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유비' 유상철의 끝나지 않은 축구 이야기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1.06.14 15:47:04
  • 호수 13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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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사에 큰 족적 남기다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2002년 한일월드컵 영웅이었던 유상철 인천유나이티드 명예감독. 그는 쉰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선수 시절 그라운드에서 묵묵하게 투혼을 보여줬던 유 감독은 췌장암 병마와 싸우다 “건강하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하고 싶은 축구 원 없이 해라.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마음 편하게 지내길 바란다.” 최용수 전 FC서울 감독이 먼저 하늘나라로 간 유상철 전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에게 보낸 편지 마지막 문구다. 

국내외
추모 물결

유 감독이 지난 7일, 향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19년 11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1년7개월간을 투병했다. 췌장암은 초기 증상이 거의 없어 ‘침묵의 살인자’라고도 불린다. 한참 진행된 이후에야 복통과 함께 황달이나 소화불량, 식욕부진, 피로감 등 증상이 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히딩크, 손흥민, 이동국 등 축구계는 물론 정치권, 연예계에서도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큰 감동을 줬던 그였기에 많은 사람이 슬퍼했다.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진 빈소에도 온종일 선후배 축구인과 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이날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함께 쓴 홍명보 울산 현대 감독, 김병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황선홍 전 대전 시티즌 감독, 최용수 전 FC서울 감독, 김남일 성남FC 감독, 이천수 대한축구협회 사회공헌위원장, 안정환, 이민성 대전시티즌 감독, 현영민 JTBC 해설위원 등이 빈소를 찾았다.


해외 축구계도 유 감독을 애도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지난 7일 오후 월드컵 공식 계정에 유 감독의 선수 시절 국가대표 경기 출전 사진과 함께 “한 번 월드컵 영웅은 언제나 월드컵 영웅”이라며 추모 메시지를 올렸다.

유 감독이 현역 시절 활약했던 일본 J리그 요코하마 마리노스도 트위터를 통해 “지난해 홈 개막전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안타깝다”며 슬픔을 함께했다. 

2019년 가을. 축구계 내에서 ‘유상철 감독이 많이 아프다’는 소문이 돌았다. 10월경 유 감독은 가까운 기자들에게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달했다. 이후 유 감독은 ”괜찮아진다“는 말을 하며 기자들을 오히려 안심시켰다. “건강하다”는 기사를 내달라고 유 감독은 기자들에게 당부했다. 

유 감독의 몸 상태가 팬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2019년 10월19일 성남FC전이었다. 황달 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그는 성남전서 너무도 수척한 얼굴로 나타났다.

결국 성남전이 끝나고 나서 인천 구단에서 유 감독이 췌장암 4기라고 발표했다. 그의 병세가 알려지고 나서 바로 만난 상대는 수원 삼성. 당시 수원의 사령탑은 유 감독의 1971년생 동갑내기 이임생 감독이었다. 두 사람은 연령대별 대표팀부터 국가 대표팀까지 함께 한 절친한 친구였다.

2019년부터 췌장암 말기 투병
항암치료 하며 복귀 의지 보여

성남전이 끝나고 병원에 입원했던 유 감독은 수원전 사전 기자회견에서 “꼭 돌아오겠다고 선수들에게 약속했다. 다행히 약속을 지켰다”고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의연한 친우를 본 이임생 감독은 “사실 상철이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냥 안아주기만 했다. 그래도 경기에서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이임생 감독은 유 감독이 힘든 상태로 벤치를 지키는 만큼 수원 선수들에게 골을 넣어도 세리머니를 자제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실제로 타가트가 선제골을 기록한 이후 세리머니를 하며 들뜬 모습을 보이려 하자 도움을 기록한 전세진이 다가가 이임생 감독의 당부를 전하기도 했다.

0대 1로 끌려가던 인천은 후반 추가 시간에 명준재의 극적인 골로 무승부를 거뒀다. 이날 거둔 승점 덕에 인천은 승강 플레이오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리그 잔류를 확정할 수 있었다. 승부가 끝나자 이 감독과 유 감독의 감정이 표출됐다. 평소 생김새와 달리 잔정이 많다는 소리를 듣는 이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유 감독을 언급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던 유 감독도 친구의 마음에는 애틋한 감정을 표했다. 그는 “(이 감독과는)오랜 친구다. 덩치는 큰데 마음이 너무 여리고 눈물도 많은 친구”라며 “임생이가 내 걱정을 하는 것 같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유 감독은 시즌이 끝난 후 1월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직을 사임하고 명예감독으로 남으며 투병에 전념해왔다. 회복에 강한 의지를 보였던 그는 힘겨운 항암치료를 견디면서도 건강이 많이 호전된 모습을 보였다.

방송과 유튜브 등에 출연해 축구인, 팬들과의 소통을 이어가기도 했다. 지난 시즌 인천이 또다시 강등 위기에 놓이자 감독직 복귀에 의지를 보이는 등 인천과 축구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 감독의 투병 소식이 알려진 이후 많은 이들이 보여준 반응은 ‘인간 유상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많은 축구 팬들과 축구계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유 감독이 J리그 시절에 활약했던 요코하마 팬들까지 ‘할 수 있다. 상철이형’이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일관계가 경색돼 민감할 때, 그것도 팀을 떠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선수의 투병 소식에 일본 팬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매너는 축구에는 국경도 편견도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며 깊은 감동을 남겼다.

A매치 124경기
멀티플레이어

국가대표 경기를 뜻하는 A 매치를 100경기 이상을 뛰면 대단한 선수라고 인정받는다. 무려 124경기를 출장했던 유 감독은 한국 국가대표 역대 출전수에 차범근(136), 홍명보, 이운재(133)에 이어 5위에 랭크됐다. 124경기 금자탑을 쌓은 투혼의 멀티플레이어 유상철은 데뷔 때부터 화려했다. 

유 감독은 서울 은평구 응암초등학교에서 처음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경신중학교와 경신고등학교를 거쳐 건국대학교를 졸업해 신인드래프트 1순위로 1994년 현대 호랑이에 입단했다. 유 감독은 어느 포지션에서나 활약할 수 있는 선수였다.

대학교 1학년때까지만 해도 공격수로 뛰었으나 1993버펄로유니버시아드대회 이후 수비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일찍부터 프로구단의 스카우트 표적이 돼왔다.

키 183cm의 탄탄한 체구에서 나오는 뛰어난 체력 덕분에 그는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위치에서 뛸 수 있는 선수로 유명했다. 스트라이커,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등 소화가 불가능한 포지션이 없는 선수였다.


K리그에서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부문에서 모두 베스트 11에 선정된 2명의 선수 중 한 명이 유 감독이다. 그를 사람들이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플레이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비수로 있으면서도 순식간에 상대 그라운드 깊숙하게 침투하는 것이 장기인 유 감독은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때 일본과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었다. 1996년 홍콩에서 열린 칼스버그컵 대회 때 비쇼베츠 감독의 선택을 받아 올림픽팀 멤버로도 활약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1위로 월드컵에 진출한 한국은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멕시코에 1대 3으로 역전패당한 한국은 2차전에서 네덜란드에 0대 5로 대패했다. 이 경기 이후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벨기에전 전반 7분 만에 뤼크 닐리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감독도 없이 치르는 경기에서 4년을 기다린 월드컵이 허무하게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또다시 4년을 기약해야 했다.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둔 적 없는 한국으로서는 한 골이 간절했다. 후반 25분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는 골이 터졌다.

왼쪽 측면에서 얻은 프리킥 기회에서 하석주가 올려준 공을 유 감독이 슬라이딩 오른발 슈팅으로 연결해 벨기에 골문을 열었다. 유 감독은 득점 후 포효했다. 한국은 이후 추가 득점을 거두지 못하며 월드컵 첫승 기회를 4년 뒤로 미뤄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국민들에게 감동을 줬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했다.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 상대가 멕시코전. 첫 번째 경기였던 프랑스전에서 0대 5 대패를 당한 뒤 최악의 분위기에서 상대하기에 멕시코는 버거운 팀이었다. 이날 선발로 나선 유 감독은 전반 경기 중 상대 선수와 경합하다가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유 감독은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한국은 후반 11분 황선홍의 선제골로 좋은 분위기를 이어갔지만 후반 36분 멕시코에 동점골을 내주면서 흔들렸다. 후반 44분 투혼의 결승골이 터졌다.

박지성의 코너킥을 유 감독이 완벽한 스파이크 헤더로 연결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당시 유 감독은 전반전부터 이미 코뼈가 골절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후에 거스 히딩크 감독은 “유상철은 가장 말을 듣지 않는 선수였다”며 “나를 벤치로 몰아내지 말라며 내 말을 끝까지 어기고선 후반전에 중요한 골을 넣었다”고 언급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건 2002년 폴란드 전 추가골이다. 황선홍이 선취골을 넣은 뒤 1대 0으로 앞서갔지만 불안한 한국팀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후반 8분, 유 감독은 강한 중거리 슈팅으로 폴란드 골키퍼 두덱의 방어를 피해 골네트를 갈랐다.

월드컵 첫 승
쐐기골 주인공

한국의 월드컵 첫 승에 가까워진 쐐기골이었고 결국 한국은 1승을 먼저 챙겼다. 

당시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휘젓던 유 감독의 세리머니는 아직도 국민들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사상 첫 월드컵 승리를 이끌었고 숙원이었던 16강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유 감독은 황선홍, 홍명보, 이운재, 안정환, 김남일, 설기현, 송종국, 이영표, 박지성 등과 함께 4강 신화를 쓰며 한국 축구사에 족적을 남겼다. 당시 히딩크는 유 감독을 김남일과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했지만 상황에 따라서 공격수나 수비수로 활용했다. 

특히 큰 활약을 펼쳤던 것은 16강 이탈리아전. 당시 한국은 0대 1로 이탈리아에 뒤지고 있던 상황. 히딩크 감독은 후반전에 수비수 3명을 빼고 황선홍, 이천수, 차두리 3명의 공격수 투입했다. 공격수 5명을 필드에 두는 전술을 쓸 수 있었던 데는 유 감독과 박지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 감독은 선발 때는 미드필더로 뛰다가 선수교체가 이뤄지면 백3의 좌측 스토퍼로, 홍명보가 빠지면 다시 중앙 수비수로 들어가 안정적인 수비수를 보였다.

결국 이날 유 감독의 활약에 힘입어 한국은 이탈리아에 2대1 역전승을 거둔다. 2004년엔 아테네올림픽에 와일드카드로 출전해 8강 진출을 돕기도 했다. 2005년까지 대표팀을 뛴 그는 성인 국가대표로만 총 124경기에 출전하는 기록을 세웠다.

유 감독은 은퇴 후 3년 뒤인 2009년 춘천기계공고에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2011년에는 대전 시티즌(현 대전 하나시티즌)을 맡으면서 프로 감독으로 데뷔한다.

유 감독은 최용수 FC서울 전 감독에게 화가 났던 일화를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털어놨다. 유 감독은 팀 사정상 즉시 전력감이 될 수 있는 선수가 필요했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최 전 감독에게 FC서울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를 추천받았다.

최 전 감독은 팀에서 출전을 잘하지 못하는 A 선수를 대전 시티즌으로 이적시켰는데 알고 보니 해당 선수는 디스크 부상이 있었던 것. 유 감독은 최 전 감독에게 부상선수라고 하자 최 전 감독은 자신도 몰랐다고 했다.

한일 월드컵 4강 ‘2002 스타’
“함께한 영광 기억하겠습니다”

훗날 유 감독은 “감독이 모르는 게 말이 되느냐”며 억울해했다. 2014년부터는 울산대학교 감독으로 경험을 쌓은 뒤 2018년 전남 드래곤즈로 프로 무대에 복귀했으나 8개월 만에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듬해인 2019년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직을 맡는다. 

유 감독은 인천 감독 선임 직전 “실패한 감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게 두렵다”면서 인천에서 재기를 노렸다. 시즌 중반부터 팀을 맡았기에 초반엔 다소 부침이 있었지만 세 경기 만에 제주 원정에서 2-1 승리를 거두면서 인천 감독으로서 첫 승리를 거뒀다. 

여름 이적 시장 동안 당시 인천의 전력강화실장이었던 이천수 실장과 함께 김호남, 장윤호, 마하지, 케힌데 등 여러 선수를 보강하면서 K리그1 생존을 위해 애썼다.

시즌은 어느 덧 종반으로 향했고 파이널 라운드가 시작됐다. 유상철호의 인천은 성남 원정에서 무고사가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넣으며 1대 0으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이날 경기가 끝나자 선수들을 비롯해 이천수 실장까지 오열하는 모습이 중계화면을 통해 팬들에게 전달됐다.

귀중한 승점 3점을 챙긴 팀의 모습치곤 묘한 분위기가 인천을 감쌌다. 이날 결승골을 넣었던 무고사도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고 경기장을 빠져나갔고 김호남도 “나중에 알게 되지 않을까”라며 자리를 피했다.

이후 유 감독은 병원에 입원하면서 잠시 훈련장을 떠났지만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다시 인천 훈련장을 찾았다. 췌장암 4기 판정 소식이 구단 공식 SNS를 통해 전해졌지만 유 감독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듯 여전히 인천 벤치를 지켰다. 

유 감독은 2019시즌 최종전 경남FC와의 경기에서 0대 0으로 비기면서 K리그1 생존을 확정했다. 유 감독은 팬들과의 약속을 지킨 사람이 됐다. 생존이 확정된 뒤 인천 팬들은 “남은 약속 하나도 꼭 지켜줘”라는 피켓을 들었다.

인천유나이티드는 유 감독이 건강상 이유로 감독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신임 감독 선임을 서두르지 않았다. 함께했던 코치진에 대한 신뢰를 보내며, 지난 1차 태국 전지훈련도 기존 코치진으로 치러냈다. 

기존 선수단과 코칭스태프와 함께 소통하고 화합할 수 있는 지도자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잡고 접근한 끝에 임완섭 신임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낙점했다.

이 과정에서 유 감독의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유나이티드 수뇌부는 새로운 감독을 찾으며 유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임 감독은 임 감독은 88학번이고 유 전 감독은 90학번으로 특별한 인연이 있다.

인천 팬들과 
약속 지켰다

과거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에도 같이 선발됐을 정도로 잘 아는 사이며 서로 안부를 묻는 친한 선후배 사이였다. 또 임 감독을 코치로 데뷔시킨 사람이 바로 유 전 감독이다. 임 감독은 “유상철 감독이 건강하게 돌아오면 언제든 자리를 내어줄 마음이 돼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감독은 지난해 6월, 7연패를 책임지며 지휘봉을 내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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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의문 해소 첫 단추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