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새로운 영웅 정현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8.01.29 11:07:10
  • 호수 1151호
  • 댓글 0개

아직 스물한 살…앞날 창창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 새 역사를 썼다. 22세 테니스 소년, 자신의 우상이자 한때 세계 1위였던 노박 조코비치 마저 꺾으며 8강에 올랐다. 한국 테니스 역사의 신기록이다. 하지만 테니스 소년의 라켓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 상대도 꺾으며 4강(준결승)에 진출했다. 그의 아름다웠던 도전은 4강전서 멈췄지만 온 국민은 테니스 왕자 정현에 열광하고 있다.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58위·한국체대)이 한국 선수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정현은 지난 24일 호주 멜버른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총상금 5500만호주 달러·약 471억원) 남자단식 8강(준준결승)서 테니스 샌드그렌(97위·미국)을 3-0(6-4 7-6(5) 6-3)으로 완파하고 한국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 4강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영원한 영웅
조코비치 넘다

1905년 출범한 호주오픈서 남자단식 4강에 오른 아시아 선수는 1932년 사토 지로(일본) 이후 86년 만이다. 프로 선수들의 메이저 대회 출전이 허용된 1968년 이후로는 아시아 선수가 호주오픈 남자단식 4강에 진출한 적은 없었다. 

대만계 미국인 마이클 창이 1996년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그의 국적은 미국이었다. 여자 단식에서는 리나(중국)가 2014년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서 정현은 연일 강자들을 격파하며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대회 3회전서 알렉산더 즈베레프(4위·독일)를 제압했고 16강전에선 2년 전 같은 대회서 0-3 완패 굴욕을 당한 전 세계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14위·세르비아)까지 물리치며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8강서 정현과 맞붙은 샌드그렌 역시 이번 대회서 무서운 상승세를 보였던 선수다. 세계랭킹은 낮지만 대회 9번 시드 스탄 바브린카(8위·스위스)와 5번 시드 도미니크 티엠(5위·오스트리아) 등 톱10 선수를 잇따라 제압했다.   

이번 대회 돌풍의 주인공끼리 맞붙은 대결은 시작 전부터 관심 대상이었다. 

정현은 이날 1세트 게임스코어 1-1서 샌드그렌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며 3-1로 기선을 제압했다. 이후 자신의 서브 게임을 착실히 지키며 1세트를 6-4로 따낸 정현은 2세트서도 게임스코어 2-0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간 자신의 서브 게임을 두 차례나 내주며 샌드그렌에게 3-5까지 뒤졌다. 정현은 9·10번째 게임서 승리하며 반격에 나섰고, 강력한 스트로크로 상대의 범실을 유도하며 두 번째 세트마저 제압했다. 

2세트 고비를 넘긴 정현은 3세트 게임스코어 2-1서 샌드그렌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결국 2시간30여분 만에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파죽지세’ 호주오픈 이변·돌풍
단숨에 세계랭킹 20위권 ‘껑충’


준결승 진출로 정현은 88만호주달러(약 7억5600만원)의 상금을 확보했다. 이번 대회 전까지 정현의 총상금은 170만9608달러(약 18억3200만원). 남자복식 16강 상금 4만9000호주달러(약 4200만원)까지 더하면 이번 대회서만 누적상금의 43.5%를 벌어들였다. 

만약 정현이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만 해도 200만호주달러(약 17억1800만원)를 받을 예정이었다. 이번 호주오픈의 우승상금은 400만호주달러(약 34억3500만원)에 이른다. 

정현은 이번 한국 테니스 역사상 세계랭킹이 가장 높은 선수가 됐다. 현재 랭킹 포인트 857점인 정현은 이번 승리로 랭킹 포인트 615점을 추가로 확보했다. 합계 1472점. 

향후 발표될 남자프로테니스(ATP) 세계랭킹을 발표할 때 1472점으로 세계 29위에 오른다. 이는 이형택이 2007년 8월6일 기록한 36위를 뛰어 넘는 한국 선수 최고 기록이다.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 중 최초로 세계랭킹 3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김봉수다. 그는 1988년 1월4일 300위를 기록했고, 1998년 12월11일 129위까지 랭킹을 끌어올렸다. 김봉수는 총 189주 동안 한국 선수 최고 랭킹 자리를 지켰다. 이는 이형택(631주)에 이어 한국 선수 가운데 두 번째로 긴 기간이다.

정현의 파죽지세에 세계도 놀랐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이날 ‘정현의 놀라운 활약은 호주오픈 준결승에도 계속된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세계랭킹 58위 정현이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한다”며 “2004년 호주오픈 준결승에 진출한 마라트 사핀 이후 준결승행에 성공한 가장 낮은 랭커다”고 전했다. 

<AP통신>은 “만 21세인 정현은 2010년 호주오픈 마린 칠리치 이후 그랜드슬램 준결승에 진출한 가장 어린 선수”라며 정현의 진기록에 놀라움을 표했다. 

테니스 집안
약시가 계기

정현은 8강전 경기 직후 이뤄진 코트 내 인터뷰서 ‘4강서 누구와 만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잠시 난감해하다 “50대 50”이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영국 <가디언>은 정현의 화술이 능숙하다고 평가하면서 “그는 탁월한 젊은 선수일 뿐만 아니라 외교관”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언론도 정현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4강 진출을 집중 조명했다. 

일본 포털사이트 야후 재팬은 스포츠 섹션 메인에 정현의 기사를 배치했다. 일본 스포츠 종합 매체 <THE ANSWER>는 정현의 승리 후 “초신성 정현이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했다. 아시아권서 니시코리 케이 이후 쾌거”라고 보도했다. 

니시코리는 현재 아시아 테니스의 최강자다. 세계랭킹 24위에 지난 2014년 US오픈 결승에 올라 준우승을 거두며 역대 아시아 선수 최고 성적을 냈다. 


하지만 니시코리는 2018 호주오픈에는 불참했으며 지난해 8월 손목 부상으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현은 이날 승리 후 공식 기자회견서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고 4강전에 임할 자세를 밝혔다. 또 22세의 어린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경기 운영과 관련해서도 솔직히 자기 생각을 털어놨다.

정현은 “운동선수는 속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고 배웠다”며 “들키면 상대에게 기회를 주게 되는 만큼 모든 선수가 속마음을 숨긴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 정현은 동행하는 사람들 일부는 결승 진출, 나아가 우승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날 8강전에는 바짝 긴장한 모습도 드러냈다. 경기 직전 느닷없이 사이렌이 울려 경기가 잠시 중단되고 일부는 대피하려 자리서 일어나기도 했으나 그런 사실을 잘 모르고 경기에 임했다고 했다.

튼튼한 허벅지가 외국 기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는 질문에는 “따로 허벅지 훈련을 하지 않고 있다”며 “시합을 많이 하고 있으며 시합이 최고의 훈련이라는 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서 수영의 박태환이나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와 비교될 만큼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실감한다고도 했다.

그는 “요즘 하루에 300개의 메시지를 받는다”며 “꼭 답변해주는 성격이라 시간을 많이 쓰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최근 활약상으로 후원업체가 더 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러길 희망하고 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현재 정현에겐 5개 업체가 후원하고 있다. 영어가 부쩍 늘었다는 말에 “특별히 영어 인터뷰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자신의 괄목할 만한 성적에 관해 “한국의 주니어가 따라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현이 테니스를 시작한 것은 약시를 교정하기 위해서였다. 1996년생인 정현은 7세에 약시 판정을 받았고 녹색을 많이 보라는 의사 권유를 받아 들여 테니스를 시작하게 됐다. 

약시는 안과적 검사 상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 없는데 교정시력(안경이나 콘택트렌즈 등으로 교정한 시력)이 잘 나오지 않는 시력을 말한다. 시력표서 양쪽 눈의 시력이 두 줄 이상 차이가 있을 때 시력이 낮은 쪽을 약시라고 한다. 

또 정현은 아버지와 형 모두 테니스 선수 출신인 ‘테니스 집안’ 막내다. 특히 실업 테니스 선수 출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선수의 길에 입문했다. 친형도 테니스 선수로 활동 중이다. 

여담이지만 형인 정홍은 국내 대학 남자 테니스 선수로는 넘버 원을 다투는 실력을 가졌는데 둘은 공식경기서 두 번 만나 정현이 2승을 거뒀다.

이렇게 테니스 선수 가족이지만 정현의 부모님은 두 아들 중 한 명은 테니스 대신 공부를 시킬 생각이어서 처음에 정현이 테니스를 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정현은 테니스 선수로서의 시작은 본인의 고집과 신체적인 이유와 겹친 것으로 전해진다. 정현의 아버지가 실업 테니스 선수였다가 은퇴한 후에 테니스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되면서 형인 정홍을 자연스럽게 테니스 선수로 키웠다. 

한국 테니스 
새 역사 쓰다

집에선 차남인 정현이 테니스보다는 공부를 했으면 했는데 형이 테니스를 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공부보다 테니스를 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여기에 정현 본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상당히 심한 약시(정확하게는 원시, 난시, 약시가 모두 있었다고 한다)가 있다는 것을 부모님과 함께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치료를 위해 시작했지만 이후 정현은 2008년 주니어급 테니스 대회 중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오렌지볼 12세부서 우승, 2011년 오렌지볼 16세부서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학창 시절에는 수원북중학교의 시즌 전관왕을 이끌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아버지가 감독으로 있는 삼일공고로 진학했다. 특히 2013년 7월에는 그랜드슬램 대회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주니어 남자 단식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2014년에는 퓨처스 대회 3번과 창삿 방콕 오픈 대회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방콕 오픈은 첫 챌린저급 대회다. 이후 2014년 미국 오픈 대회에 데이비스 컵 한국 대표팀으로 나서 두 번의 경기서 이겼다. 

그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서 복식 금메달까지 거머쥐어 군면제까지 받았다. 특히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 단식/복식 금메달, ATP 가오슝 챌린저 테니스 단식 우승 등 정현은 매 경기마다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세계 테니스계서 주목받는 선수로 거듭났다.

정현의 맹활약으로 그의 플레이 스타일도 주목 받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베이스라이너’.

조코비치와 경기서 안정적인 스트로크와 절묘한 패싱 샷으로 그를 여러 차례 수세로 몰았다. 특히 시합 도중 33번의 랠리 접전 끝에 포인트를 따냈던 것은 이날 경기의 백미. 정현은 냉정하리만치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수차례의 랠리서 조코비치에 우위를 점했다. 

86년 만에 아시아인 남단식 4강
역대 한국 선수 중 최고 신기록 

평소에도 정현은 빠르게 네트에 접근하기보다는 스트로크 플레이를 통한 안정적 경기 운영을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코트 뒤 베이스라인(Baseline) 근처 깊숙한 곳에서 그라운드 스트로크를 통한 랠리를 이어가는 타입의 선수를 '베이스라이너(Baseliner)'라고 한다. 

베이스라인 플레이를 위해서는 코트 전반을 커버할 수 있는 빠른 발과 강인한 체력을 필수적으로 장착해야 한다. 플레이 스타일 상 경기 시간이 길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코트를 전반적으로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도 갖춰야 한다. 긴 스트로크와 리턴을 통해 상대의 범실을 유발하는 것도 베이스라이너들이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다. 

정현과 조코비치는 물론, 강철 체력을 과시하는 현 세계 랭킹 1위 라파엘 나달(호주 오픈에선 8강전서 마린 칠리치에게 발목이 잡혀 탈락)도 대표적인 베이스라이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미남 스타 안드레 애거시도 베이스라이너의 교과서 같은 선수다. 베이스라이너와 대비되는 ‘서브 앤 발리(Serve & Volley)’ 플레이어도 있다. 서브 앤 발리는 강한 서브를 통해 상대방을 흔들고, 네트 쪽으로 빠르게 접근해 리턴된 볼을 발리로 마무리 짓는 스타일이다. 

서브 앤 발리는 서브가 빠른 속도로 상대방 구석에 정확히 꽂힐 경우 경기를 순식간에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볼의 속도가 빠른 잔디 코트서 위력을 발휘한다. 

대개 강력한 서브 능력을 장착한 선수들이 즐겨 사용한다. 최근 정현과의 호주오픈 단식 1회전서 기권했던 미샤 즈베레프가 서브 앤 발리를 자주 구사한다. 또 1990년대 세계 테니스를 석권했던 피트 샘프라스도 전형적인 서브 앤 발리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최근 서브 앤 발리 플레이어의 비율은 크게 감소하는 추세다. 이는 라켓 기술 발전 및 경량화로 선수들의 서비스 리턴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테니스 공식 사용구 크기 확대에 따른 범실 가능성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열광
외신도 흥분

베이스라인 및 서브 앤 발리 플레이를 적절하게 조화시킨 ‘올 라운더(All Rounder)’ 타입의 선수도 있다. 사실상 대부분 선수들이 이에 속하며, 기술의 숙련도에 따라 특색이 없는 선수가 될 수도 있고, 매우 강력한 선수가 될 수도 있다. 

역사상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손꼽히는 현 세계 랭킹 2위 로저 페더러는 대표적 무결점 올 라운더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페더러는 경기 흐름에 따라 베이스라인과 서브 앤 발리 플레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cmp@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정현 신드롬’ 아이템 찾는 사람들

최근 ‘정현 신드롬’이 유행하고 있다. 정현에 대한 관심은 그가 경기서 착용한 의상, 고글에도 관심이 쏠릴 정도로 뜨겁다. 놀라운 체력과 감각적인 플레이로 한국 테니스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정현의 패션 아이템을 소개한다.

정현이 경기서 착용한 의상은 프랑스 스포츠 브랜드 ‘라코스테’(LACOSTE)의 제품이다. 

라코스테는 프랑스의 전설적 테니스 선수 르네 라코스테가 설립한 스포츠 브랜드다. 라코스테는 보다 편안한 테니스 경기를 위해 세계 최초로 피케 소재 반소매 셔츠를 개발하기도 했다. 정현이 2016년 라코스테와 5년 간의 공식 후원 계약을 맺으면서 그의 유니폼엔 라코스테의 로고 ‘악어’가 함께하게 됐다.

정현이 지난 23일 호주오픈 8강에 진출한 뒤 가진 인터뷰서 착용한 시계도 화제다. 이날 인터뷰서 정현은 라코스테의 블랙 점퍼에 굵직한 밴드의 손목시계를 착용했다. 

이는 스위스 명품 시계 브랜드 라도(Rado)의 하이퍼크롬 캡틴쿡 45㎜로, 가격은 286만원이다. 오버사이즈 인덱스와 두툼한 화살형 바늘, 1960년대 라도 스타일인 닻 장식이 있다. 

정현은 차세대 테니스 스타를 발굴해 후원하는 라도의 ‘라도 영스타 프로그램’의 후원을 받고 있다. 

어릴 때 고도근시와 약시 판정을 받았을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은 정현은 테니스 선수들이 잘 착용하지 않는 고글을 애용, ‘교수’라는 별명도 붙었다. 

테니스 코트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고글' 스타일은 정현만의 시그니처 스타일이 됐다. 정현이 이번 경기 때 착용한 고글은 아이웨어 브랜드 오클리의 ‘플락 베타’로, 렌즈에 따라 가격이 다르지만 20만원 중반대 제품이다. <창>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