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AI 고속도로? 사람의 속도가 빠진 미래는 위험하다

2025.11.05 09:30:52 호수 0호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설명하는 시정연설에서 “AI 고속도로가 늦으면 한 세대가 뒤처진다”고 말했다. 연설 속 ‘인공지능’은 28번 등장했지만 ‘노동자’, ‘존엄’, ‘불안’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미래를 설계했지만, 그 미래까지 걸어가야 할 ‘사람의 속도’는 없었다. 기술이 앞서 달리고 있는 시대, 인간의 속도는 어디쯤에 서 있는가. 이것이 지금 한국 사회가 마주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다.

기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기술의 시간은 직선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뻗어나가며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원을 그리며 돌아온다. 상처를 받으면 멈추고,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용기를 모아야 한다. 로봇은 고장 나면 재부팅하면 되지만, 인간은 다시 걷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플랫폼은 24시간 돌아가지만, 사람은 잠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이 두 시간이 겹치지 못하면 사회는 균열된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바로 그 틈새다.

AI는 코드를 짜고, 로봇은 서빙을 하고, 챗봇은 감정을 흉내낸다. 플랫폼은 우리의 소비, 이동, 감정까지 설계한다. 하지만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인간의 불안, 외로움, 존엄은 코드로 환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책의 언어는 ‘혁신’과 ‘속도’를 반복한다. 늦으면 도태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길을 뛰어야 할 청년들은 카페에서 취업 준비를 위해 또 하나의 오늘을 버티고, 50대 가장은 재교육과 구조조정 사이에서 삶의 의미를 되묻는다. 스마트폰을 인증하다 실패한 노인은 은행 창구에서 돌아선다. 기술은 내일을 말하지만, 사람은 오늘을 버틴다. 그 간극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외면해온 가장 현실적인 틈바구니다.

AI 시대 플랫폼의 편리함과 그림자

AI 시대의 산물인 플랫폼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지만, 그 편리함은 누군가의 밤과 건강, 시간과 감정을 잘라 만든 결과다. 버튼 하나로 새벽에 음식이 도착하고, 클릭 한 번이면 이튿날 아침 택배가 문 앞에 놓인다. 그러나 그 뒤편에선 누군가는 영하 10도의 냉동창고에서 손끝이 얼어붙도록 배송할 물품을 분류하고, 누군가는 비 오는 밤 화물차 위에서 졸음을 참으며 달린다.

플랫폼은 인간을 돕는 기술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노동을 보이지 않도록 숨기는 기술이기도 하다. 택배 기사와 배달 라이더는 ‘개인 사업자’라는 이름표 아래 4대 보험도, 정년도, 기본 휴식도 보장받지 못한다. 앱을 끄는 순간 소득도 사라진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니면서 동시에 자유도 없다. 노동과 책임이 노동자에게 있는데, 비용과 위험 역시 그들의 몫이다.

수도권 물류센터에서 심야에 사람보다 로봇이 먼저 움직인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끝단의 분류 작업은 사람의 손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그 손은 흔히 데이터나 AI라는 단어 속에서는 지워진다. 강의실에선 50대 남성이 다시 엑셀과 코딩을 배우고, 한편에선 편의점·콜센터·배달 일자리가 중년의 새로운 노동시장으로 재편된다.

퇴근 후 퀵커머스를 뛰는 직장인, 낮에는 회사원이지만 밤에는 플랫폼 노동자로 사는 이들이 늘어났다. 기술이 만들어준 건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쪼개진 생계다.

댓글 창에서는 사람이 사라지고 맥락 없는 말들만 떠다닌다. 얼굴 없는 분노는 알고리즘을 타고 확산된다. 플랫폼은 소통을 확장하지만, 오히려 이해와 존중을 감소시킨다. 누군가의 불행이 클릭 수를 만들고, 타인의 상처가 조회 수가 된다. ‘좋아요’와 ‘싫어요’가 인간을 평가하는 점수처럼 작동한다. AI는 감정을 계산하지만, 인간은 그 감정에 부서진다.

정치는 왜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가

AI 시대의 정치는 기술과 인간의 간극을 메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는 기술보다 더 느리다. 그리고 사람의 고통보다 여론의 속도만 읽는다. 국회는 전자투표조차 완전히 도입하지 못했지만 ‘AI 국가전략’을 말한다. 공무원 사회는 여전히 구두 보고를 하고 있지만, 외부에선 ‘디지털 대전환’을 외친다. 정치는 늘 미래를 말하지만, 정작 현재의 고통을 설계하지 않는다.

필자는 AI 시대에 정치가 실패하는 주요 이유를 세 가지로 본다.


첫째, 기술을 경제 성장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AI를 수출품이나 산업 전략으로는 말하지만, 노동자의 삶이나 지역 공동체와 연결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 정치가 기술의 속도나 인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지만, 국회는 법안을 두고 다투고 피해는 국민에게 전가된다.

셋째, 한국 정치의 언어가 ‘갈등을 조정하는 기술’보다 ‘갈등을 증폭시키는 기술’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유튜브 정치, 팬덤 정치, 분노 마케팅은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갈등을 키워 정치적 이익을 얻는 방식이다.

이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분명히 미래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 연설에는 빠진 것이 있었다. “누가, 어떤 조건에서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기술만 말하고 사람을 언급하지 않는 정치는 결국 사람을 미래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외국은 어떻게 기술과 사람의 속도를 함께 설계했는가

기술의 속도는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지만, 그 속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특히 유럽 국가들은 기술을 경제정책이 아니라 ‘사회적 설계’의 일부로 다뤄왔다.

독일은 인더스트리 4.0을 선언하면서 동시에 노동자를 위한 ‘직업 재설계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자동화로 사라질 일자리를 예측하고, 노동자의 기존 기술을 디지털 산업에 맞게 재배치했다. 단순 교육이 아니라, “기계와 일할 사람이 어떻게 존중받을 것인가”를 정책의 전제로 삼았다.

덴마크는 ‘유연안정성’이라는 시스템을 운영한다. 기업은 필요하면 해고할 수 있지만, 국가는 해고된 노동자가 재교육 뒤 다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실직이 곧 파탄이 되지 않는 구조다. 기술 변화는 곧 기회가 되고, 정부는 이를 관리하는 ‘신뢰의 중개자’가 된다.

핀란드는 기본소득 실험을 통해 기술 자동화 시대의 삶을 실험했다. 일정 소득을 국가가 보장하자, 오히려 사람들이 더 과감하게 창업하고 재교육에 뛰어들었다. 기술이 삶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삶을 재설계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반면, 한국은 기술은 빠르지만 사람을 위한 시스템은 느리다. AI 고속도로는 이미 설계됐지만, 그 길에서 넘어진 사람을 일으킬 안전망은 아직 공사 중이다. 기술은 국가전략이 됐지만, 기술 때문에 뒤처진 사람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기술의 진화보다 사회의 체력이 더 중요하다

기술은 앞으로도 인간보다 빠르게 진화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를 진짜로 만드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사회의 체력이다. 미래는 발명이 아니라 버텨낸 시간 위에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지금 묻지 않으면 안 되는 질문은 “기술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더 빨리 소모되게 만드는가”, “AI는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을 밀어내는가” 그리고 “국가의 역할은 기술을 설계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것인가”이다.

기술의 속도보다 중요한 건 그 속도를 사람이 견딜 수 있는가이다. 이를 위해선 잠시 멈춰 숨 쉴 수 있는 권리와 제도. 실패 후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교육과 복귀의 기회. 기술보다 사람의 존엄을 먼저 생각하는 존중의 문화 등을 잘 설계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없다면 기술은 결국 인간을 소모품으로 만들 것이고, 그런 미래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1970년대,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필자가 다녔던 중학교 과학 선생님은 “언젠가 문명의 이기가 사람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막연한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지금은 AI 시대가 그 서막을 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인간은 지혜로우니 이를 잘 극복하리라 믿는다.

인간이 버틸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미래가 된다

기술은 우리에게 가능한 미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미래를 실제로 살아가는 주체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로봇은 밥을 나를 수 있지만,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지 못한다. AI는 노래를 만들 수 있지만, 그 노래에 담긴 추억과 감정을 대신 느껴주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의 역할은 분명하다. 기술이 미래를 설계한다면, 정치는 오늘을 지켜야 한다. 이재명정부가 진짜 미래를 원한다면 기술의 속도보다 사람의 속도를 먼저 살펴야 한다. AI 고속도로 위에 설 사람들의 호흡, 체력, 존엄을 지키는 것이 정치다.

기술은 성공하고, 인간은 실패하는 사회가 돼선 안 된다. 미래는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때만 진짜 미래가 된다. 이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AI 강국이라는 미래 비전을 밝힌 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AI 고속도로를 걸어가야 할 사람 이야기가 빠져서 안타까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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