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그렇게 떠나간 고 최숙현의 한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0.07.13 11:23:56
  • 호수 12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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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녀를 죽였나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였던 최숙현 선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으로 드러난 소속팀 감독과 동료들의 가혹행위.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메시지가 그간의 고통을 방증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고 최숙현 트라이애슬론 선수

고 최숙현 선수의 유족은 지난 1일, 팀 관계자들이 최 선수를 폭행하는 과정이 담긴 녹취록을 공개했다. 지난해 3월 뉴질랜드 전지훈련 당시 녹음된 것으로 보이는 이 녹취록서 팀 닥터 안주현씨는 “나한테 두 번 맞았지? 너는 매일 맞아야 돼” “그냥 안 했으면 욕먹어” 등의 말을 내뱉으며 20분 넘게 폭행을 이어갔다. 이어 최 선수의 선배로 추정되는 선수를 호명해 “너는 아무 죄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뺨 때리기를 비롯해 신체를 폭행했다.

“너무 미안하다” 
안타까운 죽음 

김규봉 경북 경주시청트라이애슬론 팀감독 최 선수에게 폭행을 가하던 안씨에게 “선생님, 한 잔 하시고 하시죠. 콩비지찌개 제가 끓였습니다” 등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이들은 술을 마시며 최 선수의 뺨을 20회 이상 때리고 가슴과 배를 발로 차며 머리를 벽에 부딪치게 밀쳤다.

녹취록에는 안씨가 “이빨 깨물어. 뒤로 돌아”라며 최 선수를 세운 뒤 폭행하는 소리도 담겨있다. 감독이 “죽을래? 푸닥거리 한 번 할까?”라는 말로 최 선수를 위협하자 최숙현 선수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는 음성도 담겨있었다.

유족은 전 소속팀 경주시청서 상습 폭행과 괴롭힘, 갑질 등을 당하며 선수 인생이 무너져 내렸다고 주장했다.


최 선수는 극단적 선택 전날 대한체육회 조사관과 전화 통화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 선수의 생전 마지막 목소리가 담긴 이 통화는 10여분간 이어졌다. 관련 기관 여섯 군데에 도움을 요청했던 최 선수는 이 통화서 가해자 측이 반박 증거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난 7일 YTN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날인 지난달 25일, 오전 훈련을 마친 최 선수가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 조사관과 나눈 대화 녹취록을 입수해 공개했다. 대한체육회는 녹음된 분량의 전부라며 2분36초만 제공했다.

최 선수는 해당 통화서 “(경주시청팀 관계자들이)저희한테도 항상 비행기값이라고 하고 돈을 걷어갔지, 훈련비로 쓸 거라는 말을 한 적도 없었어요. 알고 보니까 시청서 비행기값을 다 대줬었다”고 말했다. 이후 경찰 출신 여성 조사관은 최 선수에게 “다른 선수들은 진술서를 저쪽서 다 받았더라고요, 반박할 증거가 있다면 그걸 보내줘요”라고 했다.

체중 감량 관련 폭언·폭행 일삼아
팀 닥터, 치료해준다며 상습 성추행

여성·청소년을 전문적으로 수사했던 경찰 출신 여성 조사관의 꼼꼼한 증거자료 요구에 최 선수는 목소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통화 초반 열심히 가해자의 잘못을 설명하던 최 선수는 통화가 길어지면서 낙담한 것으로 보인다.

최 선수는 “그런 게(반박 증거자료) 없어요, 지금 저희한테”라고 말했고, 조사관은 “기소라든지 불기소 의견 통지를 받은 거 있으면 그걸 보내주고”라고 재차 증거자료를 요구했다. 이에 최 선수는 “대구지검으로 넘어간다는 그 연락밖에 안 받았어요”라고 했다.

조사관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몇 회에 걸쳐서 얼마를 입금한 것을 정리해서 주시고, 비행기값이라고 해서 보내준 부분에 대해서 추가 증거로 할 수 있는 자료 있으면 보내줘요”라며 앞으로 자주 통화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 고 최숙현 선수를 괴롭혔던 것으로 알려진 해당 감독과 선수 ⓒ문병희 기자

조사관은 “어렵게 선택을 해서 진정까지 했는데 이 부분을 제대로 조사할 수 있게끔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연락이 조금 어렵더라도 자주 연락을 하고 내가 전화하면 잘 받고 그러세요”라며 통화를 마쳤다. 조사관의 당부에 최씨는 “네”라는 대답만 반복했다. 

최 선수는 체육회 측과 통화 다음 날인 지난달 26일 지인과 가족에게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달라”는 메시지를 보낸 후 숙소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최 선수는 지난 4월 경주시청 소속 선수 및 관계자로부터 폭행과 폭언을 당했다고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 신고했다.

최 선수가 지난해 1월부터 4월까지 작성한 일기장과 운동 기록에는 폭언과 폭행에 대한 압박감이 담겨있었다. 최 선수는 ‘마음이 불안하다. 집중할 곳이 필요해 글 쓰는 걸 선택해봤다’ ‘힘들 때 생각들을 정리해보려 한다’며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이유도 적었다.  

사망 전날
조사관과 통화

지난해 1월 최 선수가 남긴 글에선 우울한 기색이 없다. 당시는 최 선수가 스트레스로 약 1년간 운동을 쉰 후 실업팀으로 다시 복귀했을 때로, 다시 운동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 담겨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화려하게 트라이(트라이애슬론) 복귀해보는 거야! 남들 말 신경 쓰지 말고!’ ‘나는 내 목표를 이룰 거야’ ‘숙현아 넌 할 수 있어 힘내자!’ 등이 그것이다. ‘1월의 마지막 날 행복하게 마무리했다’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최 선수는 같은 해 2월부터 스트레스가 심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살이 쪘다는 이유로 폭언을 들었다는 내용이 다수 적혀있다. 2월 초 최 선수는 ‘멘탈 솔직히 와장창… 다 모르겠다 나는 뭐지, 몇 백 그램 안 빠진 거로 이렇게까지 욕먹을 일인가’라는 글을 남겼다.

이후에도 ‘오늘 억울 그 자체. 물먹고 700g 쪘다고 욕먹는 것도 지친다’ ‘체중 다 뺐는데도 욕은 여전’  ‘K에게 욕먹었지만 어쩌겠어’ 등의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3월 일기에도 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운동하는데 사람을 버젓이 앞에 두고 욕을 하냐. 적당히 해 진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았다. 이 팀은 아니다’ 등이다.
 

▲ 추가 피해진술하는 고 최숙현 선수의 동료들 ⓒ문병희 기자

이 시기 녹음된 파일엔 감독과 안씨가 최 선수에게 “이를 꽉 깨물라” “벗어”라며 약 20분 동안 폭행·폭언하는 정황이 담겼다. 이후 최 선수는 ‘하루하루 눈물만 흘리는 중. 조금은 무뎌질 수 있을 줄 알았다’ ‘감독 선배들은 자기들 아픈 건 엄청 아픈 거고 나는 아파서도 안 되는 건지 서럽고 서러운 하루다. 다 엎어버리고 싶다’는 글을 남겼다.  

추가 폭로
녹취록 공개

일기장엔 구체적인 가해 선수의 이름도 등장한다. 최 선수는 ‘A는 대놓고 욕하는 건 기본이고 사람을 어떻게 저렇게 무시하지’라는 글을 남겼다. 최 선수와 같은 팀에 소속됐던 동료 선수는 “A 선수는 국가대표 출신으로 실력이 뛰어나 감독·팀 닥터도 쉽게 건들지 못하는 선수”라며 “A 선수가 폭력적인 분위기를 주도했다”고 말했다.


최 선수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힘들다고도 토로했다. ‘아직도 너희를 보면 옛날의 일들이 다 생각난다. 잊히지 않는다. 잊고 싶다’는 내용이다. 같은 팀에 몸담았던 동료 선수는 “2016년 김 감독과 안씨가 최 선수 등에게 토할 때까지 빵을 억지로 먹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동료 선수는 “팀 닥터는 최 선수가 없는 자리서 ‘내가 그 선수를 극한으로 몰고 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해주겠다’는 말도 했다”고 전했다. 또 이 선수는 “선배 선수도 ‘너 뒤져라’ 등 발언을 자주 했다”며 “선배 선수가 나를 옥상으로 끌고 가 뛰어 내리라고 협박한 적도 있다. 나는 이들의 폭언과 폭행 때문에 팀을 옮긴 상태”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추가 피해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다. 최 선수의 동료 B씨는 팀 닥터라 안씨가 폭언·폭행과 더불어 상습적인 성추행을 해왔다고 증언했다.

8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B씨는 “팀 닥터는 치료 목적으로 마사지를 하는 와중에 허벅지 안쪽으로 과하게 손을 뻗어 만지거나, 2018년 홍콩 대회서 허리 부상을 입었는데, 치료를 해준다며 가슴을 만졌다”고 증언했다.

이어 “(운동선수로서 팀 닥터의 행동이)의아하긴 했지만 의견을 못 내는 상황이라 말하지 못했다”며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의를 제기하면)여러 가지 보복이 있을 것 같아 두려웠다”고 설명했다.

감독마저 해외전지훈련비 유용 의혹
6군데 도움 청했지만…증거 불충분


앞서 최 선수의 동료 선수들은 지난 6일 국회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의 감독과 팀 닥터인 안씨, 주장 선수에 의한 추가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팀 닥터인 안씨가 자신을 대학교수라고 속이고, 치료를 이유로 가슴과 허벅지를 만지는 등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해당 기자회견에 증언자로 나섰던 최 선수의 동료 선수 B씨는 이날 이후 공황장애 약을 복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회견 이후 언론 접촉을 피해왔다는 B씨는 가해자들의 뻔뻔함에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B씨는 라디오 인터뷰 끝에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B씨는 “기자회견 후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했음에도 힘든 부분은 있다”면서도 “그래도 숙현이의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 것 같아서 후련한 마음도 있다”고 전했다.
 

▲ 고 최숙현 선수

그뿐만 아니라 김 감독의 전지훈련비 유용 의혹도 불거져 나왔다. 경북경찰청 관계자는 지난 8일 김 감독을 포함한 경주시청 소속 일부 실업팀 감독이 매년 해외 전지훈련비를 유용한 혐의를 잡고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경찰은 김 감독이 지난해 1월19일부터 3월4일까지 45일간 뉴질랜드 오클랜드서 진행된 ‘해외 전지훈련’ 직전 C 여행사에 훈련비 8200여만원을 보낸 뒤 일부를 역송금 받아 개인적으로 착복한 의혹이 제기돼 수사 중이라고 덧붙였다.

경북도체육회 관계자는 “이 같은 해외 전지훈련비 유용사례는 경주시체육회 내부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사법당국의 철저한 진상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김 감독은 최 선수에게 해외 전지훈련에 앞서 본인의 왕복 비행기 항공료를 지원하라고 강요했으며, 최 선수가 이를 수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 경주시체육회 한 간부는 “해외 전지훈련 역송금 사례는 지난해 문제가 됐었다”며 “당시 훈련비 유용이 재발하지 않도록 지시했었다”고 말했다. 지난 6일 국회서 열린 동료 선수들의 기자회견장서도 선수들은 “해외 전지훈련비 명목으로 개인당 100만원씩 갹출했다”고 폭로했다.

“방치도 
가해다”

한편 최 선수가 한때 소속돼있던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내 괴롭힘 피해 사례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경북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날 전·현직 선수 27명 가운데 15명을 상대로 피해 진술을 받은 데 이어 2명에 대해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대부분 김 감독, 안씨로부터 폭행 등을 당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김 감독이 대한철인3종협회서 영구제명돼 그동안 피해 진술을 하기 꺼리던 선수들에게 태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스포츠 가혹행위 흑역사

‘최숙현 사건’과 관련해 스포츠계 고질병인 폭력과 가혹행위가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올랐다. 이전부터 일어난 가혹행위에 대해 정리했다.

▲빙상 = 조재범 쇼트트랙 코치가 심석희 선수에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상습적인 폭언과 폭행을 한 사실이 2019년 1월8일 심석희 측 법률 대리인을 통해 알려져 충격을 안겼다.

심 선수는 2018년 12월17일 조 전 코치에 대한 성폭행 관련 고소장을 경찰에 제출했다.

그해 1월 조 코치는 훈련 중 심석희 선수를 주먹으로 수차례 때려 전치 3주의 상처를 입히고 2011년부터 4명의 선수를 폭행한 혐의로 기소당했고, 그해 10월 1심 재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사건 이후 젊은빙상인연대는 다른 국가대표 빙상선수들도 성폭행과 성추행, 성희롱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유도 = 전 유도선수 신유용씨를 성폭행하고 강제 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직 유도 코치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전주지법 군산지원 제1형사부는 지난해 7월18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전 유도코치 손모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또 8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와 5년간 신상 정보 공개, 10년간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 제한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며 허위 진술할 이유가 없고, 증인들의 진술도 이에 부합해 모든 혐의가 유죄로 인정된다”며 “성적 가치관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어린 학생을 상대로 성범죄를 해 죄질이 나쁘고 피해 회복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고 있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피의자가 동종 범죄 전과가 없고 강제 추행 사실은 인정하는 점을 고려해 양형을 정했다”고 밝혔다.

▲프리스타일 스키 =  지난 2018년에도 프리스타일 스키 모굴의 최재우 선수가 음주 및 폭행, 추행 등의 이유로 대한스키협회에서 영구제명됐다. 대한스키협회는 “3월12일 협회 스포츠공정위원회를 통해 최재우와 김지헌의 영구제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최재우과 김지헌은 3월 초 일본 아키타현 다자와코서 열린 국제스키연맹(FIS) 프리스타일 월드컵 모굴 경기에 출전했다.

이들은 대회 기간 술을 마셨고, 숙소에 들어와 함께 출전한 여자 선수들을 상대로 술을 같이 마실 것을 요구하는 과정서 폭행 물의를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매체에 따르면 최재우 선수는 여성 동료들의 몸 일부를 만지는 등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현장에 달려갔던 스태프는 “여성 선수들의 비명을 듣고 달려가 이들을 격리했다”고 밝혔다.

▲여자축구 = 여자실업축구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사령탑 시절 선수단 관계자를 성추행해 계약이 해지됐던 하금진 전 감독이 축구계서 퇴출당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스포츠공정위원회가 하금진 전 감독에 대해 최고 수위 징계인 제명 처분을 지난해 4월 내렸다.

이에 따라 하 전 감독은 감독을 비롯한 지도자를 맡지 못하는 축구계서 완전히 퇴출당한 것.

현행 축구협회 징계 규정은 성추행 지도자에 대해 ‘자격정지 3년 이상에서 제명’까지 하도록 돼있다.

하 감독은 2018년 9월 경주 한수원 사령탑 재임 시절 선수단 소속의 A씨를 성추행했고,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계약 해지를 당했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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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의문 해소 첫 단추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