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제80차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22일 오전 출국했다. 이 대통령은 26일까지 뉴욕에 머물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공개 토의 주재를 비롯해 유엔총회 기조연설, 미 상하원 의원단 접견, 뉴욕 동포 간담회, 외국 정상 미팅 등 3박5일간의 일정을 소화한다.
이 대통령이 5일 동안 국내에 없는 사이 더불어민주당은 출범 100일을 넘긴 이재명정부의 국정 운영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오는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처리하기로 했다. 이진숙 방송통신위 체제를 개편하기 위한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법도 동시에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민주당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지난18일 행정안전위 소위에서 통과시켰고, 22일 국회 행정안전위 전체회의를 거쳐, 23~24일 법제사법위원회 심사 후, 25일 본회의에서 최종 처리할 예정이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검찰청 폐지 및 중대범죄수사청(수사 담당)·공소청(기소 담당) 신설, 기획재정부를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로 분리, 기후에너지환경부 설치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개정안은 법률 공포 1년 후 시행된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지난 8월20일 이 대통령과 민주당 지도부가 추석 전까지 꼭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던 법안으로, 이 대통령의 공약이자 이정부의 국정 운영에 발판이 되는 법안이다.
국민의힘은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방통위 개편법 본회의 통과를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를 하겠다고 하지만, 절대 다수 의석의 민주당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살라미 전술’로 법안을 하나씩 처리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이를 막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검찰청이 폐지되고 정부 주요 조직이 바뀌는 이렇게 중대한 법안을 민주당은 왜 이 대통령이 국내에 있지 않고 해외 체류 중 처리하려는 걸까?
어차피 이 대통령과 이정부가 원하는 법안인데 왜 긴밀하게 소통하며 법안을 처리하지 않고, 이 대통령이 해외에 있을 때 처리하려는 걸까?
이정부가 여소야대 정부라면 국정 운영의 기틀이 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야당을 설득하고 회유해야 하기 때문에 이 대통령이 국내에 있을 때 민주당이 법안을 처리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정부가 여대야소 정부여서 이 대통령이 직접 야당과 맞부딪히지 않은 상태에서 법안을 통과시켜, 이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강경 대응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 대통령의 해외 체류 중 처리하려는 민주당의 속셈 같아 안타깝다.
또 이 대통령의 해외 체류 중 통과된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해 이 대통령이 굳이 즉각 반응하지 않아도 되고, 귀국 후에도 여당이 주도한 사실을 존중하는 모양새를 취하면 자연스럽게 법안 통과에 대해 민주당이 책임지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전략도 궁색해 보인다.
필자는 이정부가 정권교체를 이룬 민주당과 함께 책임정치를 해야 하는 데, 이 대통령이 해외 체류 중 중대 법안을 졸속 처리해 이 대통령에게 부담을 덜어주려는 전략은 좋지 않은 꼼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설령 민주당이 독자적으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밀어붙여 처리했다 하더라도, 국민 눈에는 결국 ‘이 대통령이 한 일’로 비쳐져 오히려 이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 대통령과 민주당이 간과하면 안 된다.
즉 민주당의 이런 행동은 이 대통령에게 단기적으론 부담을 덜어주지만, 장기적으론 더 큰 부담을 안길 수 있는 양날의 칼이라는 점이다.
역대 정부도 대통령 해외순방 중 국회가 본회의를 열어 법안을 처리한 전례가 많았다.
김대중정부 때 IMF 관리 체제 극복 과정에서 김 대통령이 해외 정상외교에 나선 시점에 국회는 금융 구조조정 관련 법안을 단독 처리했다. 당시 야당은 대통령이 귀국 후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점을 노리고 법안 처리를 서둘렀다.
노무현정부 때도 노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 열린 본회의에서 국회 탄핵소추안이 처리됐다. 물론 탄핵은 대통령 부재 시점을 노린 것이 아니라 정국 격돌의 결과였지만, 해외순방 중 국회가 독자적으로 정치적 파장을 키운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이명박정부 때도 이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 야당이 단독으로 상임위를 열고 미디어법 처리를 강행했고, 박근혜정부 역시 박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 세월호 특별법, 정부조직법 일부 개정안이 통과됐다. 문재인정부 때도 문 대통령의 해외순방 중 예산안, 부동산 관련 법안 등이 처리됐다.
윤석열정부 때도 윤 대통령의 해외 체류 중 민주당 주도로 채 상병 특검법이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윤 대통령은 해외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
당정이 사이가 좋지 않아 민주당이 대통령실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이 대통령의 해외 체류 중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했다면 이해가 되지만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민주당과 대통령실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이 없는데 이해가 안 된다.
정청래 대표의 민주당이 대통령실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이 대통령의 해외 체류 중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처리하려 했다는 논리도 설득력이 없다.
대통령 해외순방 중 국회가 본회의를 열어 법안을 처리하는 것은 한국 정치에서 반복되고 있는 좋지 않은 기회주의적 전략이다. 즉 이번 민주당의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 시도도 과거 전례의 정치 공백기 활용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이 대통령의 유엔총회 참석에 맞춰진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국회 법사위, 본회의 통과 일정이 추석 전 처리라는 미션과 함께 미리 짜여진 각본 같아 더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