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⑳거지 생활의 시작

  • 김영권 작가
2024.10.07 04:00:00 호수 1500호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노인은 지팡이를 질질 끌며 둑 위로 사라져 갔다. 어린 소년이 딱하게는 생각됐겠지만 그 역시 막막한 거지 입장으로 감상에 빠질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허겁지겁 퍼먹기

용운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순간 눈앞이 핑 돌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발걸음을 옮겨 보려니 자꾸 헛디뎌졌다.

기다시피 간신히 둑 위까지 올라갔다. 더 이상 기운도 없는데다 다리가 몹시 후들거리는 바람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진땀이 솟고 손까지 떨렸다. 하늘도 온통 노랗게 보였다. 혹시 이러다가 엄마도 만나기 전에 죽는 게 아닐까?


용운은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느릿느릿 걸어도 숨이 찰 지경이었지만, 쓰러져도 사람 사는 동네로 들어가서 쓰러져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한 걸음 걷다 쉬고 두 걸음 걷다 쉬고 하면서 거의 반나절이나 걸려 어떤 동네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용운은 양지바른 어느 집 대문 앞에 퍼질러 앉아 버렸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풀어지면서 의식이 까무러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인기척과 함께 등 뒤의 대문이 열렸다.

“너 누군데 여기 있니?”

“배가…… 너무 고파서요.”

“쯧쯧, 하늘도 무심하지.”

잠시 후 여자가 밥그릇을 들고 나왔는데, 양푼 속에 밥과 김치가 아무렇게나 쏟아져 있었고 녹때가 퍼런 숟가락이 한 개 꽂혀 있었다.

용운은 살아야 한다는 본능으로 허겁지겁 퍼먹었다. 목이 메고 손이 떨려 밥알이 자꾸만 땅 위로 떨어졌다. 

허기를 채운 용운은 문설주에 기대 잠이 들어 버렸다. 비루먹은 개 한 마리가 비척비척 다가서더니 흙 묻은 밥알을 주워 먹고 어린 사람의 볼에 붙은 것까지 핥아 먹었다.


용운은 잠결에 이빨을 빠득빠득 갈면서 ‘엄마……’ 하고 중얼거렸다.

얼마나 잤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어둑해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용운은 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며 걸었다. 하루 종일 헤매다 지친 용운은 다시 노인에게로 향했다.

노인은 구걸해 온 저녁을 먹고 있었다.

“왔냐? 그래, 많이 댕겨 봤구?”

“조금요.”

“밥은 어떡했냐?”

“어떤 아줌마가 줘서 먹었어요.”

“그랴? 그럼 고단하걸랑 저것 깔고 눕거라.”


노인은 더러운 옷자락으로 숟가락을 닦아내며 말했다. 식사를 마친 노인은 찌그러진 반합을 치우고 접힌 푸대자루 틈에서 작은 종이상자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꽤 많은 담뱃가루가 들어 있었다. 영감은 그것을 조금 꺼내 찢은 신문지 위에 놓고 침을 발라 말며 중얼거렸다.

“토끼나 개가 제 새끼를 잡아먹는 것도 서로가 한 몸이라고 생각해서 그런다는데…… 쯧쯧, 애당초 까지르지나 말 일이지…….”

생존 본능으로 허기 달래기
흙 묻은 밥알까지 주워 먹어

누구를 두고 하는 소린지는 알 수 있었다. 노인은 혼자 구시렁대다간 혀를 찼다. 담배 한 대를 구수하게 피우고 난 영감이 꽁초를 개천으로 던지며 가래침을 뱉었다.

“이제 그만 자자. 얻어먹는 사람한테는 잠 많이 자두는 것도 한 밑천이니.”

그때 건너편에서 텁석부리 사내가 또 모습을 나타냈다.

“영감, 출출한데 술이나 한잔 합시다.”

푸대자루를 깔려던 영감의 눈에서 빛이 났다.

“잉? 아니 어쩐 술이랴?”

“저 건너 가고실에 오늘 누구 혼례 날인가 봅디다. 우리 촉새 놈이 가서 얻어왔는데 부잣집인지 제법 걸지게 달렸수.”

텁석부리 사내 뒤에는 열댓 살쯤 되는 아이가 따르고 있었는데, 한 손엔 막걸리 또 한 손엔 음식 담긴 깡통이 들려 있었다. 

“가고실 쪽은 왈패들 구역인데 용케 얻어왔구만.”

“우리 촉새 놈이 어떤 놈이요? 이놈 눈치라면 아마 지옥에서 잔치를 벌인대두 기어 들어가 얻어올 거요.”

거지 아이가 신문지를 깔고 깡통을 엎었다. 부침개와 밥을 비롯한 갖가지 나물이 뒤섞여 쏟아져 나왔다. 허연 돼지비계가 때마침 산 위로 떠오르는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아이구, 맨날 시어빠진 김치 부스러기더니만 오늘은 덕분에 포식하겄구먼.”

노인이 입맛을 다시며 헤벌쭉 웃었다. 이빨이 빠져나간 불그죽죽한 잇몸이 다 드러났다. 노인의 반합뚜껑에 막걸리를 따르던 텁석부리 사내가 곁눈질로 용운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꼬맹이 또 왔구만.”

“아침에 에미 찾겄다구 나가더니 이슬 피할 데가 없으니 또 왔구먼 그려. 그나저나 당췌 맘이 편치 않구먼. 저것도 산 목숨인데 말여.”

“그럴 거요. 어린 거지 애들이 때로 사람 마음을 여간 심란하게 만드는 게 아닙디다. 대부분 전쟁고아들이라 그런지 눈만 한번 부릅떠도 먼 산 보고 질질 짜질 않나, 꿈속에서 지 어매를 찾으며 헛소리를 하지 않나…….”

그는 문득 빈 깡통을 챙기는 아이에게 명령을 했다.

“야, 떡 남은 거 좀 있냐? 저놈 조금 갖다줘라.”

“깡수 형 줄라고 냉긴 백설기 한 개밖에 없는디요.”

“아, 잔칫집서 실컷 먹었을 거 아니냐? 잔소리 말고 얼른 갖다줘.”

“야, 알았어유.”

천연덕스런 거지

재빨리 개천을 건너간 아이가 잠시 후 식은 떡 한 덩이를 가져와 건네었다.

천덕스런 거지들에게도 인정은 있는 모양이었다.

텁석부리 사내가 큼직한 비계 한 점을 김치에 싸서 입속으로 우겨넣었다. 그러고는 입가를 쓱 문지르며 화제를 돌렸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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