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사실적시 명예훼손, ‘진실이 죄가 되는’ 역설

2025.09.15 14:48:05 호수 0호

우리 사회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오래전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타인의 명예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객관적으로 사실임이 입증된 내용을 말하거나 글로 남겨도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위가 아닌 ‘진실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표현의 자유, 알권리, 공적 감시라는 민주주의 핵심 원리와 충돌한다는 지적이 있어왔던 만큼, 특히 법조계와 언론계에서 꾸준한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 형법 제307조 제1항은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를 규정하고 있는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고 있다. 이는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도 인정되는 보편적 범죄 유형이다. 그러나 제2항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도 처벌한다고 명시돼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허위 사실 유포는 공동체 질서를 해치는 행위지만, 진실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벌한다는 점은 국제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이다. 실제로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한국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표현의 자유 침해 요소로 꾸준히 지적해왔다.

민주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기본권 중 기본권으로 꼽힌다. 부당한 권력과 불의한 행태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면, 시민의 자유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바로 이 지점을 위협한다. 예컨대 직장에서 발생한 부당한 처우를 피해자가 사실 그대로 공개하면, 가해자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이유로 되려 형사 고소를 당할 수 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이들이 역으로 명예훼손죄로 고발당하는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결국 피해자들은 사회적 공론화와 정의 실현을 위해 나선 목소리조차 억압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특히 권력자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에게 방패막이 역할을 해왔다. 기업의 불법 행위를 고발한 내부 고발자가 되레 피의자 신세가 되고, 정치인의 부정행위를 폭로한 언론인이 피고석에 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진실’조차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입을 막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회적 투명성을 약화시키고, 정의 실현보다는 침묵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옹호하는 입장은 주로 “사람의 인격과 명예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논리에 기초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반드시 형사처벌이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명예는 사적 권익에 해당하므로, 손해배상이나 정정보도 같은 민사적 구제 수단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형사처벌은 국가가 개인의 입을 봉쇄하는 강력한 제재이므로, 최소한의 경우에만 적용돼야 한다.

게다가 ‘사실을 알린 것’이 사회적으로 유익한 경우가 많음에도 무차별적 제재로 이어지는 점은 명분을 약화시킨다.

선진 민주국가 중 다수는 이미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거나 적용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다. 미국은 공적 인물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가 입증되지 않으면 책임을 묻기 어렵다. 유럽에서도 표현의 자유 보장을 위해 형사처벌보다는 민사상 구제에 무게를 두는 추세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유지되고 있으며, 실제 적용 건수 또한 많아 국제적 기준과 괴리를 보인다.

이 법의 가장 큰 문제는 ‘위축 효과’다. 법정에서 무죄가 선고되더라도, 고소를 당하는 순간부터 피고인의 사회적 낙인은 불가피하다. 수사와 재판을 오가는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과 심리적 압박이 뒤따른다. 그 결과 사회 구성원들은 불법이나 부조리를 목격하더라도 ‘혹시 내가 처벌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침묵하게 된다. 진실이 은폐되고 권력형 비리가 드러나지 못하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거나 최소한 공익적 목적에 의한 발언은 전면 면책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헌법재판소 또한 일부 결정에서 공익적 목적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위법성을 조각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법리적 해석의 여지가 넓어, 피해자와 언론, 시민 모두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입법적으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형사처벌보다는 민사적 책임으로 전환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진실을 말한 자를 범죄자로 만드는 모순적 제도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보장돼야 할 표현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약하고, 사회적 감시 기능을 약화시킨다. 권력자에게는 방패가 되고, 피해자에게는 침묵을 강요하는 도구로 작용하는 현행 법제는 재검토돼야 한다.


‘진실을 말할 자유’가 보호되지 않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명예 보호라는 가치가 필요하다면, 형사처벌이 아닌 민사적 제재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거나 최소화하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동시에 지켜내는 길이다.

앞서 지난 9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했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위한 형법 개정안’은 이 같은 시대적 요구를 담은 것으로 평가된다.

박 의원은 “표현의 자유는 헌법상의 민주적 국가 질서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지만, 우리나라는 진실, 허위를 불문하고 모두 명예훼손죄로 형사처벌함으로써,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진실한 사실을 적시한 행위를 형사처벌하는 국가는 극히 드물고, 이는 국제적 기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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