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휴민트, 버려서는 안 된다

2024.01.15 15:50:18 호수 1462호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앞둔 시점에 <뉴욕타임스>는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 등을 담은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가 대량 유출됐다고 보도했다.



유출된 문서 중엔 우리나라 국가안보실장과 외교비서관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건에 대해 나눈 대화 내용도 포함돼있었다. 

당시 대통령실은 전파장비나 통신망을 활용한 시긴트 방식이 아닌 사람의 접촉을 활용한 휴민트 방식으로 정보가 유출됐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11월 국회 운영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모 의원이 도청 논란과 관련해 시민단체가 미국 측 당국자들을 고발한 사건에 대한 경찰의 각하 결정문을 <서울신문>에 공개하면서 시긴트가 아닌 휴민트에 의해 유출됐다는 게 밝혀졌다.  

현대는 수많은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고 그중 핵심 정보가 성패를 가르는 정보시대인 만큼, 특히 국가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은밀하게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국가가 은밀하게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에는 휴민트(Humint), 시긴트(Sigint), 이민트(Imint) 3가지가 있다.


휴민트는 인간 정보수집(Human Intelligence)의 약어로, 인맥을 활용해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주로 국정원, 경찰 등에서 활용되며 국가 간 정보를 얻을 땐 대상 국가의 정부나 군사기관에 잠입해 정보를 획득한다.

시긴트는 신호 정보수집(Signal Intelligence)의 약어로, 통신망이나 전파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며, 최근 IT가 발달하면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민트는 이미지 정보수집(Imagery Intelligence)의 약어로 위성이나 드론 등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며, 주로 대상 국가의 군사시설, 지형 등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방식이다.

사실 시긴트나 이민트는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휴민트는 대상 국가나 조직에 침투해야 하니 항상 위험에 노출돼있다. 그래서 국가는 휴민트들의 미래나 노후를 보장해야 한다.  

필자는 1980년대 중반 모 그룹 입사 2년 차 때 방글라데시 주재원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Non-Quota 지역이었기에 한국서 방글라데시로 원부자재를 보내고 현지서 완성품을 생산해 전 세계로 수출하는 3자무역의 전초기지였다.  

방글라데시로 떠나기 전날 중역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해서 여의도에 있는 고급 식당에 갔더니 사장이 와 있었고, 그는 중역을 나가라고 하더니 필자에게 Secret Mission(사장과 단 둘만 아는)을 줬다.

미션은 매일 지사 업무 외에 방글라데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상황을 매일 텔렉스(당시 팩스가 없었음)로 직접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당시 일본 정부가 외국에 나가 있는 주재원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해 정책에 반영해 1등 국가를 꿈꾸고 있으니, 우리 그룹도 세계적인 1등 그룹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이후 방글라데시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필자는 방글라데시 정치인, 경제인, 정보요원 등을 계속 만나면서 고급정보를 수집해 보고했다. 소설도 번역해서 보냈고, 방글라데시 최고 대학인 다카 대학 출신들과도 인맥을 만들며 방글라데시의 모든 정보를 수집해 지사 직원들도 모르게 본사 사장에게만 직보(직접 보고)했다.

그런데 방글라데시서 근무한 지 2년 쯤 됐을 때 여의도 본사로부터 한 달 안에 방글라데시 지사를 철수하라는 전문을 받게 됐다.


필자는 2년 동안 방글라데시의 모든 상황, 특히 국민성과 비전을 봤기에 본사에 지금 철수하면 안 된다고 강력히 철수 거부 의사를 보고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진출을 위해 방글라데시를 포기하기로 사장 결재가 났다는 본사의 답장만 왔다.  

그후 방글라데시 지사를 정리하고 귀국했을 때 마중 나온 직원과 대화하면서 필자가 사장의 개인적인 욕망에 의해 버려지는 카드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돼 바로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나왔다.

결국 필자는 방글라데시서 2년 동안 산업 휴민트로 활동했고 회사로부터 버려지는 카드였다는 자괴감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국가 휴민트건 산업 휴민트건 버려지는 카드여선 안 된다. 국가나 회사를 위한 카드가 아닌 소집단이나 개인의 유익을 위해 휴민트가 헌신짝처럼 버려져서도 안 된다.   

지난 주말 아내와 집에서 영화 <공작>을 봤다.

북한 핵을 막기 위해 사업가로 위장해 북한에 침투해 광고사업과 골동품 사업을 발굴하며 최선을 다한 국가 휴민트 흑금성(황정민)이 국가도 아닌 정당의 유익을 위해 버려지는 카드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방글라데시서 2년 동안 산업 휴민트로 활동했던 모습을 회상해 봤다.

미국처럼 휴민트를 철저히 보호하고 보상해주고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믿음을 국가나 기업이 심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나 기업의 장래는 밝을 수 없고, 국가나 기업이 휴민트를 버리듯이 휴민트도 언젠간 국가나 기업을 버리고 말 것이다.

미국은 휴민트가 수집한 정보로 만든 기밀문서를 유출한 자는 엄하게 처벌하되, 정보를 수집한 휴민트는 절대 처벌하지 않고 끝까지 보호한다.


최근 4월 총선을 앞두고 정당 휴민트가 많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시긴트보단 많지 않지만, 그래도 상대 정당의 핵심 정보를 수집하는 일등공신은 휴민트다.

그런데 정당 휴민트가 들통 나거나 선거가 끝나면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게 비일비재하다. 정당 휴민트가 자살하거나 감옥에 가는 사례도 많다. 

국가 휴민트와 산업 휴민트뿐만 아니라, 정당 휴민트도 보호받아야 하고, 그외 어떤 휴민트도 오더를 내린 국가나 조직으로부터 철저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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