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일제 말기에 들어 식민지 조선의 주민들은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으로 전시체제하의 고통스러운 삶을 강요받았다. 조선인으로선 처음 겪는 전시체제하의 일상생활은 끊임없는 동원과 수탈로 인해 의식부터 식생활에 이르기까지 통제받았다.
특히 조선은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라는 역할이 주어져 타 식민지보다 더 깊숙하게 전쟁체제에 편입됐다. 이는 각종 공출, 징용, 징병, 부역, 헌금 등 제도로 정착돼 조선사회의 뿌리인 촌락과 농민의 일상까지 질적으로 변화시켰다. 당시 사회는 90% 이상의 인구가 농촌에 거주했고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서민들 역사 복원
창씨개명과 정치동원
그간의 일제강점기 연구는 식민당국자가 발행한 자료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식민 통치자의 시선으로 구성된 연구가 주를 이뤘으나 최근 <일기로 구성한 일제말 전시체제하의 일상>(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이라는 연구논문이 나와 일제강점기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아래로부터의 역사 구성’을 시도했다. 특히 1930∼40년대에 전쟁 수행을 위해 수립한 지배체제는 해방 이후에도 연속성을 띠고 오랫동안 운영된 점, 현재에도 남북한 모두 그러한 구습과 제도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논문에 등장하는 일기는 모두 4편으로, 일기의 저자 중 3명은 보수적 유생이자 중소지주이고, 나머지 1명은 식민지기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문학적 감성을 가진 폐병을 앓는 신식 지식인이다.
정강일기(1938∼1948)의 주인공 김주현은 경제력과 구학력을 갖춘 유지다. 치재일기(1911∼1962)의 주인공 김인수(1892∼1962)는 평생 동안 전통 의복을 고수하며 양복을 비롯한 모든 서양문물을 거절했다.
8·15 이후에도 직접 짚신을 삼아 신었으며, 손자가 학교에서 상투가 잘려왔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심정을 밝혔다. 김인수는 1925년 세상을 한탄하고 충북 중원군 동량면 하곡의 개천산으로 들어가 28년간 두문불출했다.
관란재일기(1912∼1947)의 저자 정관해(1873∼1949)는 보수적 유생이었지만 용인지역이 세상의 변화와 소식을 빠르게 수용하는 곳이어서 세상의 변화에 민감했다.
추탄일기(1936∼1942)를 쓴 박정락(1914∼1943)은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과 야학활동을 하다가 1932년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될 때 외곽조직인 Y그룹 활동과 관련해서 함께 체포됐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독서와 글쓰기 등으로 소일하면서 지역 유지로 활동하다가 1943년 30세 때 지병인 폐병으로 사망했다.
이들의 일기를 통해 식민지기 농촌의 인력동원(징용, 부역, 징병)과 물자동원(강제저축, 공출, 헌금), 창씨개명 등의 양태를 엿볼 수 있다.
정강일기의 1941년 11월 기사에 의하면 “집집마다 가는 모래 1석, 물 1동이를 문 옆에 비치하고 일본 국기를 게양하라 했다. 물어보니 경방대 방공연습이라 한다. 방공이란 것은 외국 비행기가 내공하여 폭격하는 것을 방어하는 것이니, 과연 내공한다면 어찌 그것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민심을 소동케 하는 것일 뿐이다”라며 염려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방공(비행기 폭탄) 훈련을 확대하면서 방공업무가 농촌 주민의 일상 속에 연래행사로 강요됐음을 드러내고 있다. 시골 유생에게 이것은 생경한 행정 간섭이었다. 현재에도 실시되는 방공훈련이 태평양전쟁 이후부터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집회와 시국동원에 대해선 치재일기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각종 시국좌담회, 중일전쟁 승전축하회, 싱가포르 함락 축하회, 한구 함락 축하회, 군인출정 환송식 등의 시국집회와 가마니짜기 장려회, 양잠강습회, 식량좌담회 등의 생산 관련 모임이 나타난다.
보수적 유생 3명·신식지식인 1명 기록서
일제 수탈에 찌든 모습 생생하게 나타나
일기의 주인공은 전쟁 초기엔 시국집회에는 물론이고 유림간담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면장이 불참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한 뒤부터는 시선을 의식해서 참석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치재일기는 창씨개명에 대해 주인공 김인수가 최대한 버티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인수는 “소위 창씨라 하는데 예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거부의사를 밝혔다. 면에서 여러 차례 창씨를 강요하고 협박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마침내 주재소가 나섰다.
창씨 문제를 둘러싸고 식민권력과 일기의 주인공 사이에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그러나 주인공의 신변에 큰 문제가 일어나진 않았다. 이후의 일기에서도 창씨 때문에 주재소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끝내 창씨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인수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일본식 이름이 없이는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취직을 하거나 배급표를 받을 수도 없었다. 조선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총독부는 허가증을 발급해주지 않았고 우체부는 우편물을 배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조선인들이 새 이름 안에 자기의 조선이름, 고향, 중요한 가문의 특징을 기발한 방법으로 반영해 넣었다.
힐디 강의 <검은 우산 아래에서>(2011, 산처럼) 속 구술자 중 한 명인 김원극(1918년생)씨는 여러 차례 종친회를 열어 창씨개명에 따를지 여부를 놓고 격한 토론을 벌였다고 진술한다. 세 번째 회합 만에 집안 큰 어른의 결정으로 창씨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씨는 “적어도 우리 지역(함북)에선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징용의 최우선 대상이 됐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가네쿠니(金國), 가네자와(金澤), 가네다(金田), 최(崔)씨는 야마모토(山本), 이(李)씨는 기모토(木元)라고 이름 짓는 식으로 자기의 정체성과 전통을 보호하고자 했다.
강제적 동원 후
죄인 다루듯 관리
정강일기의 주인공 김주현은 노동력의 강제동원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월19일자 일기에 따르면, “17∼55세의 조선 인민을 모두 저들의 모집 징용 장부에 기재하였다. 그 명목은 병정이요, 군속이요, 역부요 하며, 연령징용, 일반징용, 특별징용의 구별이 있다. 여자 역시 14∼25세로 미혼인 자, 과부인 자,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는 자는 방직공장과 군부조수로 징용한다.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 역시 끌어가니 이는 오랑캐요 짐승”이라고 해 강제동원의 유형과 실태를 잘 정리했다.
치재일기에선 조선총독부의 선전용어인 ‘산업전사’라는 명칭으로 동원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1941년 5월22일 장남이 산업전사로 부역을 나간 것이 최초의 기사였고, 1942년부터는 산업전사 선발에 관한 내용이 자주 언급됐다.
8월 이강길이 산업전사로 선발됐으나 나이가 많아 불합격한 이야기나 5형제 중 장남을 제외한 4형제 모두 일본으로 모집돼 간 집 이야기, 남양군도로 끌려간 이웃집 아들은 생사불명이고, 남겨진 부인과 딸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다는 내용 등 산업전사에 관한 내용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관란재일기에 따르면 중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937년에도 강제적인 동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흥의 해저철도 건설에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신청자 중 가지 않으려는 사람을 경찰이 강제로 데려갔다고 썼다. 문촌리(관란재일기 주인공이 사는 마을)의 국내동원은 주로 ‘근로보국단’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됐다.
정강일기에선 집안 머슴과 둘째 아들, 막냇동생이 징용령으로 신체검사를 받고 징용을 갔다. 일제의 징용은 구체제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렸다. 징용이라는 이름 앞에선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 월 평균 1회 이상 징용 관련 내용이 일기 속에 등장한다. 관란재일기와 치재일기는 모두 1944년 10월부터 산업전사나 근로보국단이 아니라 ‘징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정강일기는 “1943년 7월 저들의 북선 역부모집령이 몹시 심하여 소위 면리원이라는 자가 조석간에 마을마다 수색하여 저들의 공장에 부역할 만한 자(18세 이하 30세 이상자. 북선, 남양 등 정해진 바를 알지 못한다)를 보면 마치 죄인 다루듯이 바로 잡아간다. 이 같은 폐해가 2∼3달 가면 본지의 농사를 지을 자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적었다.
“창씨 안하면 징용 대상”
의식주 통제 실상 담아
치재일기의 1938년 12월엔 “오늘은 소위 군용모피의 독촉일이다. 저녁에 떠들고 요란을 피워 오늘 어쩔수 없어 기르던 개를 삶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제는 가마니, 개가죽, 돼지가죽, 백미, 대두, 면화, 누에, 소, 벼, 보리, 철기 등 전쟁물자를 민간에서 공출했다.
특히 군용 가마니를 할당 받아 온 가족이 모여 앉아 가마니 짜기에 열중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가마니 짜기는 중일전쟁 전부터 부업으로 장려돼 왔으나 전쟁 이후엔 군수용 가마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군용가마니 공출은 2차대전 내내 사람들을 괴롭혔다.
가마니 짜기가 완료되자 ‘앓던 이 빠진 기분’이라고 쓴 관란재일기의 주인공 정관해의 심정은 그 고충을 잘 표현한 것이다. 식민당국은 가마니공출을 마을 단위로 할당한 뒤 주민들 중 완수하지 못한 분량은 완료한 집에 다시 할당했다.
김인수는 “식구들을 거느리고 매일 가마니를 짜니 가소로울 뿐이다”라고 적었다. 양반인 그가 가마니를 짜는 데 익숙하지 못해 할당량을 채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마니공출을 완료하지 못한 집은 지붕을 새로 이는 것을 금지했다.
정강일기 1942년 9월엔 “군면이원이 또 모미(보리와 쌀)를 수색하러 출장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땅을 파서 5∼6일의 양식을 묻었다. 모두 가족의 바람을 따른 것이다. 다행히 저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오호 고소하도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숨겨둔 곡물이 발견된 집은 호주를 잡아갔다. 공출량이 부족하면 주재소에 고발하겠다고 하거나 태형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공출에 비협조적인 집은 징용을 보내는 방법도 썼다. 박창서가 반드시 공출 때문에 징용을 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주민들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전쟁에 따른 상시적 물자부족은 촌락공동체 내부에도 균열을 가져왔다. 관지리는 공동체의 유대감이 강한 편이었다. 변종근 집에 도둑이 들어 양식과 옷을 모두 도난당하자 모두 어려운 형편에도 십시일반 해 도와줬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도 누군가가 곡식을 숨겨둔 것을 주재소에 밀고했다. 관란재일기에도 유사한 사건이 발견된다.
정강일기에선 막냇동생 김주해를 비롯해 김한표, 변종배, 백민교 등의 기사가 있다. 사위 김한표는 벌금을 내지 못해 징용당한 경우다. 1944년 2월29일자의 일기를 보면, 하곡마을에서 징용대상자 전체가 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주재소는 가족을 감금해서 도망자가 출두하도록 했다. 출두하지 않은 집은 나이에 관계없이 사람을 끌고 가서 할당량을 채웠다.
정강의 장남도 징용을 피해 도망쳤다. 장남은 1943년11월에 황실불경죄로 체포돼 이듬해인 44년2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7월에 ‘전과자 징용령’으로 소환장을 받자, 몸을 피했다. 장남은 도피 도중 간간이 집에 들렀으나 연말까지 숨어있었다.
공포의 할당량
소극적 저항도
징용자들의 도주는 신문을 통해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유포시키는 기능도 했다.
정강일기 1945년 7월7일자 일기를 보면 징용갔던 “변한희가 일본 동경의 공장에서 도망쳐 와서 말하길, 동경은 영미의 폭격을 받아 거의 멸망에 이르렀다 한다. 듣고 보니 통쾌하지만, 왜놈들 죽는데 조선인도 죽으니 비통하다. 질아, 창흠, 병흠 소식이 거의 끊겨 우울하다”고 쓰고 있다. 전쟁 말기의 보도 통제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징용을 다녀온 이가 일본 본토의 공습을 전해준 것이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기에서 쉽게 확인되는 각종 국방헌금과 여러 유형의 공출은 전시체제기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며 “인적, 물적 수탈과 통제 하의 일상이 모여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으로 형성됐으며, 이것이 세대를 거쳐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