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기 북부 지역서 연쇄 살인범이 다방 여주인 두 명을 연이어 살해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유형의 잔혹한 범행이 처음은 아니며, 이보다 훨씬 더 경악스러운 범행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살인범이 두 명의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반성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연쇄 살인범이 거쳐온 시간과 삶의 방식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살인범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다. 그가 지난 20여년을, 흔히 말하는 교도소서 형을 사는 수형자, 재소자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교도소는 유죄가 확정돼 자유형을 선고받은 범죄자를 수용해 다양한 처우로 교화시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다. 때 묻은 옷을 세탁소에 보내듯 범죄인이 교도소라는 세탁소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교도소를 세탁소가 아니라 염색공장이라고 비난한다. 교도소에 들어갈 때보다 더 나빠지기가 더 쉽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먼저 우리의 교도소가 너무나 큰 시설에 너무나도 많은 재소자를 수용하기에 제대로 된 처우를 제공하기가 어렵다. 정상적인 사람을 폐쇄된 공간에 수용하면서 질서정연하게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 마당에,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폐쇄된 공간서 치료·교육·훈련·교화·개선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만약 재소자끼리 영웅담처럼 주고받는 범죄 이야기를 통해 범행 수법을 배우는 범죄학습의 현장이 된다면, 출소와 함께 동창이 돼 또 다른 공모를 한다면, 우리 사회가 그들을 전과자로 낙인찍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제하려 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건전하고 생산적인 준법시민으로 사회에 뿌리내릴 수 없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래서 몇몇 사람은 교도소를 ‘범죄 예비군’을 잉태하는 ‘콘크리트 자궁’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마치 전쟁 발발 등 비상사태에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는 예비군처럼, 적지 않은 출소자는 언제라도 범죄라는 전쟁에 나설 수 있는 ‘범죄 예비군”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교정정책은 범죄자와 사회가 다시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위 ‘사회 재통합(Social Reintegration)’을 강조하고 있다.
절대 다수의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범행하지 않는 반면 극소수 사람이 범행을 감행한다면, 범죄의 원인이 유전이라도, 더구나 사회적 환경이라도 같은 처지의 유전적 소인을 가지고도, 같은 사회 환경서도 건전하게 살아가는 절대다수에 비견해 당연히 자신이 선택한 범행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 책임의 일부는 형벌일지라도 나머지는 자신의 교화와 개선이 있어야 한다. 사회가 시민이 범행에 이르게 하는 요소나 원인을 제공했다면 그런 범죄를 유발·조장·촉진한 요인을 해소하는 사회적 변화와 개선도 필요하다. 변화하고 개선해 사회로 다시 재통합되지 않는 한 전과 몇 범의 누범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윤호는?]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