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말 좋아하다…’ 잘리게 생긴 김우남 한국마사회장

말 좋아하더니 말로 망할 판

[일요시사 취재1팀] 차철우 기자 = 김우남 한국마사회(이하 마사회) 회장은 국회의원을 지내던 당시 국감에서도 말과 관련된 제품을 언급할 정도로 말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말 전도사’로 불렸다. 그러나 최근 의원 재직 당시 보좌관이었던 측근을 마사회 비서실장으로 취임시키려는 과정에서 폭언을 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김 회장은 취임 때부터 낙하산 인사 우려가 있다며 노조 측에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취임 직후 측근 채용 지시 의혹과 관련해 채용을 반대한 직원에게 폭언했던 녹취가 공개되며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마사회 채용 의혹과 관련해 신속한 감찰을 지시했다.

욕설, 막말…
진퇴 기로 

마사회는 대한민국에서 경마를 합법적으로 개최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다. 마사회는 1949년 회명 변경 뒤, 많은 사람들이 회장 자리를 거쳐 갔다. 

새로운 회장이 임명될 때마다 마사회는 낙하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보통 정부여당 출신 인사가 회장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마사회 내부에서 승계돼 회장이 된 사례는 지금까지 없다. 

일전에도 마사회는 낙하산 논란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 적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라인으로 분류된 현명관 전 회장 역시 박 전 대통령의 공약을 기획하고 마사회 회장직에 오르면서 논란이 됐다.


현 전 회장은 마사회에서 설립한 산하재단에서 과거 자신이 속했던 회사 출신 등을 임명하며 도마에 오른 바 있다. 김 회장 역시 회장직에 임명되자, 낙하산 회장이라는 논란이 들끓었다.

그는 17~19대까지 국회의원을 3차례나 지냈던 인물이다. 의원직을 수행하면서 그의 말 사랑은 남달랐다.

국회의원을 지내는 12년 동안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이하 농해수위) 위원을 맡으며, 말 산업 육성법 제정안을 대표발의하고 국회 통과까지 이뤄내 정부가 말 산업 육성을 지원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채용비리와 관련해서도 큰 논란을 빚었다. 말 전문가답게 김 회장의 취임으로 위기에 빠진 마사회를 구원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비서실 직원 채용 두고 담당자에 폭언
업무 미숙 질타? 대통령 직접 감찰 지시

취임식에서 김 회장은 침체에 빠진 마사회 경영 위기 극복을 위해 크게 3가지를 내세웠다. 온라인 발매의 조속한 법제화를 통한 경영위기 극복과 지속가능 경영을 위한 제도적 시스템 구축 및 내부 경영혁신을 통한 말 산업의 경쟁력 향상 등의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위기 상황을 선포했던 김 회장은 스스로 위기를 초래했다. 김 회장은 취임 뒤 인사담당자에게 자신의 의원 시절 보좌관을 비서실장으로 특별채용하라고 지시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마사회 인사담당자는 김 회장의 요청을 고사했다. 정부 지침과 관련해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김 회장은 만류하는 인사담당자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마사회는 회장이 비서실 직원을 뽑을 수 있도록 하는 내규가 존재하지만 국민권익위원회는 채용비리가 우려된다며 해당 규정을 오는 6월까지 개선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인사담당자가 해당 사실을 김 회장에게 전달했지만 그는 폭언과 욕설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인사담당자가 마사회의 상급기관인 농림부에 측근의 채용 여부와 관련해 문의했는데, 농림부에서도 측근을 채용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내로남불
측근 챙기기

이 같은 사실을 인사담당자가 김 회장에게 다시 전달하자 “그렇게 까지 할 일이냐”며 다시 폭언을 했다. 결국 김 회장은 자신의 측근을 비서실장 대신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인사담당자는 “군사 정권 시절부터 근무했던 사람인데 장성 출신 회장들에게도 이 정도의 폭언은 없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며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 

이에 대해 김 회장 측은 당사자에게 언행에 대해 사과했지만 결과적으로 채용하지 않았으니 부정채용이 아니라면서 인사담당자의 업무 미숙으로 질타했다는 입장이다.

문 대통령이 감찰을 지시하자 김 회장은 사내 게시판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말 사업이 어려운 상황에 국민께 죄송하다는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이어 자문위원으로 채용했던 측근과 계약도 해지했지만 여론은 냉소적이다. 마사회 노조는 김 회장이 채용 문제 뿐 아니라 평소에도 폭언을 일삼았다며 퇴진 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농해수위 소속 국민의힘 의원들은 김 회장의 해당 논란을 정권의 마구잡이식 낙하산 인사 시스템의 민낯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김 회장의 측근 채용에 대해 내로남불의 행태라 비판하고 있다.

김 회장은 과거 국정감사에서 공공기관 인사나 기관장들이 측근을 채용하는 것에 대해 질책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국정감사에서도 농해수위의 피감기관 농림축산식품부(이하 농림부)와 농협, 마사회에게 거침없이 비위 의혹 부분을 지적해 국정감사에서 ‘저승사자’로 불렸다. 

과거 자신이 지적한 행위 
입장 바뀌자 똑같은 만행


또 김 회장은 의원 시절 공공기관장의 채용비리를 비판하는 정책 자료집까지 발간한 이력도 있다. 공공기관 채용비리 사건을 분석한 자료집에서 공공기관은 상명하복의 구조라 내부에서 해결하기 어렵고, 직원들이 피해를 받기 쉽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마사회는 여러 논란으로 몸살을 겪고 있다. 여기에 김 회장의 의혹까지 더해져 마사회에 대한 국민인식이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감사원 조사 결과 마사회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조사 직전 기간에 지사장과 실무자를 대상으로 대책을 강구하는 회의를 개최했다. 마사회가 고객만족도 조사를 위해 마련한 대응 지침에는 마사회에 우호적인 고객을 미리 선별해 조사원의 동선에 배치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조사가 불시에 이뤄져야 함에도 마사회는 주관사로부터 조사 일정을 미리 입수하고, 조사원의 성향까지 알아냈다. 일부 마사회 지역본부에서는 조사 참가자로 직원의 가족까지 동원한 것도 사실로 드러났다. 

결국 마사회는 조작을 통해 3년 동안 고객만족도조사에서 S등급을 받았다. 먼저 조사를 받은 지사에서는 조사관의 얼굴을 CCTV로 무단으로 캡쳐해 다른 지사에 알리기도 했다.

그 결과 마사회는 해당 기관 임·직원의 성과급으로 100억원 이상을 챙겼다. 마사회는 조작 의혹을 부인했으나 지난 3월 감사원의 조사가 이뤄지자 사실을 시인했다.


마사회와 관련된 외국인 특혜 의혹도 드러났다. 마사회가 외국인 경마 도박단에게 마권 자동구매 프로그램을 통해 무제한 베팅이 가능하게 하는 등 많은 특혜를 제공했고, 서울 워커힐 화상 경마장에서 200억원이 넘는 외화도 유출됐다는 의혹이다.

사고친
낙하산

감사원이 지난 2019년 가장 많은 마권이 발행된 경주를 분석한 결과, 마감 5분 전 내국인은 1분당 마권 1매를 구매한 반면 외국인은 분당 15매 구매가 가능했다. 외국인이 내국인에 비해 베팅에서 유리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내국인은 일반 발매 창구나 무인 발매기에서 순서를 기다려 순서대로 마권을 구매하지만, 외국인 경마 도박단은 각각 배치된 마사회 직원을 통해 무제한 베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사회가 내국인을 차별했다는 논란이 일자, 오는 5월부터 해당 경마장이 폐쇄되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국고를 유출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위기가 지속되자, 김 회장은 온라인 마권 판매 허용 법제화를 제시했지만 쉽지 않을 전망이다. 김 회장이 마권 온라인 판매 카드를 꺼내고, 21대 국회에서도 여·야 의원들이 마사회의 온라인 마권 허용을 뼈대로 한 법안을 4건 발의 해 힘을 보탰지만 해당 법안은 국회 소관위에서 계류 중이다. 

마사회 주무부처인 농림부가 온라인 마권 판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열린 임시국회 농림부 소위원회에서 의원들과 농림부 차관의 설전이 오갔지만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농림부의 입장은 경마사업은 여전히 국민들에게 사행성이 강하다는 이유와 마사회에서의 잡음이 끊이지 않는 점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또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도 온라인 마권 발매가 이뤄진다면 청소년 보호 문제와 경마 영상이 실시간으로 송출될 가능성이 우려된다며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김 회장의 취임 전부터 코로나19 여파로 마사회는 이미 심각한 경영위기 상태다. 마사회의 매출은 1949년 설립 뒤 6·25 전쟁 때를 제외하고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첫 적자를 기록했다. 마사회 잠정 집계에 따르면 2020년 매출은 1조850억원, 순손실은 4380억원이다. 

2019년 매출 7조4000억원과 비교했을 때와 크게 감소했다. 마사회는 현재 무관중으로 경마를 진행하고 있지만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고 있다.

김 회장의 취임 이후 마사회와 말과 관련된 사업의 위기 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마사회 전체까지 위기감이 조성된 와중에 국민의 신뢰까지 회복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김 회장은 취임사에서 “농부가 땅을 키우는 마음으로 국민 친화적인 사업 발굴과 민간 경쟁력 강화, 농·어촌 경제 활성화를 위해 국민을 섬기고 국민과 함께하는 말 산업 육성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마사회와 말 산업을 하는 많은 경영자들은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말 전문가 김 회장은 취임으로 한껏 기대감이 높았으나 찬물을 끼얹은 상황이 됐다. 김 회장의 사과와 감찰 결과를 수용하겠다는 말에도 여론은 부정적이다. 

여론은 하루 만에 김 회장과 관련해 대통령이 감찰을 지시한 것에 대해서는 이례적이라는 반응이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는 중 다시 악재가 발생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레임덕 현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지시한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온다.

엎친데
덮쳤다

한국주택토지공사(LH)를 비롯해 공기관·공기업의 비위, 인사 문제는 여느 정권에서도 끊어낸 적이 없다. 마사회 뿐 아니라 다른 공기업의 문제까지 즉각 해결하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차철우 기자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정권 바뀌어도…
마사회 과거 논란은?

마사회 관련 논란은 과거에도 들끓었다. 새로운 정부가 탄생할 때마다 정권은 마사회 비리 척결을 앞세웠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문 대통령 역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총리 재직시절 마사회의 비위 문제를 끊어내라고 강력하게 지시한 적 있다.

마사회는 과거 동물보호법 위반 논란, 박 전 대통령 정권 당시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마방 이용 특혜 의혹 등을 겪은 바 있다.

마사회에서 경주마로 달린 뒤 은퇴 한 경주마 ‘승자예찬’은 폐사 처리했다던 이야기와 다르게 도살되는 영상이 공개됐다.

법률상 경주마도 가축이기 때문에 도축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이 과정에서 학대가 있었다는 의혹이다. 마사회는 경주마의 은퇴 프로그램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지만 정확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정유라 마방 이용 특혜 의혹도 논란으로 번졌는데 과거 정유라의 개인 훈련을 위해 마방과 훈련장 이용에 특혜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또 박 전 대통령 시절 마사회에서 1560억짜리 중장기 발전 계획을 작성하고, 24억을 들여 정유라가 있던 국가대표 승마단을 지원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전해진다. 

마사회의 이 같은 행태에 정권이 바뀌어도 개혁은 이뤄지지 않고, 자신의 사람만을 앉히는 행위만 지속된다면 공기관·공기업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차>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