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한문 4대가 중 한사람으로 우의정, 좌의정 그리고 영의정의 3정승 직을 모두 역임했던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에게는 어려서부터 명석함으로 두각을 드러내던 익성(翊聖)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신익성이 12세에 선조의 딸 정숙옹주와 결혼해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지게 된다. 이에 이르자 그를 눈여겨봤던 주위 사람들로부터 개탄의 소리가 이어졌다. 물론 장래의 명재상 감이 사라졌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사연인즉 당시 부마, 즉 임금의 사위는 의빈(儀賓 : 국왕이나 왕세자의 부마를 관제상 지칭한 말)이라고 해 과거에 응시할 수도 또한 관직에 나갈 수도 없었던 데에 따른다. 그런 이유로 전례에 의하면 명문가 출신으로 그다지 명석하지 않은 사람들, 정치에 개입할 소지가 적은 사람들이 주로 부마로 선택받고는 했다.
그런데 막상 부마로 선택한 신익성의 인물 됨됨이를 알아본 선조는 결국 신익성에 대해 못내 미안해하며 과거를 보면 당연히 장원급제할 텐데 못하게 만든 것이 미안해 대신 장원을 뽑을 수 있도록 시관(試官 : 과거 시험관)을 시켜주기도 한다.
이런 여건서도 역시 신익성은 신익성이었다. 부마라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임금의 아들 못지않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로 인해 임진왜란 당시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이어 조선시대의 중앙군인 오위에 부총관을 역임하게 된다.
또한 광해군 때는 폐모론에 반대해 벼슬이 박탈되기도 했고 특히 병자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끝까지 척화를 주장,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신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에 자리매김한다.
이제 시선을 현실로 돌려보자. 언젠가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호남을 방문한 자리서 자신을 가리켜 ‘호남의 사위’라고 했던 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물론 아내의 고향이 호남이기 때문에 그리 표현했는데 선뜻 그를 밝히는 장면을 접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었다.
당시 안철수는 작은 욕심으로 인해 사위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었다. 단적으로 이야기해서 사위는 예전 말대로 그저 ‘백년손님’일 뿐이다. 백년손님은 한자로 백년지객(百年之客)으로 한평생을 두고 늘 어려운 손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안철수는 거침없이 자신을 가리켜 호남의 사위라 지칭했으니 그 의미를 알고 있던 사람들로서는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즉 자신은 그저 호남의 불편한 손님일 뿐임을 애써 강조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이제 호남의 사위를 자칭했던 안철수가 자신이 왜 호남의 사위에 불과한지 그 이유를 헤아린 듯 보인다. 또한 스스로 갇혀버린 호남의 굴레서 해방되고자 하는 듯 보이는 데 만시지탄이지만 환영한다.
안철수의 호남 사위론은 당시까지 안철수의 행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입으로는 새정치, 큰 정치하겠다고 외쳐대면서 행동은 항상 소탐대실(小貪大失)로 그쳤었다. 그래서 그에게 수많은 비난이 쏟아졌던 게다.
이제 안철수가 이 나라 정치 현실서 자신의 방향을 설정한 듯 보인다. 그런 안철수에게 대한민국 국민 중 한 사람으로서 또 이 나라 정치판의 미래에 대해 그 누구보다 고심하는 사람으로서 고언 한번 하자.
부디 이제부터는 작은 것 탐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욕심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급기야 몸을 망치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자신이 추구했던 방향으로 일관하여 말이 아닌 행동으로 새정치의 장을 열라는 이야기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