만원 미만인 가정 출신이다.

수저 계급표가 화제로 떠오르자 같은 시기에 ‘흙수저 빙고 게임’도 유행했다. 가로 다섯 칸, 세로 다섯 칸짜리 표에 흙수저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가정환경이 쓰여있다.

차별·배제
의미 내포

‘여름에 에어컨을 잘 안 틀거나 에어컨 자체가 없음’ ‘TV가 브라운관이거나 30인치 이하 평면TV’ 등 가전제품 유무나 연식, 크기를 따지는 칸부터 ‘고기를 물에 넣고 끓이는 요리로 해먹음’ ‘부모님이 정기 건강검진 안 받음’ 등 구체적인 생활양식이 기재돼있는 칸까지 해당 사항도 다양했다.

내용에 동그라미를 더 많이 칠수록 흙수저에 가깝다. 

취업준비생 A씨는 “요새 취업하려면 해외 연수·인턴·면접 등 거쳐야 하는 단계가 늘어났고, 자연히 단계마다 탈락하는 청년도 많다”며 “수저 계급표를 보고서 더욱 비관하게 됐다”고 했다.

왜 젊은 세대는 이토록 가혹한 ‘등급 분류’를 하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88만원 세대’ ‘3포세대’ 등으로 불리며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2030 청춘들이 ‘노력해도 바뀌는 게 없다’는 자조 끝에 등급 분류를 만들어냈다고 분석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수저계급 등 말이 난무하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폭력적으로 변화한 결과”라고 현 상태를 진단했다. 신 교수는 “개인들이 생존을 해결해야 하는 위험하고 불안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가 불안해질수록 구성원들이 협력해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공격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날수록 고급 교육과 다양한 어학 능력을 갖춰 취업까지 유리하지만 가정환경이 어려우면 아무리 공부를 해도 취직이 어렵고 학자금 대출 등으로 ‘하루하루 빚만 늘어난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비교하기·자랑하기 문화가 등급을 나누는 데 있어 한 몫을 차지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발달로 인해 타인의 삶과 비교하고 자신의 삶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 분류되길 희망하는 것이다. 

출신·재산으로 구분되는 위치
타인과 비교·자랑 문화 기인

이처럼 계급을 나누려는 이유는 의존심리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등급표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소속감에 행복을 느끼고 타인과 비교해 심리적인 안정감을 취하기도 한다. 외부 환경요인을 찾아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모든 분야에 있어 등급으로 나뉘어 계급화시키는 형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계급화는 곧 차별을 의미한다. 어느 사회든 계급화에 따른 차별은 있기 마련이지만, 이를 배척해야 할 젊은 세대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건 ‘건강한 사회’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인터넷에서 공유되고 있는 등급표에는 가난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의미가 내재돼있다. 어른들의 빈자 혐오가 아이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기 때문이다. 

송재룡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이제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시대라며, 아이들이 차별과 배제를 지양하도록 가정과 사회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는 “아이들은 사고가 단순해 차별을 자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상이 되는 상대편은 정서적으로 위축되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부모들의 심경도 매우 힘들 것”이라며 “일상에서, 가정에서 아이와 부모가 대화하는 자리에서부터 상대방을 계급화해 차별하거나 무시하는 언사와 행위를 조심해야 하고 이를 하나의 문화로 정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계급에 따른 차별이나 과시가 자연스럽게 내면화될 수 있다”며 “가정과 사회의 교육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계급을 구분 짓는 것은 서열을 나눈다는 의미다. 서열이 생기면 혐오와 차별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불평등의 피라미드에서 한 칸이라도 나은 위치로 이동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있다. 때로는 자신의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계급에 집착할 수 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쓴 오찬호 작가는 “학교 서열, 직업, 브랜드 등이 모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승자’의 개념으로 보이는데 이는 차별적 보상도 공정한 경쟁을 통해 만들어진 정당한 보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라며 “서열화를 하면 누군가는 결국 멸시받고 조롱받게 되는데 그에 대한 죄책감도 사라졌다는 것을 방증한다. 학교는 그런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야 하는데, 학교조차 서열화에 앞장서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또 20·30대가 자꾸 계급도를 만드는 현상과 관련해, 젊은 층들이 이를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론 인정하고 싶어하는 심리적 이중성을 지적했다.

불평등
피라미드

오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는 줄을 세워서 쟤는 어디에 있는지 딱딱 이해하는 게 굉장히 익숙하다”며 “자꾸 세분화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 또는 친구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자기보다 뒤처진 계급을 보면서 안심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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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발 검찰과의 전쟁 막전막후

여당발 검찰과의 전쟁 막전막후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검찰의 대장동 항소 포기 후폭풍이 거세다. 더불어민주당과 검찰의 시각이 크게 엇갈리면서 서로를 향해 날을 겨누는 형국이다. 검찰청은 내년 9월 폐지될 시한부 운명이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검찰개혁’을 필두로 이참에 검찰의 뿌리를 뽑겠다는 방침이다. 국민의힘을 등에 업고 버티기에 나선 검찰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아 당분간 양측 간의 힘겨루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검이 대장동 사건에 대한 항소 시한을 넘기면서 논란에 불이 붙었다. 서울중앙지검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을 비롯해 ▲남욱 변호사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정민용 변호사 ▲정영학 회계사 등 대장동 일당에 대한 1심 판결에 항소하지 않은 것이다. 꺾이거나 되치거나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면서 ‘불이익변경 금지 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할 수 없게 됐다. 대장동 개발 비리로 발생한 범죄수익의 국고 환수 규모가 축소될 것이란 해석에도 힘이 실린다. 화살은 곧바로 이재명 대통령에게로 향했다. 이 대통령은 대장동 사건에서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혐의 등을 받는데, 이미 대장동 민간업자 재판에서 무죄가 나온 만큼 항소 포기로 인해 추가로 다툴 여지를 차단했다는 게 국민의힘의 설명이다. 여기에 대통령실이 항소 포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이재명 면죄부’라고도 주장했다. 국민의힘 곽규택 대변인은 “대통령실 민정수석실 비서관 4명 중 3명, 법무부 장관 정책보좌관, 법제처장, 국정원 기조실장까지 모두 이 대통령의 변호인 출신”이라며 “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대장동 사건 주요 피고인 정진상, 김용, 이화영 등을 특별 면회하면서 ‘검찰은 증거가 없다’는 발언으로 회유를 시도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보수 성향인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 역시 “국가의 유례없는 사법 정의 포기 사태는 이재명정부의 책임”이라며 “공소 사실의 핵심에 무죄 선고가 난 사건에 검찰이 항소를 포기한 전례를 찾기 어렵다. 대통령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것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정부 출범 이후 대검찰청 차장검사로 승진한 노만석 검찰총장을 겨냥해서는 책임론이 불거졌다. 법조계에 따르면 항소 시한을 앞두고 서울중앙지검은 대장동 일동에 대해 일부 무죄가 선고되는 등 다툼의 여지가 있는 1심 판결에 대해 “관행대로 항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이를 전해 들은 대검 수뇌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에 노 대행은 지난 9일 “대장동 사건은 일선 검찰청의 보고를 받고 통상의 중요 사건의 경우처럼 법무부의 의견도 참고한 후 해당 판결의 취지 및 내용, 항소 기준, 사건의 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검찰총장 대행인 저의 책임하에 서울중앙지검장과의 협의를 거쳐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 역시 대장동 일동에 대해 검찰의 구형량보다 높은 형량이 선고된 만큼 항소 포기가 ‘적절한 판단’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항소 포기 지시는 없었다”고 일축했다. 화약고에 불붙인 ‘항소 포기’ 후폭풍 이재명·노만석·정성호 몽땅 도마 위로 정 장관은 지난 12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 회의에 출석해 ‘(이진수) 법무부 차관에게 대장동 사건 관련으로 어떤 지시를 했느냐’는 국민의힘 배준영 의원의 질문에 “노 검찰총장 직무대행에게 지휘권을 행사할 수도 있으니 항소를 알아서 포기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어 정 장관은 총 3번 정도 대장동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언급하며 “(두 번째인) 11월6일 목요일에는 국회에서 예결위 종합질의가 있어 국회에 왔는데, 예결위 끝나고 대검에서 항소할 필요성이 있다고 한 의견을 들었다”며 “당시 ‘중형이 선고됐는데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하지 않는가’란 정도의 이야기만 하고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음 날인 11월7일에도 마찬가지”라며 “저녁에 예결위가 잠시 휴정돼 검찰에서 항소할 것 같다는 구두 보고를 식사 중에 받았고, 그날 저녁 예결위가 끝난 후 최종적으로 항고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부연했다.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대목을 놓고 국민의힘은 “신중한 검토(판단)가 곧 항소 포기인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며 법무부가 사실상 외압을 행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는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이 8글자에 모든 것이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다”며 “법무부 장관이 개인적인 견해임을 전제로 하며 검찰에 지시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대장동 사건 수사·공판팀을 이끌었던 일선 검사를 중심으로 반발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김영석 대검찰청 감찰1과 검사는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를 통해 “검찰 역사상 일부 무죄가 선고되고 엄청난 금액의 추징이 선고되지 않은 사건에서 항소 포기를 한 전례가 있었나”라며 이번 결정으로 대장동 일당 등 민간업자에게 수천억원 상당의 범죄수익이 돌아간 점을 꼬집었다. 대장동 사건의 수사·공판팀을 이끌었던 강백신 대구고검 검사도 “항소 포기로 남욱·정영학을 상대로는 범죄수익을 단 한 푼도 환수할 수 없게 됐고, 김만배를 상대로는 당초 예상 금액의 1/10에 불과한 금액만 추징 선고가 이뤄졌음에도 이를 묵과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기막힌 타이밍 검찰 안팎에서 책임론이 확산하자 결국 노 대행은 항소 포기 논란이 불거진 지 닷새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자 일선 검사들은 ‘검찰총장 권한대행께 추가 설명을 요청드린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항소 포기 과정에 대한 상세 설명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냈다. 해당 입장문은 박재억 수원지검장을 비롯해 ▲박현준 서울북부지검장 ▲박영빈 인천지검장 ▲박현철 광주지검장▲임승철 서울서부지검장 ▲김창진 부산지검장 등 검사장 18명 명의로 작성됐다. 이들은 “서울중앙지검장은 명백히 항소 의견이었지만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항소 포기 지시를 존중해 최종적으로 공판팀에 항소 포기를 지시했다”며 “검찰총장 권한대행을 상대로 항소 의견을 관철하지 못하고 책임지고 사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면 검찰총장 권한대행이 어제 배포한 입장문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의 항소 의견을 보고받고 법무부의 의견도 참고한 뒤 해당 판결의 취지 및 내용, 항소 기준, 사건의 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며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책임 하에 서울중앙지검장과 협의를 거쳐 숙고 끝에 항소 포기를 지시했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하담미 수원지검 안양지청장 ▲최행관 부산지검 동부지청장 ▲신동원 대구지검 서부지청장 등 8개 대형 지청을 이끄는 지청장들도 집단 성명을 냈다. 이들은 “이번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 지시는 그 결정에 이른 경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면 검찰이 지켜야 할 가치, 검찰의 존재 이유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라며 “그간 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 권한대행의 입장문, 법무부 장관의 설명만으로는 항소를 포기한 구체적 경위가 설명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법적·행정적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정치 검사들의 반란을 분쇄하겠다”며 검찰의 집단 반발을 ‘항명’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대한 징계를 예고했다. 현재 일반 공무원은 6단계 징계 처분(파면·해임·강등·정직·감봉·견책)이 가능하지만, 검사는 파면에 해당하는 징계 규정이 없다. 검사에 대한 징계는 검사징계법에 따라 이뤄지는데, 이를 ‘검사 특혜법’이라고 지적하며 폐지하겠다는 설명이다.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는 “정치 검사들의 반란에 철저하게 책임을 묻겠다”며 사실상 검찰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김 원내대표는 “정 법무부 장관께 강력히 요청한다. 항명 검사장 전원을 즉시 보직 해임하고 이들이 의원면직하지 못하게 징계 절차를 바로 개시하라”며 “항명에 가담한 지청장과 일반 검사들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이후 김 원내대표가 검사징계법 폐지 법률안·검찰청법 개정안을 각각 국회에 제출하면서 사실상 검찰 징계는 당론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항소 포기 논란 이후 박재억 수원지검장에 이어 송강 광주고검장이 연달아 사의를 표명했지만 민주당은 “사표를 수리하지 말고 징계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퇴로를 막았다. 항명? 투쟁? 법무부 내부에서 집단행동에 나선 일부 검사장을 대상으로 평검사 보직이동을 하거나 국가공무원법 위반 등으로 형사 처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지면서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검찰 측에서는 “보복용 강등”이라는 거센 반발이 나오지만 법무부는 “검사장은 직급이 아닌 보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강등·징계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검사장의 집단행동을 비판하며 징계의 타당성을 주장했지만, 일선 검사들은 항소 포기 판단 경위에 대해 추가 설명을 요청한 것이 어떻게 항명이냐며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그동안 민주당 의원들이 앞다퉈 일선 검사장을 향해 “빨리 나가라”고 윽박지르던 것과 달리 최근 지도부는 숨 고르기에 돌입한 모양새다. 국민의힘이 계속해서 이정부와 대장동을 엮어 공격하는가 하면, 이 대통령의 UAE(아랍에미리트) 순방 성과가 묻힐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톤 조절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김병기 원내대표는 이 대통령이 순방을 떠난 17일부터 이틀간 공개 석상에서 검사 항명, 징계 등 관련 현안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 등 일부 최고위원이 내란전담재판부 도입을 주장했으나 당은 “지도부 차원의 의견은 아니”라며 거리를 뒀다. 정 법무부 장관 역시 지난 18일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검사장 징계 검토 관련 질문에 “어떤 것이 좋은 방법인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을 위해 법무부나 검찰이 안정되는 것”이라며 신중한 자세를 택했다. 낮은 볼륨을 유지하는 지도부와 달리 의원 개개인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민주당 김현정 원내대변인은 한 라디오를 통해 정 법무부 장관의 ‘검찰조직 안정’ 발언에 대한 질문에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넘어가는 것이 조직의 안정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방법은 아니”라고 답했다. 이어 “정 법무부 장관은 법무부와 검찰 전체를 총괄하는 수장이기 때문에 고민이 있으신 것 같다”면서도 “다만 중요한 것은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현재 민주당이 내세우는 원칙은 항명 검사에 대한 징계로, 그 원칙을 지키는 것이 국민 여론이라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몰아붙이던 지도부 잠시 숨 고르기 이제는 각개전투…검사들도 ‘부글’ 민주당이 다수 석을 차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에서는 ‘집단 항명 검사장 18인’ 전원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항소 포기 결정에 반발하는 검사장 18명을 겨냥해 “헌정 질서의 근본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검찰조직의 지휘 감독체계를 정면으로 무너뜨린 사건”이라고 비판하며 법적 조치에 나선 것이다. 지난 19일 법사위 여당 간사인 김용민 의원은 조국혁신당·무소속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통해 이같이 밝히며 “검찰의 집단 항명은 정치적 집단행동으로 헌정 질서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들의 행동은 단순한 의견 개진이 아니었으며 법이 명백히 금지한 공무의 집단행위, 즉 집단적 항명”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피고발인 18명은 모두 각 검찰청을 대표하는 검사장급 고위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중립성이 누구보다 강하게 요구되는 위치에 있다”며 “그런데 이들은 서로 합의해 공동성명을 작성하고 이를 동시에 내부망과 언론에 공개했다. 이는 다수가 결집해 실력으로 주장을 관철하려는 집단적 압력 행위”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압박이 거세지자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뒤 검사들이 반격에 나설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권력이 교체됨에 따라 검사의 태도 역시 손바닥 뒤집듯 바뀌고, 만일 보수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경우 검사의 날이 다시 이 대통령을 향할 것이란 점에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내년 10월 해체 예정인 검찰청이지만 막강한 권력을 지니던 시절의 관행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 검찰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집단이 탄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실은 “검사 인사권은 법무부에 있다”며 이번 사안에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논란의 중심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대통령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부각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 민주당 관계자 역시 “‘대통령실 외압’은 궁지에 몰린 국민의힘의 프레임”이라며 “만약 5년 뒤에 검찰이 반기를 들면 그때는 (이 대통령의 거취를) 국민 여론에 맡기면 된다. 지난 몇 년간 수십번의 압수수색과 조사가 이뤄졌고, 그 결과를 전부 국민이 지켜봤다”고 설명했다. 피바람 과도기 이 모든 과정을 놓고 최요한 정치 평론가는 “과도기”라고 설명했다. 최 평론가는 <일요시사>를 통해 “검찰이 하나의 권력으로 등장해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그 대상을 개혁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고, 이정부는 그걸 시스템으로 헤쳐나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개혁은 혁명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혁명은 싹을 자르면 되지만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검사 징계, 검찰개혁을 놓고 같은 진보라 하더라도 결이 다르지 않나. 다양한 논의와 의견을 두들겨 맞춰서 하나의 안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개혁안은 보수도 일정 정도 동의를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스템 개혁이라는 건 단칼에 두부처럼 잘리는 게 아닐뿐더러 이정부가 끝날 때까지 (개혁을) 시도하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일 수도 있다”고 부연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