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영문학을 전공했던 필자에게 4월이 되면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른다. 영국의 시인 겸 평론가이자 극작가인 T.S.Eliot의 작품 <The Waste Land>(황무지)가 그 발단이다.
그런데 왜 엘리엇은 새 생명이 싹트고 인간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4월을 잔인한, 그것도 최상으로 잔인한(cruellest) 달로 표현했을까.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한번 그의 시 중 일부를 살펴보자.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하략… 』
이 시에서 ‘cruel’을 어느 누군가가 잔인하게도 우리말로 ‘잔인한’으로 번역했고 그것이 회자되면서 그렇게 고착되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내가 번역해 보겠다.
『4월은 cruellest 달,
죽은 땅으로부터 라일락을 싹 틔우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얼어붙은 뿌리를 움직인다. …하략…』
가만히 살펴보자. 죽은 땅에서 라일락이 살아난다, 생명의 탄생이다. 기억과 욕망을 혼합한다, 역시 생명을 의미한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뿌리를 봄비로 휘저어준다, 역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런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우리는 cruel을 그저 ‘잔인한’으로 번역해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어대야 할까. 그러기에는 너무 허술하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엘리엇은 4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에 반드시 수반되는 진통을 돌려서 ‘cruel’이라 표현했다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그저 ‘잔인한’으로 번역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독자들에게 맡기고 이제 현실로 돌아가 보자. 금번 4월에 실시될 제 20대 총선을 생각하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4월은 그야말로 ‘최상으로 잔인한(cruellest)’ 달이 아닐 수 없다.
선택과 희망의 문제다. 먼저 선택 부분이다. 새누리당을 필두로 더불어 민주당과 국민의당 3당을 놓고 판단해보자. 최선은 고사하고 차선도 아닌 또 차악도 아닌 오로지 최악만 존재하는 형국이다.
최악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보통의 상식을 견지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다. 왜 고문일까.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비록 최악의 여건을 지니고 있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음은 희망 부분이다. 일전에 일요시사를 통해서 국민들이 19대 국회를 해산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정의 내린바 있었다. 일을 하지 않고 급여를 타가서 즉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을 위반해서 국회를 해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다.
필자는 당시 19대 국회는 일하지 않고, 그저 매월 임금만 타가더라도 제발 일하지 말라고 했다. 그편이 차라리 국익에 도움이 되고 그래서 무용지물인 19대 국회를 해산하라고 했던 게다.
그런데 이제 조만간 실시될 총선을 살피면 19대보다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싹수가 그야말로 노랗다. 결국 황무지에서 트지도 못할 싹을 고대하는 국민들에게 4월은 잔인하지 않을 수 없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