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재료 이력서> (37·38) 파, 표고

귀하지 않지만 몸에 좋은…

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식재료 이력서>엔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 파 ⓒpixabay

문득 육체 노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순간들이 생각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면 영락없이 파김치가 됐던 상황들 말이다.

파김치가 되다, 파김치가 익으면 단단했던 파의 기다란 줄기가 축 늘어진다는 이유로 그에 빗대어 ‘사람이 몹시 피곤하고 기운이 다해 사지가 늘어지고 나른해지다’라는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언제부터 사용됐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이런 이유로 고문서를 뒤지던 중에 흥미로운 글을 발견하게 된다.

이덕무의 시문집 <청장관전서>에 실려 있다.

脚軟如葱葅(각연여총저)

脚軟(각연)은 ‘다리가 연약하고 무력하여 서거나 걷기 곤란한 증상’을, 如(여)는 ‘처럼’을 그리고 이어지는 葱(총)은 ‘파’, 葅(저)는 ‘김치’를 의미한다.

위 문장은 ‘파김치처럼 다리에 힘이 쭉 빠졌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 조상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하필이면 파에 비유했고 또 언제부터 파를 김치로 담가 먹었던 것일까.

첫 번째에 대한 해답은 이규보의 시문집에서 구해본다.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다.

萬疊山深嵐翠重(만첩산심람취중)
만 겹 깊은 산 푸름 이내 짙으니
恰如瓊壁立靑葱(흡여경벽립청총)
석벽은 푸른 파가 서 있는 듯하네 

瓊壁(경벽)은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옥으로 된 벽’이다.

이를 확대 해석하면 옥처럼 푸른 빛을 띤 봉우리 즉 푸르게 깎아지른 산봉우리를 의미하는데 그 모습이 푸른 파(靑葱)와 같다고 했다. 

즉 우리 선조들은 파를 기세등등한 채소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무 따위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을 살피며 울울총총(鬱鬱蔥蔥)이란 말이, 이어 ‘파김치가 되다’라는 표현이 생겨난 것이다.

참고로 蔥(총) 역시 파를 지칭한다.

다음은 식품의 보조 재료인 파를 언제부터 김치로 담가 먹었느냐에 대한 의문이다.

아쉽지만 파김치는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데 이를 감안하면 파로 김치를 담가 먹은 시점은 상당히 늦은 듯 보인다. 

그런데 왜 우리 조상들은 파를 즐겨먹었을까.

그 해답을 이응희의 작품 ‘파’(葱, 총)에서 찾아보자.

味苦溫腸胃(미고온장위)
맛은 매워 장과 위 따뜻하게 하고
津甘補腎陰(진감보신음)
진액은 달아 신장 기능 도와주네
田翁長取食(전옹장취식)
시골 늙은이 오랫동안 먹으니
居下病難侵(거하병난침)
미천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네


이응희에 의하면 파가 신장 기능을 도와준다고 했다. 신장 즉 콩팥의 기능에 대해 살펴보자.

서울대학교병원 신체기관정보에서 인용한다.

「첫째는 대사 산물(중간 산물) 및 노폐물을 걸러서 소변으로 배출하는 배설 기능, 둘째로 체내 수분량과 전해질, 산성도 등을 좁은 범위 안에서 일정하게 유지하는 생체 항상성 유지 기능, 셋째로 혈압 유지, 빈혈 교정 및 칼슘과 인 대사에 중요한 여러 가지 호르몬을 생산하고 활성화시키는 내분비 기능을 한다.」

이를 살피면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파김치로 변한 몸을 파김치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결국 결자해지 차원에서, 파김치 상태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는 파를 즐겨 먹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파를 서거정이 놓칠 리 없다. 

그의 작품 ‘파’(葱, 총)이다. 

五葷人所戒(오훈인소계) 
사람들은 오훈 경계하는데
我病不能無(아병불능무) 
나는 병으로 먹지 않을 수 없네
箇箇黃金本(개개황금본) 
하나 하나가 황금 뿌리 같고
鬆鬆白雪鬚(송송백설수) 
더부룩한 게 흰 눈 수염 같네
多功扶藥餌(다공부약이) 
약으로 도움 준 공도 많고
有味助庖廚(유미조포주) 
맛있어 식탁에 입맛 돕네
三斗誰能食(삼두수능식) 
누가 세 말 먹을 수 있나
鹽梅小所須(염매소소수) 
염매보다 덜 필요하네

五葷(오훈)은 자극성이 강한 다섯 가지 채소를, 鹽梅(염매)는 앞서 매실에서 등장했듯 소금과 매실을 지칭한다.

내친김에 쪽파를 노래한 김창업의 작품을 감상해본다.

水晶葱 俗名紫葱(수정총 속명 자총) 
수정총, 속명은 자총이다

有號水晶葱(유호수정총)
수정총이라 불리는 게 있으니
葱葉而蒜根(총엽이산근)
파 잎사귀에 마늘 뿌리네
此物爽人口(차물상인구)
이 물건 입 시원하게해주고
可同葷臭論(가동훈취론)
동시에 매운 냄새도 지니고 있네 

‘파김치’로 변한 몸은 ‘파김치’로 해결
황제의 반찬에서 ‘덜 귀한’ 음식으로

표고

표고를 논하기 전에 버섯의 종류를 살펴보자.

능이, 송이, 석이, 목이. 팽이, 양송이 등 거의 모든 버섯을 ‘이’라 지칭한다.

귀를 의미하는 耳(이)가 귀뿐만 아니라 버섯처럼 귀 모양을 지니고 있는 물체를 지칭하기 때문으로, 그런 이유로 버섯을 ‘이’로 지칭했다.

그런데 표고는 ‘이’라 하지 않고 표고(蔈菇)라 명명하고 있다.

왜 여타의 버섯처럼 ‘이’라 하지 않고 표고란 독특한 이름을 지니고 있을까. 

참고로 뽕나무에서 자라는 상황(桑黃)버섯은 현대에 들어 ‘누런 뽕잎’을 살피며 붙인 이름으로 결국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했던 버섯들은 거의 모두 ‘이’로 지칭된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를 염두에 두고 표고란 이름에 접근해보자.

표고의 蔈는 능소화를 菇는 버섯을 지칭한다.

능소화는 시들 때까지 피어있지 않고 절정의 시기에 스스로 꽃을 떨군다.

이런 특성 때문에 명예를 상징하는 꽃이다.

표고(蔈菇)는 능소화 같은 버섯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표고가 가장 귀하게 대접 받았다.

실례를 들어보자.

조선왕조실록 문종 즉위년(1450년) 10월2일의 기록이다.

우부승지 이숭지에게 명해 두 사신에게 문안하게 하니, 윤봉이 말하기를 “원컨대 표고를 얻어 황제에게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버섯은 나무에서 나는 것인데, 세속에서 이를 표고라 한다)
命右副承旨李崇之, 問安于兩使臣, 尹鳳曰: "願得蔈古, 以獻于帝." 
(菌之生於木者, 俗謂之蔈古)

蔈古의 古는 菇의 약자로 보이는데, 윤봉은 조선 출신 명나라 환관으로 당시 명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 중이었다.

명나라 황제에게 표고를 바치고자 하는 그의 충정과는 별도로 표고가 황제의 밥상에 올라가는 귀한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기 글 마지막 부분이 흥미를 끈다.

‘버섯은 나무에서 나는 것인데, 세속에서 이를 표고라 한다’라는 대목이다.

이를 살피면 조선 초까지 모든 버섯을 표고라 지칭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까지 일어난다. 

그런데 표고가 현대에 들어 능이, 송이, 석이, 목이에 비해 덜 귀하게 취급받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인공재배에 있다.

표고는 인공재배가 가능하고 또 오래전부터 인공 재배됐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역시 조선왕조실록 영조 시절 기록을 간략하게 요약해본다.

영조 시절 부역을 위해 제주도에서 올라온 노비 중 한 사람이 영조에게 표고를 바치면서 아뢴 말이다. 

“신 등이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 가운데 살면서 자주 흉년을 만났지만, 굶어 죽는데 이르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우리 성상께서 곡식을 옮겨 구휼하신 은혜에 말미암았으니, 신 등이 비록 지식은 없으나 어찌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마저 없겠습니까?”

이에 감복한 영조는 이 노비가 바친 표고를 인원왕후(아버지 숙종의 계비)의 빈전에 바치도록 한다.

이 일로 당사자인 노비는 자신을 포함해 아들과 손자들 모두 영원히 천인 직을 면하는 보상을 받게 된다.

여하튼 표고가 영조 시절 구황작물로 이용됐듯이 오래전부터 인공재배가 가능했다.

이에 따라 일반에게 가장 손쉽게 가까이 가게 되면서 덜 귀한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이를 살피면 단지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귀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표고가 은근히 애처로워진다.

그러나 표고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섭취한다면 그 만족감은 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표고라는 이름 자체에 버섯이 내재돼있으므로 표고버섯이 아닌 표고로 지칭함이 옳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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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