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새로운 영웅 정현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8.01.29 11:07:10
  • 호수 1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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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스물한 살…앞날 창창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 새 역사를 썼다. 22세 테니스 소년, 자신의 우상이자 한때 세계 1위였던 노박 조코비치 마저 꺾으며 8강에 올랐다. 한국 테니스 역사의 신기록이다. 하지만 테니스 소년의 라켓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음 상대도 꺾으며 4강(준결승)에 진출했다. 그의 아름다웠던 도전은 4강전서 멈췄지만 온 국민은 테니스 왕자 정현에 열광하고 있다.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58위·한국체대)이 한국 선수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정현은 지난 24일 호주 멜버른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총상금 5500만호주 달러·약 471억원) 남자단식 8강(준준결승)서 테니스 샌드그렌(97위·미국)을 3-0(6-4 7-6(5) 6-3)으로 완파하고 한국 선수 최초로 그랜드슬램 4강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영원한 영웅
조코비치 넘다

1905년 출범한 호주오픈서 남자단식 4강에 오른 아시아 선수는 1932년 사토 지로(일본) 이후 86년 만이다. 프로 선수들의 메이저 대회 출전이 허용된 1968년 이후로는 아시아 선수가 호주오픈 남자단식 4강에 진출한 적은 없었다. 

대만계 미국인 마이클 창이 1996년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그의 국적은 미국이었다. 여자 단식에서는 리나(중국)가 2014년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대회서 정현은 연일 강자들을 격파하며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대회 3회전서 알렉산더 즈베레프(4위·독일)를 제압했고 16강전에선 2년 전 같은 대회서 0-3 완패 굴욕을 당한 전 세계랭킹 1위 노박 조코비치(14위·세르비아)까지 물리치며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8강서 정현과 맞붙은 샌드그렌 역시 이번 대회서 무서운 상승세를 보였던 선수다. 세계랭킹은 낮지만 대회 9번 시드 스탄 바브린카(8위·스위스)와 5번 시드 도미니크 티엠(5위·오스트리아) 등 톱10 선수를 잇따라 제압했다.   

이번 대회 돌풍의 주인공끼리 맞붙은 대결은 시작 전부터 관심 대상이었다. 

정현은 이날 1세트 게임스코어 1-1서 샌드그렌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하며 3-1로 기선을 제압했다. 이후 자신의 서브 게임을 착실히 지키며 1세트를 6-4로 따낸 정현은 2세트서도 게임스코어 2-0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간 자신의 서브 게임을 두 차례나 내주며 샌드그렌에게 3-5까지 뒤졌다. 정현은 9·10번째 게임서 승리하며 반격에 나섰고, 강력한 스트로크로 상대의 범실을 유도하며 두 번째 세트마저 제압했다. 

2세트 고비를 넘긴 정현은 3세트 게임스코어 2-1서 샌드그렌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 벼랑 끝으로 내몰았고 결국 2시간30여분 만에 4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파죽지세’ 호주오픈 이변·돌풍
단숨에 세계랭킹 20위권 ‘껑충’

준결승 진출로 정현은 88만호주달러(약 7억5600만원)의 상금을 확보했다. 이번 대회 전까지 정현의 총상금은 170만9608달러(약 18억3200만원). 남자복식 16강 상금 4만9000호주달러(약 4200만원)까지 더하면 이번 대회서만 누적상금의 43.5%를 벌어들였다. 

만약 정현이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만 해도 200만호주달러(약 17억1800만원)를 받을 예정이었다. 이번 호주오픈의 우승상금은 400만호주달러(약 34억3500만원)에 이른다. 

정현은 이번 한국 테니스 역사상 세계랭킹이 가장 높은 선수가 됐다. 현재 랭킹 포인트 857점인 정현은 이번 승리로 랭킹 포인트 615점을 추가로 확보했다. 합계 1472점. 

향후 발표될 남자프로테니스(ATP) 세계랭킹을 발표할 때 1472점으로 세계 29위에 오른다. 이는 이형택이 2007년 8월6일 기록한 36위를 뛰어 넘는 한국 선수 최고 기록이다.  
 

한국 남자 테니스 선수 중 최초로 세계랭킹 3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김봉수다. 그는 1988년 1월4일 300위를 기록했고, 1998년 12월11일 129위까지 랭킹을 끌어올렸다. 김봉수는 총 189주 동안 한국 선수 최고 랭킹 자리를 지켰다. 이는 이형택(631주)에 이어 한국 선수 가운데 두 번째로 긴 기간이다.

정현의 파죽지세에 세계도 놀랐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이날 ‘정현의 놀라운 활약은 호주오픈 준결승에도 계속된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세계랭킹 58위 정현이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한다”며 “2004년 호주오픈 준결승에 진출한 마라트 사핀 이후 준결승행에 성공한 가장 낮은 랭커다”고 전했다. 

<AP통신>은 “만 21세인 정현은 2010년 호주오픈 마린 칠리치 이후 그랜드슬램 준결승에 진출한 가장 어린 선수”라며 정현의 진기록에 놀라움을 표했다. 

테니스 집안
약시가 계기

정현은 8강전 경기 직후 이뤄진 코트 내 인터뷰서 ‘4강서 누구와 만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잠시 난감해하다 “50대 50”이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영국 <가디언>은 정현의 화술이 능숙하다고 평가하면서 “그는 탁월한 젊은 선수일 뿐만 아니라 외교관”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언론도 정현에 엄지를 치켜세우며 4강 진출을 집중 조명했다. 

일본 포털사이트 야후 재팬은 스포츠 섹션 메인에 정현의 기사를 배치했다. 일본 스포츠 종합 매체 <THE ANSWER>는 정현의 승리 후 “초신성 정현이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했다. 아시아권서 니시코리 케이 이후 쾌거”라고 보도했다. 

니시코리는 현재 아시아 테니스의 최강자다. 세계랭킹 24위에 지난 2014년 US오픈 결승에 올라 준우승을 거두며 역대 아시아 선수 최고 성적을 냈다. 

하지만 니시코리는 2018 호주오픈에는 불참했으며 지난해 8월 손목 부상으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현은 이날 승리 후 공식 기자회견서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고 4강전에 임할 자세를 밝혔다. 또 22세의 어린 나이답지 않은 노련한 경기 운영과 관련해서도 솔직히 자기 생각을 털어놨다.

정현은 “운동선수는 속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고 배웠다”며 “들키면 상대에게 기회를 주게 되는 만큼 모든 선수가 속마음을 숨긴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 정현은 동행하는 사람들 일부는 결승 진출, 나아가 우승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날 8강전에는 바짝 긴장한 모습도 드러냈다. 경기 직전 느닷없이 사이렌이 울려 경기가 잠시 중단되고 일부는 대피하려 자리서 일어나기도 했으나 그런 사실을 잘 모르고 경기에 임했다고 했다.

튼튼한 허벅지가 외국 기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는 질문에는 “따로 허벅지 훈련을 하지 않고 있다”며 “시합을 많이 하고 있으며 시합이 최고의 훈련이라는 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서 수영의 박태환이나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와 비교될 만큼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실감한다고도 했다.

그는 “요즘 하루에 300개의 메시지를 받는다”며 “꼭 답변해주는 성격이라 시간을 많이 쓰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최근 활약상으로 후원업체가 더 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러길 희망하고 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현재 정현에겐 5개 업체가 후원하고 있다. 영어가 부쩍 늘었다는 말에 “특별히 영어 인터뷰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자신의 괄목할 만한 성적에 관해 “한국의 주니어가 따라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현이 테니스를 시작한 것은 약시를 교정하기 위해서였다. 1996년생인 정현은 7세에 약시 판정을 받았고 녹색을 많이 보라는 의사 권유를 받아 들여 테니스를 시작하게 됐다. 

약시는 안과적 검사 상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 없는데 교정시력(안경이나 콘택트렌즈 등으로 교정한 시력)이 잘 나오지 않는 시력을 말한다. 시력표서 양쪽 눈의 시력이 두 줄 이상 차이가 있을 때 시력이 낮은 쪽을 약시라고 한다. 

또 정현은 아버지와 형 모두 테니스 선수 출신인 ‘테니스 집안’ 막내다. 특히 실업 테니스 선수 출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선수의 길에 입문했다. 친형도 테니스 선수로 활동 중이다. 

여담이지만 형인 정홍은 국내 대학 남자 테니스 선수로는 넘버 원을 다투는 실력을 가졌는데 둘은 공식경기서 두 번 만나 정현이 2승을 거뒀다.

이렇게 테니스 선수 가족이지만 정현의 부모님은 두 아들 중 한 명은 테니스 대신 공부를 시킬 생각이어서 처음에 정현이 테니스를 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정현은 테니스 선수로서의 시작은 본인의 고집과 신체적인 이유와 겹친 것으로 전해진다. 정현의 아버지가 실업 테니스 선수였다가 은퇴한 후에 테니스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되면서 형인 정홍을 자연스럽게 테니스 선수로 키웠다. 

한국 테니스 
새 역사 쓰다

집에선 차남인 정현이 테니스보다는 공부를 했으면 했는데 형이 테니스를 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공부보다 테니스를 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여기에 정현 본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상당히 심한 약시(정확하게는 원시, 난시, 약시가 모두 있었다고 한다)가 있다는 것을 부모님과 함께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치료를 위해 시작했지만 이후 정현은 2008년 주니어급 테니스 대회 중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오렌지볼 12세부서 우승, 2011년 오렌지볼 16세부서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학창 시절에는 수원북중학교의 시즌 전관왕을 이끌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아버지가 감독으로 있는 삼일공고로 진학했다. 특히 2013년 7월에는 그랜드슬램 대회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 주니어 남자 단식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2014년에는 퓨처스 대회 3번과 창삿 방콕 오픈 대회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방콕 오픈은 첫 챌린저급 대회다. 이후 2014년 미국 오픈 대회에 데이비스 컵 한국 대표팀으로 나서 두 번의 경기서 이겼다. 

그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서 복식 금메달까지 거머쥐어 군면제까지 받았다. 특히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 단식/복식 금메달, ATP 가오슝 챌린저 테니스 단식 우승 등 정현은 매 경기마다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세계 테니스계서 주목받는 선수로 거듭났다.

정현의 맹활약으로 그의 플레이 스타일도 주목 받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베이스라이너’.

조코비치와 경기서 안정적인 스트로크와 절묘한 패싱 샷으로 그를 여러 차례 수세로 몰았다. 특히 시합 도중 33번의 랠리 접전 끝에 포인트를 따냈던 것은 이날 경기의 백미. 정현은 냉정하리만치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수차례의 랠리서 조코비치에 우위를 점했다. 

86년 만에 아시아인 남단식 4강
역대 한국 선수 중 최고 신기록 

평소에도 정현은 빠르게 네트에 접근하기보다는 스트로크 플레이를 통한 안정적 경기 운영을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코트 뒤 베이스라인(Baseline) 근처 깊숙한 곳에서 그라운드 스트로크를 통한 랠리를 이어가는 타입의 선수를 '베이스라이너(Baseliner)'라고 한다. 

베이스라인 플레이를 위해서는 코트 전반을 커버할 수 있는 빠른 발과 강인한 체력을 필수적으로 장착해야 한다. 플레이 스타일 상 경기 시간이 길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코트를 전반적으로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도 갖춰야 한다. 긴 스트로크와 리턴을 통해 상대의 범실을 유발하는 것도 베이스라이너들이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다. 

정현과 조코비치는 물론, 강철 체력을 과시하는 현 세계 랭킹 1위 라파엘 나달(호주 오픈에선 8강전서 마린 칠리치에게 발목이 잡혀 탈락)도 대표적인 베이스라이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미남 스타 안드레 애거시도 베이스라이너의 교과서 같은 선수다. 베이스라이너와 대비되는 ‘서브 앤 발리(Serve & Volley)’ 플레이어도 있다. 서브 앤 발리는 강한 서브를 통해 상대방을 흔들고, 네트 쪽으로 빠르게 접근해 리턴된 볼을 발리로 마무리 짓는 스타일이다. 

서브 앤 발리는 서브가 빠른 속도로 상대방 구석에 정확히 꽂힐 경우 경기를 순식간에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볼의 속도가 빠른 잔디 코트서 위력을 발휘한다. 

대개 강력한 서브 능력을 장착한 선수들이 즐겨 사용한다. 최근 정현과의 호주오픈 단식 1회전서 기권했던 미샤 즈베레프가 서브 앤 발리를 자주 구사한다. 또 1990년대 세계 테니스를 석권했던 피트 샘프라스도 전형적인 서브 앤 발리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최근 서브 앤 발리 플레이어의 비율은 크게 감소하는 추세다. 이는 라켓 기술 발전 및 경량화로 선수들의 서비스 리턴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테니스 공식 사용구 크기 확대에 따른 범실 가능성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열광
외신도 흥분

베이스라인 및 서브 앤 발리 플레이를 적절하게 조화시킨 ‘올 라운더(All Rounder)’ 타입의 선수도 있다. 사실상 대부분 선수들이 이에 속하며, 기술의 숙련도에 따라 특색이 없는 선수가 될 수도 있고, 매우 강력한 선수가 될 수도 있다. 

역사상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손꼽히는 현 세계 랭킹 2위 로저 페더러는 대표적 무결점 올 라운더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페더러는 경기 흐름에 따라 베이스라인과 서브 앤 발리 플레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cmp@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정현 신드롬’ 아이템 찾는 사람들

최근 ‘정현 신드롬’이 유행하고 있다. 정현에 대한 관심은 그가 경기서 착용한 의상, 고글에도 관심이 쏠릴 정도로 뜨겁다. 놀라운 체력과 감각적인 플레이로 한국 테니스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정현의 패션 아이템을 소개한다.

정현이 경기서 착용한 의상은 프랑스 스포츠 브랜드 ‘라코스테’(LACOSTE)의 제품이다. 

라코스테는 프랑스의 전설적 테니스 선수 르네 라코스테가 설립한 스포츠 브랜드다. 라코스테는 보다 편안한 테니스 경기를 위해 세계 최초로 피케 소재 반소매 셔츠를 개발하기도 했다. 정현이 2016년 라코스테와 5년 간의 공식 후원 계약을 맺으면서 그의 유니폼엔 라코스테의 로고 ‘악어’가 함께하게 됐다.

정현이 지난 23일 호주오픈 8강에 진출한 뒤 가진 인터뷰서 착용한 시계도 화제다. 이날 인터뷰서 정현은 라코스테의 블랙 점퍼에 굵직한 밴드의 손목시계를 착용했다. 

이는 스위스 명품 시계 브랜드 라도(Rado)의 하이퍼크롬 캡틴쿡 45㎜로, 가격은 286만원이다. 오버사이즈 인덱스와 두툼한 화살형 바늘, 1960년대 라도 스타일인 닻 장식이 있다. 

정현은 차세대 테니스 스타를 발굴해 후원하는 라도의 ‘라도 영스타 프로그램’의 후원을 받고 있다. 

어릴 때 고도근시와 약시 판정을 받았을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은 정현은 테니스 선수들이 잘 착용하지 않는 고글을 애용, ‘교수’라는 별명도 붙었다. 

테니스 코트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고글' 스타일은 정현만의 시그니처 스타일이 됐다. 정현이 이번 경기 때 착용한 고글은 아이웨어 브랜드 오클리의 ‘플락 베타’로, 렌즈에 따라 가격이 다르지만 20만원 중반대 제품이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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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1위 하이브, 수사 리스크 타개책 있나?

K-POP 1위 하이브, 수사 리스크 타개책 있나?

[일요시사 취재1팀 ] 장지선 기자 =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가 사면초가 상태에 빠졌다. 업계에서는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지만 내부는 엉망진창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다. 레이블 간의 갈등이 법정 공방으로 번졌고 주력 IP는 과거와 비교해 힘을 못 쓰는 모양새다. 연예계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수장은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하려는 걸까? 2024년 5월 엔터테인먼트 기업 하이브가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계열사 자산 총액과 자본 총액을 더한 자산이 5조원을 넘긴 곳을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한다. 2024년 3월 공개한 사업보고서 기준으로 하이브 자산 총계는 5조원을 넘었다. 당시 기준으로 재계 순위 85위에 올랐다. 빛 좋은 개살구?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공정거래법상 기업의 의무가 늘어난다. 엄격한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상징성도 얻는다. 실제 하이브는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최초로 대기업집단에 지정됐다. 국가 차원에서 하이브가 ‘업계 1위’로 인정받은 셈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K팝의 세계화로 앨범, 공연, 콘텐츠 등이 주요 수익원인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급격히 성장한 것이 반영됐다”고 지정 배경을 밝혔다. 하이브의 대기업집단 지정은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와의 갈등이 한창 불거질 무렵에 이뤄졌다. 앞서 2024년 4월 하이브는 그룹 뉴진스 등이 소속된 레이블 어도어를 이끌고 있던 민 전 대표가 경영권을 탈취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감사를 진행했다. 민 전 대표와 하이브 간 이른바 ‘민-하 대전’의 시작이었다. 이후 뉴진스, 다른 레이블까지 싸움에 뛰어들었다. 뉴진스는 자신들의 프로듀서는 민 전 대표라고 주장하면서 계약 해지를 요구했고 다른 레이블은 민 전 대표가 제기한 표절 의혹 등에 반발해 소를 제기했다. 민 전 대표와 하이브 간의 계약 문제도 송사로 번졌다. 그 사이 뉴진스는 쪼개졌고 멤버 1명은 계약 해지 후 피소됐다. 내부 문제 외에도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의 경영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카카오와의 갈등도 현재 진행형이다. 카카오와 하이브는 ‘아이돌 명가’로 불리는 SM을 인수하기 위해 엄청난 출혈 경쟁을 벌였다. 인수전이 과열되면서 카카오가 주가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김범수 의장이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구속됐다가 보석 석방되기도 했다. 1900억원대 부당이득 혐의 경찰 영장 청구, 검찰 반려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두문불출 상태였다. 미국에 머물다가 인터넷 방송 BJ ‘과즙세연(본명 인세연)’과 거리를 걷는 사진이 찍혀 입길에 오른 것을 제외하면 행보를 알기 어려웠다. 방 의장이 프로듀싱을 도맡아 온 방탄소년단(BTS)도 ‘군백기(군대+공백기)’ 상태였다. 하지만 BTS의 광화문 공연 이후 방 의장에 대한 언급이 늘었다. BTS는 멤버 전원이 군대에 다녀온 뒤 ‘완전체’ 첫 행보로 광화문 공연을 선택했다. 정부와 서울시가 하이브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성사된 공연은 각종 논란으로 이어졌다. 정부가 하이브에 특혜를 주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된 시점도 이때다. 지난달 21일 광화문 일대는 경찰 등에서 동원된 경비 인원으로 삼엄했다. 광화문 인근을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문이 이뤄졌고 그 수위는 살벌했다. 공연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들도 검문 대상으로 지목됐고 결혼식 등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도 어김없었다. 정부와 전폭적인 지원에도 BTS 공연을 위해 광화문에 모인 인파는 예상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앞서 26만명이 몰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공연 직후 경찰은 4만명으로 추산했고 하이브는 10만여명으로 발표했다. 어떤 기준을 갖다 대도 예상치보다 적은 인원이 모이면서 공연 자체를 비판하는 목소리와 모두의 광장인 광화문을 사기업이 특정 시간대에 독점하는 게 맞느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회사 뒤에 숨어 있나 실제 BTS의 광화문 공연은 ‘관급 행사’를 방불케 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연 전 국무총리가 하이브를 방문했고 서울시는 공연 당일 경비를 위한 회의를 여러 번 진행했다. 물 샐 틈 하나 없는 경비 체제를 구축한다는 명분으로 안전 관리에만 경찰 6700여명 등 모두 1만5000명에 이르는 인력이 동원됐다. 이재명 대통령도 가세했다. 이 대통령은 공연 전에는 안전 관리를 당부하는 목소리를 냈고 공연 이후에도 호평을 남겼다. 이 대통령은 공연 이후인 지난달 24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번 공연은 광화문 홍보를 넘어 대한민국 홍보에 결정적이었다”며 “기획을 잘 해서 잘 진행했다”고 평했다. 대통령까지 언급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은 공교롭게도 방 의장에 대한 비판으로 튀었다. 방의장이 현재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는 점, 그 내용이 주식과 관련된 것이라 정부 정책에 반한다는 점 등이 화두가 됐다. 이 대통령은 ‘주가조작은 패가망신’이라면서 엄하게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방 의장은 하이브 IPO(기업 공개) 이전인 2019년 기존 투자자들에게 상장 계획이 지연될 것처럼 설명하는 등 기망행위를 통해 주식을 매수하고 이후 자신과 관련된 사모펀드가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에 지분을 넘기는 방식으로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이 추산한 부당이득 액수는 1900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7월 이 대통령의 ‘주가조작은 패가망신’ 경고 이후 주식시장을 교란한 혐의를 받는 인사들에 대한 금융 당국의 제재가 강해졌다. 당시 지목당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방 의장이었다. 금융위원회 증권선물위원회는 지난해 7월16일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금지 위반 혐의로 방 의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경찰도 같은 혐의로 방 의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미국 압박 경찰 발끈? 검․경의 중복 수사 우려까지 불거졌던 사안은 경찰이 내사에 착수한 2024년 말 이후 1년 반이 지나도록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경찰은 지난해 9월 방 의장을 처음 소환한 이후 같은 해 11월까지 총 5차례 조사했다. 이후 5개월간 추가 소환이나 신병 확보가 진행되지 않으면서 ‘늑장 수사’라는 비판이 일었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지난 21일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방 의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박정보 서울경찰청장은 구속영장 청구 하루 전인 지난 20일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방 의장 수사는 거의 마무리됐다”며 “법리를 검토 중이고 머지않은 시간 내에 종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고 다음 날 방 의장에 대한 신병 확보에 나선 것이다. 방 의장 측은 즉각 유감을 표명했다. 그의 변호인단은 “장기간 성실히 수사에 협조했음에도 구속영장이 신청된 것은 유감”이라며 “향후 법적 절차에도 충실히 임해 최선을 다해 소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주한미국대사관의 압박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최근 방 의장의 미국 방문과 관련해 출국 협조를 요청하는 서한을 경찰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한에는 오는 7월4일 예정된 미국 독립기념일 250주년 행사 참석과 BTS의 월드투어 지원 필요성 등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방 의장은 출국금지 상태다. BTS 광화문 공연부터 특혜 의혹 솔솔 나와 주한미국대사관의 행보에 경찰 내부는 격앙된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BTS 콘서트나 독립 250주년 기념행사 등을 고리로 미국 측을 움직여 수사 편의를 우회 압박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이번 사건의 공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 지난해 미국으로 출국한 뒤 귀국하지 않는 상황이라 방 의장이 입을 맞추거나 도주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고, 경찰의 신병 확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하이브는 국민 정서를 자극할 수 있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주한미국대사관의 서한 발송이 당혹스럽다는 분위기다. 하이브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행사 참석을 요청받은 적도 없고 출국금지를 해제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다”고 전했다. 구속 갈림길에 서 있던 방 의장은 검찰의 구속영장 반려로 한숨 돌리게 됐다.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부는 지난 24일 방 의장에게 신청된 구속영장을 돌려보냈다. 검찰은 “현 단계에서 구속을 필요로 하는 사유 등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보완수사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일단 구속 위기는 피했지만 방 의장의 사법 리스크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하이브의 최대 변수가 되는 모양새다. 하이브는 핵심 IP인 BTS 컴백으로 최대한 분위기를 띄워야 하는 상황에서 광화문 공연이 한 차례 논란이 된 데 이어 오너 리스크까지 덮쳤다. 무엇보다 방 의장이 하이브에 끼치는 영향이 절대적인 만큼 향후 상황에 따라 발생할 예측 불가능한 수준의 후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오너 리스크 K-팝도 영향 연예계 관계자 사이에서는 방 의장의 사법 리스크가 하이브를 넘어 K-팝 업계에 미칠 영향이 상당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우리나라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K-팝의 이미지가 업계 1위 수장의 오너 리스크로 얼룩질 수 있다는 걱정이다. 방 의장은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