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벅스 커피 한잔의 여유, 소소한 소비의 만족감,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하루를 버티게 한다. 불확실한 꿈과 불안은 잠시 밀어두고, 사람들은 확실한 위로를 산다. 이제 모험은 금지됐고, 실패는 낙인이 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가 그렇게 산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용기’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위험’을 경계한다. 세상은 도전의 언어를 잃고, 안전의 기술만 남겼다. 실패를 견디던 시대는 사라졌고, 실패하지 않는 법만이 생존의 기술이 됐다. 불확실성을 감수하지 않는 사회는 편안하지만, 그만큼 생기를 잃는다.
죽지 않기 위해 사는 사회에서는 숨을 쉬는데도 호흡이 없는 느낌이다.
한때 세상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쳤다. 실패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성공의 과정이었다. 지금은 한번의 실수가 인생 전체를 지운다. 금융은 신용을 지우고, 사회는 낙인을 남긴다. 기업은 실수 없는 인재를 원하고, 정치도 불확실한 시도를 두려워한다.
누구도 모험하지 않고, 모두가 안전하게 늙어간다. 효율은 미덕이지만, 인간은 여전히 비효율로 숨을 쉰다. 기술이 발전하는데 인간은 불안하다. 한때 숙련이 생존의 방패였지만 이제는 짐이 됐다.
한 직장에서 평생을 버티는 게 자랑이던 시대는 끝났고, 지금은 오히려 ‘유연하게 이직할 줄 아는 사람’이 칭찬받는다. AI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인구는 줄어든다. 노동할 인간이 줄고, 일할 이유도 줄어든다. 사람보다 알고리즘이 빠르고, 기계보다 느린 인간은 효율의 방해물이 된다.
기술이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오래된 약속은 깨졌고, 대신 인간은 스스로를 불필요한 존재로 느낀다. 하지만 생산 인구가 줄면 경제 활력보다 먼저 줄어드는 게 사회의 상상력이다.
사라지는 상상력의 자리를 메운 건 ‘가성비’라는 새로운 신앙이다. 효율이 믿음이 되고, 불확실성은 죄가 된다. ‘싸게, 빠르게, 확실하게’, 이 세 단어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됐다. 사람들은 시간 대비 효율, 노력 대비 성과로 감정까지 계산한다.
만나면 좋은 사람보다 스트레스가 적은 사람을 택한다. 사랑조차 손해 보지 않는 거래가 됐다. 연애는 연산이 됐고, 우정은 비용이 됐다. 세상은 더 똑똑해졌지만, 마음은 더 어두워졌다. 행복은 여전히 계산서 위에 놓여 있다. 효율은 인간의 생존을 도왔지만, 인간 존재의 의미를 줄였다.
소확행(小確幸)은 이 사회의 감정 버전이다. 커피 한잔, 배달 음식 하나, 조용한 주말. 행복은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결제의 결과가 됐다. 소확행은 평화의 언어 같지만, 사실은 체념의 언어다. “이 정도면 괜찮다”는 말은 따뜻하지만, 그 안엔 포기가 숨어 있다.
효율은 인간의 시간을 구했지만, 인간의 의미를 지웠다. 가성비의 사회는 결국 모험을 낭비로, 실패를 죄로 만든다. 행복은 커졌지만, 감정은 작아졌다. 인간은 효율적이지만, 그만큼 둔감해졌다. 모험은 사치가 됐지만, 그렇다고 꿈까지 팔 수 있을까?
인플레이션은 돈의 가치만이 아니라 인간의 희망도 깎는다. 경제의 풍요 속에서도 체감 가난이 깊어지는 이유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세상은 더 비싸지고, 인간은 더 가벼워진다. ‘노력해도 안 된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진 사회에서 누가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
저출산은 단순한 인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이 사회가 ‘아이를 낳을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선언이다. 불확실한 내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사람들은 오늘을 택한다. 그래서 가성비와 소확행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절망을 관리하는 기술이 되고 말았다.
풍요 속의 결핍, 그 이상한 아이러니다. 서유럽 국가들은 이미 그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 가능한 인구가 줄자 성장도 멈췄고, 복지국가의 부드러운 안전망은 역설적으로 젊은 세대의 모험심을 약화시켰다. 일본은 더 앞서 있다. ‘잃어버린 30년’은 단순한 경기침체가 아니라,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 사회의 초상이다.
한국에서도 현실이 되고 있다. 젊은 세대는 도전보다 안정의 기술을 배우고, 혁신보다 생존의 기술을 익힌다. 사회는 점점 더 안전해지고, 동시에 활력을 잃는다. 리스크를 두려워한 사회는 결국 미래를 잃는다.
모험이 사라진 사회는 늙는다. 새로운 생각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사라지고, 새로운 인간은 낯설다는 이유로 거부된다. 안정은 효율적이지만, 생명은 언제나 비효율적이다. 그 비효율 속에서 인간은 성장하고 문명은 진보한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는 그 불안정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리스크 제로의 사회는 미래 가능성 제로의 사회다. 효율이 문명을 세웠지만, 낭비가 문명을 살린다면 역설일까, 억지일까? ‘대불성(大不成)의 시대’는 허락된 낭만이 아니다. 불확실한 가능성을 수용하는 사회가 아니면 젊은 세대에게 미래는 없다.
청년에게 용기를 주문하기 전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실패한 사람을 복귀시킬 수 있을 때 사회는 다시 젊어진다. 제한된 자원을 두고 기성세대와의 경쟁에 몰아넣고서 왜 결혼을 안 하냐,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고 묻는다.
기회의 문을 닫아놓고, 청년에게 도전 정신을 주문한다. 도전이 사라진 사회에 성장의 연금술 따위는 없다.
대불성은 낭비가 아니라 재생의 조건이지만 요구하기 어려운 이유다. 우리는 다시 실패를 허락하는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 실패가 낙인이 아니라 학습의 다른 이름이던 시절처럼.
크지만 불확실한 성공을 향해 나아가던 그 낭만이 부활할 때, 비로소 인간과 사회는 다시 활력을 얻을 것이다. 가성비의 함수로는 계산할 수 없는, 그 무모한 아름다움. 그것이 문명을 다시 움직이게 할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