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반도는 “자연은 고요하되, 정치와 외교는 폭풍”이라는 역설 속에 놓여 있었다.
북태평양 고기압의 비정상적 확장으로 실제 태풍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이는 16년 만에 찾아온 극히 드문 기후 현상이었다. 그러나 자연의 침묵이 오히려 더 불안한 신호였는지, 정치·외교·경제에서는 연중 내내 태풍급 충격이 이어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이어 전국을 흔든 조기 대선, 정권 교체, 그리고 트럼프의 관세 폭풍까지 겹치며 한반도는 자연이 만들어낸 태풍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낸 거대한 태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태풍이 오지 않았다는 단순한 기상 통계는 올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딜레마를 상징한다.
태풍 없는 자연의 고요가 준 것은 평온이 아니라, 정치의 소용돌이가 더욱 선명히 드러난 풍경이었다.
16년 만에 태풍 0개가 남긴 기후 이례성
올해 한반도에 영향을 준 태풍은 0개였다. 지난 1951년 기상 관측 이후 단 세 번뿐인 기록이고, 16년 만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정적은 자연의 자비도, 우연의 선물도 아니었다. 북태평양고기압도 기상 관측 이래 가장 이례적으로 확장됐다.
평년에는 8월 말이면 물러나는 고기압이 9월 내내 한반도 남쪽을 감싸며 태풍의 진입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태풍은 일본·대만·중국으로 방향을 틀었고, 한반도는 태풍 경로에서 완전히 비껴났다. 그러나 날씨가 안정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10월의 전국 평균 강수량은 관측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고, 강수 일수도 평년의 두 배였다.
태풍이 사라진 자리를 잦은 폭우가 대신 채웠고, 계절의 흐름은 무너졌다. 태풍의 부재는 자연이 준 혜택이 아니라, 기후 시스템이 비틀렸다는 신호였다. 정상처럼 보이는 이상 현상이 반복되며 기후의 기준선 자체가 흔들렸다.
조용한 자연이 드러낸 기상학적 불안정
전문가들은 올해 날씨를 “고요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거칠어진 기후”라고 진단했다. 그 핵심은 기압 흐름의 가속화다. 대기 에너지가 짧은 시간에 축적되고 방출되면서, 극단적 변화가 잦아지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여도 내부의 불안정성은 오히려 더 커졌다는 평가다.
대기 에너지가 과도하게 축적되고 방출되면서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는 기압의 속도가 빨라졌고, 그 결과 기온은 하루, 일주일, 한 달 단위로 급변했다. 한파가 내려오면 급격한 추위가 찾아오고, 며칠 뒤에는 다시 따뜻해지면서 계절감이 사라지는 방식이다.
서울의 평균 최저기온이 한 달 사이 20도에서 1도로 떨어진 것은 기후 시스템의 안정성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즉, 태풍의 부재는 기후 안정이 아니라, 기후 불안정의 증거가 됐다. 눈에 띄는 재난이 사라진 자리에, 예측 불가능성이 일상화되고 있다.
태풍 부재가 말하는 순환 중단의 위험
태풍이 없는 바다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연이 스스로 정화하고 순환시키는 능력이 멈춰 있음을 의미한다. 에너지가 한꺼번에 방출되지 못한 채 쌓이면 불균형은 더 깊어지고, 작은 이상도 장기적 위험으로 증폭된다. 고요는 안정의 증거가 아니라, 때로는 가장 위험한 신호가 된다.
대만은 지난 2020년 태풍이 0개였던 다음 해 심각한 물 부족에 시달렸고, 반도체 공정마저 위협받았다. 한국 역시 올해 동해·남해 수온 상승, 퇴적물 누적, 해양 산소 부족, 해녀들이 바닥을 직접 청소해야 하는 상황 등 기후적 불균형을 보여주는 징후가 이어졌다.
순환이 멈춘 자리에 축적된 왜곡은 언젠가 더 거친 방식으로 표출될 가능성을 키운다. 문제는 그 불균형이 언제, 어떤 형태로 터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폭발의 순간은 늘 가장 준비되지 않은 지점을 향해 찾아온다.
새 권력 출범과 천후의 상징적 대비
왕조 시대에는 천후와 정치를 연결해 해석했다. 새 임금 즉위 직후 재난이 나면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였고, 이는 통치의 정당성 논란으로 이어졌다. 자연 현상은 과학 이전의 사회에서 권력의 명분과 민심을 가늠하는 정치적 언어이기도 했다.
이 관점을 현대에 적용하면 흥미로운 대조가 생긴다. 만약 이재명정부 출범 직후 초강력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었다면 정치적 흉조의 상징으로 읽혔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태풍이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자연의 침묵은 오히려 새 권력의 출발선에서 상징적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과학적 인과와 별개로 민심은 상징을 읽는다. 태풍의 부재는 새 권력의 초입에서 ‘폭풍의 유예’를 상징하는 듯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정치는 늘 상징의 세계에서 움직인다. 문제는 그 유예가 준비의 시간이 될지, 또 다른 충격을 미루는 착시로 끝날지에 있다.
비상계엄·조기 대선이 만든 정치 태풍
기상 태풍은 오지 않았지만, 정치 태풍은 한국 사회를 강타했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국가의 헌정 시스템 전체를 흔들며 정치를 한순간에 폭풍권으로 몰아넣었다. 그 여파는 제도의 안정성을 시험하며 사회 전반에 깊은 불안과 분열을 남겼다.
비상계엄은 행정·사법·입법을 동시에 뒤흔들며 혼란의 절정으로 치달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지난 6월3일 조기 대선이라는 초유의 상황을 맞았다. 국가 운영의 정상 궤도가 한순간에 이탈하며 민주주의의 복원력 자체가 시험대에 올랐다.
정치 지형은 완전히 재편됐고, 새 정부 출범은 사회·경제·외교 전반의 방향을 바꾸는 거대한 전환점이 됐다. 태풍이 사라진 하늘 아래서 오히려 더 큰 정치 태풍이 불어닥친 셈이다.
트럼프 정책 태풍이 만든 경제 충격
국내 정치가 내부를 흔드는 동안, 외교·경제의 전면에서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라는 거대한 ‘정책 태풍’이 한국을 강타했다. 자연재해와 달리 이 충격은 예고도 경고음도 없이 산업 전반을 직접 타격했다. 보이지 않는 정책의 바람은 기업과 일자리, 국가 전략의 근간까지 뒤흔들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국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고, 한국산 반도체·배터리·전기차·철강·화학 제품에 대한 고율 관세와 공급망 재편 압박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통상 분쟁을 넘어 한국 산업 구조 전반에 대한 전략적 재배치를 강요하는 신호에 가까웠다.
이는 실제 태풍보다 더 날카로운 충격이었다. 정책 변화라는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업의 생존과 일자리, 국가 경제의 구조를 뒤흔드는 근본적 압박으로 작용했다. 자연의 태풍은 멈췄지만, 국제경제의 태풍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고, 그 충격은 파도처럼 반복되면서 누적되고 있다.
자연의 파괴자이자 순환자, 태풍의 역설
태풍은 재난이지만 자연 생태계에서는 중요한 정화자다. 바다 바닥의 퇴적물을 털어내고, 깊은 곳의 산소를 끌어 올리며, 가뭄 지역에 물을 공급하고, 생태계를 초기화하는 역할을 한다. 파괴로 보이는 과정이 장기적으로는 균형을 회복시키는 자연의 순환 장치로 작동하는 셈이다.
태풍이 없는 해안은 오히려 더 빠르게 침전되고 정체된다. 최근 제주 해녀들이 바다 밑 퇴적물을 손으로 청소하고 있다는 사실은 태풍 부재의 공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태풍이 만들어내던 자연의 ‘대청소’가 사라지자, 인간이 직접 자연의 순환을 흉내 내야 하는 기형적 상황까지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태풍이 한 번도 오지 않은 바다는 표층·심층 순환이 끊기면서 해양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약해지고, 일부 지역에서는 산호의 백화 현상과 어종 이동까지 관측됐다. 태풍은 자연의 파괴자이면서 동시에 재생자라는 역설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존재다.
올해 자연은 침묵했고, 정치만 거센 폭풍을 남겼다
올해 태풍은 오지 않았지만, 정치·경제·외교는 실제 태풍보다 더 강한 소용돌이를 겪었다. 비상계엄으로 인한 대통령 탄핵, 조기 대선, 정권 교체, 트럼프 관세 폭풍 등 거대한 사건들이 한반도를 휘몰아쳤고, 자연의 침묵 속에서 사람이 만든 폭풍만이 더욱 크게 불었다.
그러나 어떤 태풍이든 그 뒤에는 반드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한다. 자연의 태풍이 생태계를 정화하듯, 정치적·경제적 태풍도 낡은 구조를 흔들며 재정렬의 계기를 만든다. 이제 한국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정치 태풍의 강도를 논할 것이 아니라, 정치 태풍 이후의 질서를 어떻게 설계할지 결정하는 일이다.
정치적 갈등의 구조를 어떻게 복원하고, 관세 폭풍 이후 산업·무역 전략을 어떻게 재편하며, 기후 불안정에 대응하는 국가적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지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자연은 고요했지만, 정치와 경제는 이미 다음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그 요구에 응답할 새로운 질서를 준비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