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겪었던 우리는 환율 뉴스에 유난히 민감하다. 특히 환율 급등(원화 가치 하락) 소식엔 더 그렇다.
이름이 외환위기라서 그렇지, 당시 국가 경제 파탄 원인 중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이 외화(달러) 부족에 기인한 것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무지한 상태의 우리에겐 트라우마가 있다. 경제위기란 단어가 뉴스에 등장하면 즉각 달러 부족을 떠올린다.
수입 물가를 걱정하는 건 소비자, 그중에서도 서민이다. 수출 대기업은 환율이 오르면 오히려 단기적으론 이익이 늘고 조금 길게 봐도 가격 경쟁력이 커진다.
환율정책이 국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단편적으로 말하는 건 어렵지만, 국민 소비 생활엔 확실히 즉각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수입 생필품과 식품, 원재료의 가격상승은 물가를 직접 자극하기 때문이다.
환율이 급등하면 정부는 시장에 개입한다. 최소한 ‘개입하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 언론을 통해 구두로 개입하거나 때로는 달러를 풀어서 실제로 개입하기도 한다. ‘강 건너 불구경’하느냐는 따가운 여론을 모른 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환율 방어를 위해 실탄으로 쓸 수 있는 달러가 얼마나 있는지,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졌을지 모든 국민이 알 수는 없다. 다만 수출이 늘고 무역 수지도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니 환율 방어에 쏟을 달러가 당장 부족할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시장에선 환율 1400원을 마지노선이라고 부른다. 역사가 입증했듯 마지노선이 깨진다면 더 큰 후퇴를 받아들여야 한다.
스스로 설정한 한계선이란 늘 깨지기 일쑤다. 환율도 결국 시장 참여자가 선택한 결과다. 모두가 동의한다면 시장은 반대로 움직인다.
줄기차게 금리하락을 기대하는 다수의 시각이 불안한 이유다. 상황이 예측과 반대로 흐른다면 연말과 내년 환율이 1500원을 넘어 1600원도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다.
환율 급등을 우려하는 국민 마음은 복잡하다. 환율 방어만 잘하면 나라 경제가 정말 좋아진다는 건지 궁금하다.
나라 곳간에 달러가 모자라는 것은 아닌지, 그렇지 않다면 왜 정부가 나서지 않고 국민의 돈, 국민연금을 털어서 환율 방어에 써야 하는지도 의아하고 걱정스럽다.
환율 방어를 외환 헤징(위험 회피)이라고 바꿔 불러도 달라지는 건 없다. 환율이란 게 공짜 총알을 무한정 써서 방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환율 방어는 비용이 많이 들고 리스크도 큰 게임이다. 국민연금이 외환 손실을 보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국민의 궁금증에 국가는 답해야 한다.
단언컨대, 1990년대 후반의 외환 탕진은 김영삼정부의 실책이었다. 환율 낮추기에 성공한 김영삼정부는 1997년의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했다. 모든 추락이 그렇듯 정치 인생의 정점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김영삼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국가 파산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우리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고 하지만 그걸 바꿔 말하면 수출 기업만 먹고 살고 내수경제와 지역경제는 죽을 쑤는 나라란 얘기와 크게 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환율만 열심히 방어하면 되는 게 아니라 내수, 자영업 경제를 회복시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저성장 국가로 자리 잡았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전혀 지원이 아니었던 코로나 지원금은 고스란히 빚으로 쌓였고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알뜰하게 갚아내야 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투자도 소비도 줄어드는 시대에 갚아야 할 빚은 커지는 고통, 온전히 서민의 몫이다.
위기는 반복된다. 양상이 다르고 내용도 다를지 모르지만 만일 다시 위기가 온다면 국가나 대기업의 위기는 아닐 수도 있다. 외화 곳간이 비어서 오는 외환위기가 아니라 가계 부채의 위기, 서민의 지갑이 텅텅 비어나는 내환 위기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이 미래에 닥칠 위기에 대비하고 있는지 참으로 걱정스럽다.
[조용래는?]
▲전 홍콩 CFSG 파생상품 운용역
▲<또 하나의 가족>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