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1주년 특집2> ‘일요시사’가 함께한 격동의 21년 정치사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7.05.22 11:01:37
  • 호수 1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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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대선과 6번 총선 역사적 순간을 담다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종합시사주간신문 <일요시사>가 21번째 생일을 맞았다. 1996년 5월15일 창간한 <일요시사>는 세기를 넘나들며 우리 사회의 외진 곳은 물론 높은 장벽까지 성역 없이 보도해왔다. 단 한 번의 결호 없이 숨 가쁘게 달려온 <일요시사>는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간 21주년을 맞아 그간 <일요시사>에서 다뤘던 대한민국 주요 현대사를 되짚어봤다.
 

21년 동안 대한민국 정치사는 격동의 풍랑 한가운데에 위치해왔다. <일요시사>는 김대중정부의 탄생을 지켜봤고,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태와 함께했다. 5번의 대선을 치렀으며, 6번의 총선을 다뤘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도 <일요시사>는 ‘감춰진 진실’을 보도하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3김시대 절정
그리고 마감

1996년 4월 제15대 총선이 치러졌다. 총 299명의 일꾼이 선출됐다. 이 선거는 15대 대선을 1년8개월여 앞둔 전초전의 성격이 짙어 큰 주목을 받았다. <일요시사>도 유권자들의 관심에 맞춰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후보 검증에 총력을 기울였다.

비단 대선을 앞두고 있기에 주목도가 높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신한국당의 김영삼 대통령, 새정치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 김종필 총재로 대표되는 3김 시대의 승자는 누가 될지 관심이 모아졌다. <일요시사>는 상교동·동교동 인사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정치지형의 변화를 발빠르게 취재했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총선 결과 79석이라는 저조한 성적표를 받자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졌음을 깨달았다. 의중을 꿰뚫고 있던 이강래 아태재단 상임고문은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의 정책연대를 제안했다. 이에 공감한 김대중 총재는 1996년 7월부터 실행에 옮겼다. DJP 연합의 시작이었다.


1996년 창간 후 지금까지 정계 산증인
김대중∼문재인 역대 정부와의 시간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은 DJP 연합을 업고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최초의 민주적 정권교체에 <일요시사>도 함께했다. 동교동 인사들과 접촉면이 넓은 <일요시사>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일요시사>는 기성 언론과는 달리 사안의 저변까지 파고들었다. 대표적인 게 ‘JP 대망론’ 문건 최초 보도였다. 2001년 05월 <일요시사>는 자민련 내부에서 김종필 명예총재의 차기 집권 가능성을 담은 문건을 입수해 세상에 알렸다. 

이는 ‘충청대망론’의 시초가 된 사건이다. <일요시사>의 최초 보도 후 수많은 언론서 해당 기사를 인용했고, 자민련은 문건 작성 경위에 대해 자체 조사에 착수하는 등 엄청난 파급을 불러왔다.

JP 대망론
최초 보도

<일요시사>는 기성 언론서 포착하지 못한 것까지 찾아냈다. 2001년 7월 김종필 명예총재의 후원자가 김 총재에게 산삼을 기증한 사실을 최초 보도했다. 이 역시 수많은 언론서 인용 보도될 정도로 큰 파장을 낳았다. 당시 당 대변인은 냉장고에 보관해온 현물을 기자들에게 직접 보여주며 해명했다.
 

이 같은 기사가 세간의 주목을 받자 <일요시사>를 견제하려는 움직임도 덩달아 심해졌다. 2002년 6월, 16대 대선에 나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병풍 사건을 보도한 <일요시사>는 당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받았다. 


이 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일요시사>를 제외한 다른 언론사들은 “정치권이 대(對)언론 공세를 강화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제기했다.

<일요시사>는 소송에 굴하지 않고 후속 기사를 통해 외압에 굴하지 않는다는 자세를 명확히 했다. 

2002년 8월 <종로구청장 직인 의혹, ‘진실’ 따로 있다>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회창 후보의 장남 병적기록표에 찍혀 있는 종로구청장 직인이 당시 사용하던 구청장 직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추가로 보도, 병적기록표의 위·변조 의혹을 제기했다.

소송에도 후속
거센외압 맞서

<일요시사>는 현장을 발 빠르게 취재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일요시사>가 창간하고 4개월 뒤 터진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다. 

당시 IMF 탓에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고 온 나라가 시름 섞인 한숨에 허덕였던 상황에서 국민들은 더욱 경악했다. 이에 <일요시사>는 직접 기자를 현지로 급파해 국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1999·2000년 각각 연평해전과 6·15공동선언도 <일요시사>가 주목했던 사안이었다. 2004년에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소추 때도 <일요시사>는 사안의 본질을 담아내기 위해 여야 의원들을 두루 취재했다. 국회 본회의장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는 모습도 르포 형식을 빌려 독자들에게 최대한 생생히 전하고자 노력했다.

2008년 이명박정부가 들어서자 <일요시사>도 덩달아 바빠졌다. ‘4대강·대운하’ ‘의료 민영화’ ‘자원외교’ 등 논란이 됐던 정부의 사업이 혹시 국익에 반하지 않을지 예의 주시했고, 조그만 의혹이라도 취재에 매달렸다.
 

‘촛불집회’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한층 성숙하게 만든 사건이자 ‘사람의 향기가 나는 신문’을 지향하는 <일요시사>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이에 <일요시사>는 ‘광우병 파동’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촛불집회 현장에 스며들어 민심을 담아내고자 애썼다.

상교동·동교동 소식, 수많은 최초 보도
탄핵·세월호·촛불집회…현장서 답 찾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벌어진 촛불집회는 <일요시사> 입장서 특히 의미가 깊다. 세상에 최순실의 존재가 알려졌을 때 <일요시사>는 국정농단 세력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저녁을 반납했다. <최순실 측근 고영태는 강남 호빠 출신> <차은택 강남빌딩 수상한 거래 추적>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정치권을 뒤흔든 ‘용산참사’ ‘세월호 침몰’ 때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세월호 침몰 1주기를 앞둔 지난 2015년 4월에는 단원고 희생자 민우의 부친 이종철씨를 광화문서 만나 그의 솔직한 심정을 담아냈다.

정치적 이벤트인 총선이 있을 때면 <일요시사>는 후보를 직접 만나 지역 현안과 비전을 물었다. 지금까지 <일요시사>가 만난 총선 후보만도 70여명이 넘는다. 이는 옥석을 가리고자 하는 유권자에게 일종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했다.


“정치는 현장”
지역 곳곳 누벼

전직 대통령의 서거와 같이 당장 독자에게 알려야 할 소식이 있을 때면 주간지라는 시간적 제약에 연연하지 않고 기사를 빠르게 전했다. 

<일요시사> 창간 이래 서거한 대통령은 최규하·김대중·노무현·김영삼 등 총 4명. 주말에 예고 없이 찾아오는 비보에도 <일요시사>는 빈소를 직접 찾아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언제, 어떤 소식이 전해질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기에 긴장의 연속이지만 <일요시사>는 ‘독자 우선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30·40·50주년을 향해 달려가고자 한다.


<ch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일요시사>와 함께한 정치 거물들 열전
피고 곧 지고 지고 또 피고

1997년 12월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김영삼정부는 IMF를 상대로 구제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IMF 사태’였다. 국민들은 김영삼정부의 미숙한 외환관리정책을 비난했다.


김영삼정부의 친인척 비리도 국민의 지적 대상이었다. ‘소통령’ 김현철씨는 관련 비리로 청문회장에 섰다. 생중계된 청문회는 많은 국민의 공분을 샀다. <일요시사>도 김씨의 권력형 비리를 집중 보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그는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6·15 선언의 또 다른 주역은 김정일이다. <일요시사>는 6·15 선언 소식을 전하며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했다. 김 대통령은 2009년, 김정일은 2011년 숨을 거뒀다.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은 아버지의 권력을 승계했다. 이후 언론은 김정은식 숙청작업에 관심을 집중했다. <일요시사>도 마찬가지였다. 장성택, 리영호, 김정남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충청권의 맹주 김종필·이회창도 <일요시사> 레이더망에 있었다. 두 사람은 충청대망론의 현재이자 미래였다. <일요시사>는 두 사람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집중 보도하는 기사를 내놨다. 그러나 아직 충청대망론은 현실화되지 못하며 난제로 남아 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의결은 헌정 사상 처음이라는 점에서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국회를 통과한 탄핵안은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됐다. 그러나 노 대통령에 대한 기성언론의 공격은 계속됐다. 검찰도 이에 발맞춰 노 대통령을 압박했다. 수사를 받던 노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업고 청와대에 입성했다. 동시에 서민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국밥을 먹는 홍보영상은 크게 히트하며 여러 패러디를 양산했다. 그러나 임기 중 벌였던 ‘촛불집회 수사’ ‘4대강 사업’이란 큰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이 대통령으로부터 서울시장 자리를 물려받은 오세훈 전 시장은 한때 대선 후보군으로 묶였지만, 무상급식 파동에 발목 잡혔다.

박근혜 대통령은 앞선 18대 대선서 51.6%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국정원 댓글사건으로 시작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끝마치는 과오를 범했다. 헌정 사상 첫 파면 대통령으로 기록되며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성에 흠집을 남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자구도 속에서 41.1%라는 높은 득표율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의 염원이 득표율로 표현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조국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 ‘박원순의 남자’ 임종석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는 등 파격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일요시사>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문재인정부를 감시·견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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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전’ 친윤 대숙청 시나리오

‘대선 전’ 친윤 대숙청 시나리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후보는 당원들의 도움으로 대선후보 지위를 유지했다. 확실한 명분을 쥔 김 후보는 설령 대선서 패배하더라도 당권 장악을 위한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 김 후보가 당내 주도권 다툼서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후보는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원내대표 등 친윤(친 윤석열)계의 대선후보 교체 시도를 당원들의 반대로 진압한 후에야 선대위를 구성했다. 김 후보는 지난 11일 대선후보로 등록했고, 대선후보의 당무우선권을 발동해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을 같은 날 진행된 의원총회서 새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갑툭튀 위원장 권 전 비대위원장이 후보 교체 시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기 때문이었다. 일각에선 권 원내대표의 사퇴도 강하게 요구했지만, 김 후보는 권 원내대표를 유임했다. 이날 진행된 의원총회엔 의원 107명 중 50명만 참석했다. 후보 교체 시도에 가담한 친윤계 의원들은 대거 불참했다. 이어 지난 12일엔 국민의힘 비대위 회의가 개최됐다. 국민의힘은 이날 회의서 김용태·주호영·권성동·나경원·안철수·황우여·양향자 등 7인 공동 선대위원장 체제를 발표했다. 김 후보는 후보 교체 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국민의힘 이양수 의원을 대신해 박대출 의원을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박 의원은 선대위서도 총괄지원본부장을 맡았다. 이틀 동안 확정·발표된 인선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은 김 비대위원장 임명이었다. 30대 중반 막내 초선 의원을 당 대표격 직책에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김 비대위원장은 비대위원으로서 후보 교체 시도에 강하게 반대했다. 김 비대위원장은 지난 2021년 전당대회서 청년 최고위원으로 당선돼 이준석 당시 대표가 이끌던 지도부에 참가했다. 이어 황우여 전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에도 비대위원으로 발탁됐던 경험이 있다. 이 전 대표 시절엔 소장파 ‘천아용인’ 중 1명으로 거론됐던 적이 있고, 이 전 대표가 탈당해 개혁신당을 창당한 이후에도 돈독한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일각에선 김 비대위원장 발탁을 놓고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후보와의 단일화를 대비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다만 김 비대위원장에 대해선 “소장파로서의 행보가 약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래서 김 비대위원장이 적극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지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은 지난 12일 MBC 라디오 <권순표의 뉴스하이킥>서 “친윤계가 김 비대위원장을 화살받이·방패막이로 앞세워서 상황을 돌파하려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어 김 비대위원장의 역량을 인정하는 기준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와의 결별 및 출당을 제시했다. 함께 출연한 장윤선 정치 전문 기자는 “제일 고통스러운 사람은 김 비대위원장 자신일 것이란 얘기가 있다”며 “대선서 크게 패배하면, 그 책임을 김 후보가 아닌 김 비대위원장이 지는 방식으로 정리하기 위해 허수아비로 세워놓은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고 거들었다. 친윤계는 의원총회 불참으로써 김 비대위원장 지명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김 후보는 당원투표로써 친윤계의 후보 교체 시도를 진압했기 때문에 명분을 확보했다. 국민의힘의 주도권을 휘어잡을 기회를 얻었다고 볼 수도 있다. 30대 초선 비대위원장 총알받이? 방패막이? 김 후보가 대선후보 지위를 굳힌 후 먼저 교체한 사람이 이 전 사무총장이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전 사무총장은 당 선거관리위원장 자격으로 김 후보 선출 취소 공고와 새 후보 등록 신청 공고를 발표했다. 후보 등록 신청 공고에 제시된 등록 신청 기간은 지난 10일 오전 3시부터 4시까지였고, 등록을 위해 준비해야 할 서류는 총 32종이었다. 등록 장소는 국회 본관 228호 비대위 회의실이었다. 이 황당한 상황은 한 편의 코미디로 남았다. 이날 오전 3시부터 4시 사이엔 공고를 본 후 국회를 방문해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등록하러 왔다”면서 국회 경비대에 “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는 조롱성 방송을 진행한 유튜버도 있었다. 이 전 사무총장은 소동이 끝난 후 의원 단톡방에 김 후보를 비판하고 권 전 비대위원장을 두둔하는 취지로 어느 정치평론가의 칼럼을 게재했다. 이어 친한(친 한동훈)계인 국민의힘 정성국 의원으로부터 “총장님 입맛에 맞는 정치평론가의 글을 단톡방서 읽을 이유는 없다”고 비판받았다. 김 후보로선 사태가 끝난 이후에도 후보 교체 시도를 정당화하는 이 전 총장을 유임시킬 이유가 없었다.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으므로 권 원내대표까지 교체해 파문을 확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김 후보가 당의 주도권을 확실히 휘어잡을 기회를 잡은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선대위를 움직일 당 사무총장은 빨리 교체해야 했다. 김 후보는 권 원내대표를 유임시켜 ‘휴전’ 메시지를 보낸 후 친윤계와의 암묵적 합의를 거쳐 김 비대위원장을 임명했다. 이어 실권을 행사하는 사무총장을 신속하게 확보했다. 국민의힘 대선후보 교체 시도는 1991년 8월 발생한 소련 공산당 보수파의 쿠데타를 연상시킨다. 보수파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는 KGB 알파그룹과 전차부대 등이 동원돼 신속하게 진행된 군사작전이었다. 쿠데타는 실패했고, 소련은 해체됐다. 이처럼 정치적 기획을 군사작전처럼 몰아쳐 진행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다. 윤 전 대통령은 이런 식으로 당 대표 2명과 비대위원장 1명을 쫓아낸 적이 있다. 더불어민주당 황정아 대변인은 지난 10일 “윤석열 지령, 국민의힘 연출로 시작된 대선 쿠데타”라고 주장했다. “행보가 약하다” 윤 전 대통령도 본의 아니게 자수 아닌 자수를 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 11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그런데 이 게시글엔 “김 후보를 지지하셨던 분들도 이 과정을 겸허히 품고 서로의 손을 맞잡아야 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김 후보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한 게시글을 수정 없이 그대로 올렸다. 김 후보와 친윤계의 대결이 ‘휴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게시글이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 등 친한계는 지도부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김 후보를 거들었다. 이 중 친한계 좌장 6선 조경태 의원은 김 후보와 한덕수 전 국무총리의 단일화 논란이 분분했던 지난 9일에도 “무책임한 외부 인사 영입을 통해 대선을 치를 거라면, 경쟁력 있는 이재명 후보를 데리고 오는 게 빠른 거 아니냐”면서 김 후보를 두둔했다. 이를 두고 “당원투표서 김 후보 교체 시도가 부결됐던 이유 중 하나는 친한계 당원들의 반대 움직임”이라고 보는 일각의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김 후보와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및 탄핵 등 여러 사안서 의견이 엇갈렸다. 두 사람은 국민의힘이 대선서 패배하면 다시 진행될 가능성이 큰 당권 투쟁의 잠재적인 경쟁 상대다. 김 후보는 56.53%를 얻어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한 전 대표가 얻은 43.47%도 무시하긴 어려운 수치다. 친한계 일원인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은 지난 12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한 전 대표의 선대위 참여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 전 대표는 지난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비상계엄 및 탄핵 반대에 대한 사과 ▲윤 전 대통령 부부와의 절연 ▲한 전 총리와의 단일화 약속을 내걸고 후보로 선출된 것에 대한 사과 등 자신의 선대위 참여 조건을 제시했다. 김 전 최고위원은 이를 언급하면서 “김 후보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김 후보는 당내 유력 계파들인 친윤·친한과의 불씨를 두고 있다. 두 계파 모두 앙숙이기 때문에 김 후보로선 두 계파 모두를 포섭하기도 쉽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2026년엔 국회의원들의 ‘대목’이라고 볼 수 있는 지방선거가 진행된다. 불씨가 들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최소한 선거 상황에선 김 비대위원장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 후보도 바보가 아닌 한 대선 승리 가능성이 크지 않단 것은 잘 알고 있다. 그 자신도 친윤계의 쿠데타로 인해 정당하게 선출된 후보직을 잃을 뻔했다. 대선 이후엔 곧바로 당권 투쟁이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김 후보가 대선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잃지 않고 당을 장악하려면 당권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김 후보에게도 우군이 필요하다. 남겨놓은 갈등 불씨 김 후보는 지난 2020년 1월 국민의힘의 전신 자유한국당을 탈당한 이후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와 돈독한 친분을 유지했다. 같은 해 8월 발생한 사랑제일교회 코로나19 집단감염 사건 이후에도 경찰이 자가격리 조치를 어기고 집회에 참석한 사랑제일교회 일부 신자를 연행하려고 하자 이를 막는 등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김 후보는 “내가 김문수인데, 왜 가자고 그러느냐”라거나 “내가 국회의원을 3번 했다”는 등 호통을 치는 등 경기도지사 재임 당시 119에 전화해 갑질했던 ‘도지삽니다’ 사건을 연상시키는 언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전 목사는 후보 교체 시도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전 목사가 주도하는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국민운동본부(이하 대국본)는 지난 10일 국민의힘을 규탄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전 목사는 이날 “멀쩡하게 뽑아놓은 김문수를 아웃시키고, 한덕수를 영입했다”며 “국민의힘이 사기 치는 것 봤죠? 이건 완전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대국본도 같은 날 배포한 입장문서 “국민의힘은 종북 좌파와 맞서 싸우겠다는 애국 보수만 나타나면 알레르기 반응부터 보인다”고 비판했다. 김 후보는 지난 8일 관훈토론회 초청 토론회서 “광장 세력과도 함께 손잡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은 기독교의 교회 조직과 말씀 때문에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가 버티고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전 목사 등 강경보수 성향 일부 교계를 극찬했다. 당내 지분이 전혀 없는 상황서 친윤·친한 모두와 경쟁해야 하는 김 후보로선 우군이 절실하다. 김 후보는 강경보수 세력 내부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와도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김 후보는 지난 4월24일 전씨의 유튜브 채널 ‘전한길뉴스’에 출연했다. 전씨는 전 목사의 경쟁자로 통하는 손현보 세계로교회 목사와 연결돼있다. 전씨는 김 후보의 선거 전략을 분석하면서 “김 후보가 기득권 정치와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축하고, 호남 지역 표심을 공략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TV 토론서 압도적 존재감을 발휘하고, 막판에 보수 우파가 단합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 목사와 전씨는 윤 전 대통령 탄핵 국면서 보수 진영 내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두 사람의 영향력은 인원 동원 능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들을 국민의힘 내부에 유입시켜 전당대회서 승부를 본다면, 김 후보가 국민의힘을 장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지방선거서 급한 일은 의원들의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에 개입하는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역구 국회의원의 영향력 아래서 손발 노릇을 하는 기초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장악하면, 의원들의 손발을 묶어둘 수 있다. 후보 교체 시도 5적 지역구서 공천 전쟁? 김 후보와 충돌할 가능성이 큰 의원은 ▲권 전 비대위원장 ▲권 원내대표 ▲이 전 총장 ▲성일종·박수영 의원이다. 이 중 이 전 총장을 제외한 4명에 대해선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 지난 11일 자신의 페이스북 게시글서 ‘4적’이라고 주장했던 적이 있다. 홍 전 시장은 “경선을 혼미하게 한 책임을 지고, 의원직 사퇴·정계 은퇴하라”고 주장했다. 이들 중 지도부였던 ▲권 전 비대위원장 ▲권 원내대표 ▲이 전 총장은 후보 교체 시도를 직접 진두지휘했다. 성 의원은 김 후보와 한 전 총리의 단일화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박 의원은 김 후보의 캠프에 참여했지만, 김 후보가 단일화와 관련해 신경전을 이어가자 “김 후보 주변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한 전 총리는 가라앉고, 김 후보가 단일후보가 될 것’이라는 식의 논리를 퍼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김 후보를 일컬어 “전형적인 좌파식 조직 탈취 시도를 하고 있다”는 비난도 이어갔다. 김 후보는 대선후보 자격이 취소됐던 지난 10일 기자회견을 개최해 스스로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김문수”라면서 지도부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어 캠프 내 측근들과 함께 국민의힘 중앙당사를 방문해 대통령 후보실을 점거했다. 이를 놓고 일각에선 “왕년의 투사 김문수가 돌아온 것이냐”고 반응했다. 이날 김 후보의 대응을 돌아보면, 대선 이후 당권 투쟁서 물러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독자 영역을 구축한 친윤·친한과 달리 김 후보는 외부 세력을 당내에 유입시키기 위한 명분부터 구축해야 한다. 대선서 패배하더라도 의미 있는 득표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 전 시장은 자유한국당 후보로서 대선에 출마했지만, 보수 정당이 분열됐던 여파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불과 785만여표(약 24%) 득표에 그쳤다. 이는 역대 대선 직선제 2위 후보 중 당선자와 최다 표차 낙선과 보수 정당 최저 득표율이었다. 홍 전 시장은 대선 패배 이후 약 3주 동안 미국을 방문한 후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 대표로 당선됐다. 예나 지금이나 당내 세력이 미약한 홍 전 시장은 당의 하락세를 막지 못했고, 지난 2018년 지방선거 패배 책임 차원으로 당대표직서 물러났다. 대선서 많은 득표를 하지 못했던 것도 홍 전 시장의 지도력에 힘이 붙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따라서 김 후보로선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당을 장악하기 위해선 패배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득표를 해서 명분을 쥐는 것이 중요하다. 이 후보와의 단일화 시도를 완전히 접지 않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한선 35% 무너지나 YTN이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지난 11~12일 이틀간 무선 100% 전화 면접 방식으로 진행했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김 후보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보다 13% 뒤처진 33%의 지지를 얻었다. 김 후보가 설령 대선서 패배하더라도, 국민의힘을 장악하려면 40% 이상의 독자 지지율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최저 하한선은 35%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 후보에겐 승패 여하를 떠나 많은 것이 달린 대선일 수밖에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