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총선 결과를 두고 대기업들의 표정이 엇갈리고 있다. 안도와 한숨이 교차되는 분위기다. 과거 질긴 악연이 있는 전 의원이 다시 ‘금배지’를 달아 골머리를 앓고 있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그동안 신경 쓰이게 했던 의원이 낙선해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기업도 있다. 또 의원 상당수가 교체된 만큼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해 벌써부터 줄을 대느라 분주한 기업까지 눈에 띈다.
‘대기업 저격수’노회찬·심상정 투톱 국회 재입성
재벌개혁 주도 박영선·최재성·이용섭 행보 주목
“괜히 긴장했습니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가 싱겁게 막을 내리자 모 기업 관계자가 내뱉은 말이다. 후끈 달아올라야 할 국감장은 미지근하다 못해 서늘했다. 뻔한 질문에 뻔한 답변들이 오갔다. 그때뿐만 아니라 지난 4년 내내 ‘혹시나’했던 기대는 ‘역시나’로 끝났다. 몇몇 의원들이 재벌들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지만 새 정보 없이 기존의 논란거리를 재탕 삼탕 우려먹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18대 국회는 ‘재벌 저격수’들의 부재가 여실히 드러났었다. 그만큼 17대 국회에서 활동했던 재계의 숙적들의 빈자리가 더욱 커 보였다.
19대 총선이 끝났다. 당락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서민들이 반길만한 두 인물이 주목받고 있다. 통합진보당의 ‘쌍두마차’ 노회찬 당선자(서울 노원병)와 심상정 당선자(경기 고양 덕양갑)다. 노 당선자는 57.2%의 지지율을 획득, 허준영 새누리당 후보(39.6 %)를 큰 격차로 앞서며 당선됐다. 심 당선자는 개표 완료 직전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초접전을 보이다 49.4%의 지지율로 손범규 새누리당 후보(49.2%)를 제치고 신승했다.
4년 만에 국회에 재입성한 이들은 17대 국회 임기 내내 재벌그룹들의 치부를 과감히 들춰냈다. 특히 국감 때마다 화끈한 폭로와 뜨거운 이슈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노 당선자는 재계에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는 ‘거포’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삼성 저격수’로 통한다. 그는 2005년 ‘삼성 X파일’ 논란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해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후에도 대기업들의 비정상적인 경영 실태를 질타하는 등 줄곧 삐뚤어진 재벌그룹들의 행태를 꼬집어 화제를 모았다. 심 당선자도 재계를 벌벌 떨게 한 ‘대기업 저승사자’로 불린다. 그는 대기업 지배구조, 경영권 세습, 각종 비리 등을 문제 삼아 재벌그룹에 날선 비판을 퍼부은 바 있다. 이들은 당선이 확정된 후 첫 일정으로 노동자들을 찾아 시선을 모았다.
노 당선자는 4월12일 새벽 1시 한일병원 식당 노동자들의 점거투쟁현장을 찾아 “한일병원 고용승계 문제 해결에 통합진보당 차원에서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심 당선자는 이날 오전 서울 대한문 옆에 위치한 쌍용차 22번째 희생자 분향소를 방문했다. 노회찬-심상정 투톱의 등장에 재계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당장 출자총액제한제와 순환출자 문제가 걸린다.
야권연대는 출총제 부활과 대기업 계열사 간 순환출자 금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대기업들로선 여간 부담스런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두 법이 수정되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고 지배구조를 다시 짜야 하기 때문이다. 19대 국회가 시작되면 노회찬, 심상정 등 친노동 성향의 의원들이 출총제와 순환출자 카드를 곧바로 꺼내들 가능성이 높다는 게 재계 관계들의 전언이다.
미지근했던 18대
19대 달아오른다
노회찬-심상정 못지않은 ‘재벌 저격수’ 박영선 의원도 19대 국회에서 볼 수 있게 됐다. 박 의원은 구로을 지역구에서 61.9%의 지지율로 강요식 새누리당 후보(35.1%)를 크게 따돌렸다. 3선 째다. 민주통합당의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인 박 의원은 17대 국회 때 금산분리법을 주도하고 18대에선 일반지주회사의 금융회사 지분 보유를 허용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를 저지하는 등 꾸준히 대기업을 비판하며 재벌개혁을 주도해왔다.
박 의원은 올초 화두로 재벌개혁을 제시했었다. 공약에도 이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는 “이제 재벌개혁은 올 한 해 총선과 대선을 관통하는 99% 서민과 중산층의 화두”라며 “특히 재벌총수 사면금지 등을 포함한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신속하게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국민적 합의 없이 통과된 재벌 특혜 의혹이 있는 법안은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동영·강기갑·이종구… 낙선에 쾌재 부른 기업도
반재벌 의원들 동향 예의주시 정보력 총동원 사전 정보수집
실제 최 의원은 2010년 정부가 제2롯데월드 건설을 허가하자 이를 둘러싼 각종 의혹들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그는 “롯데 총괄사장에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동기동창이 취임한 것이 석연치 않다”며 “제2롯데월드가 MB정권의 신정경유착이 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이용섭 민주통합당 의원도 재선에 성공했다. 이 의원(74.7%)은 광주 광산을 지역구에서 황차은 통합진보당 후보(25.3%)를 여유롭게 따돌렸다. “1%의 이익을 위해서 99%가 희생되는 경제시스템은 더 이상 지속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한 이 의원은 민주통합당 정책위의장을 맡아 당의 재벌개혁을 총괄 조정하고 있다.
사사건건 제동 걸 듯
각 기업들 바짝 긴장
그는 지난달 총선을 앞두고 당을 대표해 ▲경제력 집중 완화(출총제 재도입, 순환출자 금지, 지주회사 행위규제 강화, 금산분리 강화) ▲불공정 행위 엄단(담합·납품단가 부당인하·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 기업범죄 유전무죄 풍토 쇄신) ▲사회적 책임 강화(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 강화, 공공부문부터 중소기업 보호 강화, 사회적 책임 공시제도 도입, 대주주 전횡 방지 및 소수주주의 보호) 등이 담긴 ‘재벌 개혁 3대 전략과 10대 정책과제’를 발표한 바 있다.
각각 3선과 재선에 성공한 강창일, 박민식 의원은 앞으로 재벌 저격수로 활약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꼽힌다.
강창일 민주통합당 의원(43.4%)은 제주 제주시갑에서 현경대 새누리당 후보(39.1%)를 누르고 3선에 성공했다. 강 의원은 대기업들의 이익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해체를 주장한 적이 있다.
그는 지난해 8월 국회 지식경제위원회가 주최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 공청회에서 허창수 전경련 회장을 향해 쓴소리를 쏟아내 시선을 끌었다. 강 의원은 당시 전경련의 로비 문건 파문과 관련해 “전경련을 전국경제인로비연합회로 바꿔야 한다”며 “전경련이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 만큼 해체하는 게 국민경제나 재계를 위해서도 낫다”고 비판했다.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52. 4%)은 부산 북구강서구갑에서 전재수 민주통합당 후보(47.6%)와 접전을 벌이다 재선에 성공했다. 박 의원은 2008년 법무부 국감에서 무차별적인 재벌총수들의 사면을 문제 삼으며 ‘회장님 구하기 7대 비책’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끌면서 무마시키기 ▲불구속 수사 요구 ▲영장 기각 ▲집행유예 ▲법정구속 피하기 ▲구속집행정지 노리기 ▲사면 등 7단계 사면 순서를 나열하면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등을 예로 들었다.
또 지난해 8월 ‘기업의 사회적 책임’ 공청회에선 정몽구 회장을 도마에 올리기도 했다. 박 의원은 “정 회장이 2006년 비자금 관련 공판 과정에서 7년 동안 8400억원의 사재 출연을 약속해 놓고 6년이 지나도록 지키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재계는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만 없는 노릇이다.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자체 안테나를 여의도에 맞추는 등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다.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해 저마다 정보력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
국내 굴지의 기업마다 직원을 붙여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각 의원들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대부분 대관업무 담당자들을 국회에 상주시키는 등 일찌감치 방어 태세를 갖췄다는 후문이다. 의원실 탐색은 기본, 줄을 대기 위한 정보전도 뜨겁다. 흡사 정보기관의 첩보활동을 방불케 한다.
일부 대기업이 이미 검찰·경찰·국정원 등 수사·정보 인력을 대거 영입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재계 관계자는 “노회찬, 심상정 등 반재벌 성향의 의원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해 그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19대 국회가 시작하기 전까지 사전 정보수집을 통해 표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파악해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대기업 한 임원은 “대선이 있는 연말로 갈수록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야당의 공세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일단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수를 넘어 안도하는 분위기지만, 대선을 앞두고 여당도 서민정책을 내세울 게 뻔해 언제까지 안심할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대기업 때리기’에 앞장선 의원들이 낙선해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기업도 있다. 정동영, 강기갑, 이종구 등이 그 주인공.
정동영 민주통합당 후보(39.3%)는 강남을에서 김종훈 새누리당 당선자(59.5%)를 상대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정 후보는 지난해 노동계의 최대 이슈였던 한진중공업 해고 사태 해결을 위해 정치생명까지 걸어 큰 화제를 모았다. 그는 청문회에 출석한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에게 “해고는 살인이다. 조 회장은 사람을 죽였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또 대기업들에 혜택이 돌아가는 한미FTA의 폐기를 주장해왔다.
경남 사천·남해·하동에 출마한 강기갑 통합진보당 후보(24.1%)는 여상규 새누리당 당선자(55.4%)와 이방호 무소속 후보(24.6%)에 밀려 3위에 그쳤다. 강 후보는 두말할 나위 없는 반재벌 인사다. 그는 항상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의 현장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해왔다. 지난 17·18대 국회에서도 그랬다. 대기업들의 편법과 불법, 특혜 등을 시원하게 꼬집었다.
“여야 정치권 공세
더더욱 심해질 것”
이종구 의원은 새누리당 전략공천 지역구인 강남갑에서 탈락한 후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를 지켜본 한화그룹은 한숨을 돌릴만 했다. 이 의원이 ‘한화 저격수’였기 때문이다. 17대 국회 때 입성한 이 의원은 줄곧 한화를 타깃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가 초점이었다. 허위 컨소시엄 구성, 분식회계, 금융기관 부실책임, 뇌물공여 의혹 등을 문제 삼아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다.
한화가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했을 당시 정경유착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의원과 한화가 앙숙이 된 것은 2001년부터다. 당시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에 재직 중이던 이 의원은 인수 자격 부적격을 이유로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를 반대하다 결국 좌천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