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⑤매타작 소리와 살벌한 비명

  • 김영권 작가
2024.06.03 03:00:00 호수 1482호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오른쪽으로 저만큼 염전과 저수지가 보였고 작지만 논밭도 펼쳐져 있었다. 밭엔 보리가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초로의 아낙네가 보리밭을 매다가 호미 든 손을 이마께에 올리곤 대열을 멀건이 건너다보았다.

적막한 섬에 아마 민간인들도 사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가니 산 중턱에 삭막해 보이는 회색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흙과 시멘트를 섞어 지은 1백여 평쯤 되는 길쭉한 건물이었다.

그런 건물이 헐벗은 산 여기저기에 띄엄띄엄 흩어진 채 늘어서 있었다.

적막한 섬


대열이 지나가자 그 건물들에서 수많은 수용자들이 나와 서서 구경하며 서로 뭐라고 지껄이기도 하고 희희덕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큰 소리를 지르거나 하진 못했다.

그들이라고 해서 감정을 예사롭게 드러낼 만큼 자유롭거나 신수가 훤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전체적으로 그들의 모습은 신입들보다 더 경직되고 초췌한 몰골이었다.

“걸음 똑바로 맞춰! 하낫 둘 하낫 둘… 야, 거기 앞줄에 툭 튀어나온 대가리는 뭐야? 너 개새끼, 줄 안 맞출래, 응?”

인솔하던 고참이 험상궂게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렸다.

“선두 좌측으로!”

대열은 즉각 방향을 바꿔 걸어갔다. 마침내 다른 건물보다 다소 크고 운동장까지 갖춘 곳에 이르자 인솔자는 대열을 정문 안으로 이끌었다.

사무실 등이 자리잡은 본관이었다. 정문 기둥엔 ‘선감학원(仙甘學院)’이란 명패가 붙어 있었다.

“모두 정지!”

인솔자가 빽 고함을 내질렀다. 대열은 주춤하고 멈추었다.

“지금부터 너희들의 더러운 과거를 정리하는 삭발식을 거행하겠다! 각자 두 눈을 감고 자숙하길 바란다.”


운동장에 늘어선 신입들은 우선 지저분한 봉두난발부터 알머리로 빡빡 깎였다. 선 채로 고개만 숙이게 해놓고 바리깡을 든 두 명의 고참이 달려들어 마구 밀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짓궂은 웃음을 띠면서 바리깡을 슬쩍 들어올리면 비명이 흘러나왔다. 어찌나 잽싼지 35명의 머리는 30분도 채 안 되어 모조리 서늘한 알머리로 변해 버렸다.

무엇이 서러운지 긴 머리털과 함께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아이도 있었다.

좀전의 인솔자가 다시 신입생들을 운동장 한가운데에 정렬시켰다. 그리고 동물을 다루듯 명령했다.

“이제부터 몸뚱이에 걸친 것을 싸그리 벗어 족발 앞에 놓는데, 5초를 초과하는 짐승은 여물통이 죽사발 될 테니 각오해라. 실시!”

신입들은 고참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끌려간 35명 모조리 알머리로
줄줄이 알몸 행렬로 도착하자…

“어쭈? 이 새끼들이 여기 유람하러 온 줄 아나?”

고참은 맨 앞줄에 선 신입들의 알머리를 우악스런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내리갈겼다. 


“그럼 실시한다. 시작! 일 초, 이 초, 삼 초…….”

그제야 신입들은 다급스런 동작으로 저마다 몸에 걸친 누더기를 벗어내기 시작했다. 정신 차릴 틈이 없이 허둥지둥 옷을 벗는 동안 여기저기서 둔탁한 매타작 소리와 비명이 살벌하게 들려왔다.

동작이 굼뜬 사람을 고참들이 뒤에서 사정없이 족치는 것이었다. 

“이 새낀 살결이 계집애처럼 보드랍군.”

누군가 이죽거리며 용운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붉은 손바닥 자국이 선명히 찍혔다. 용운은 상대방을 노려보며 욕을 하는 대신 자신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곧 모두는 아랫도리까지 드러낸 알몸의 부동자세로 서서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다들 벗었어? 좋아, 그럼 이제 그 걸레쪽엔 미련을 버리고 저쪽 창고 앞으로 이동한다. 정렬, 앞으로 갓!”

용운은 몇 걸음 걷다가 힐끗 돌아보았다. 아무리 더러운 누더기지만 그동안 자신의 몸을 감싸 준 것이었다. 왠지 무엇인가 소중한 것이 그 속에 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자루를 든 세 명이 벗어놓은 옷들을 바삐 뒤지고 있었다. 담배나 기타 쓸 만한 물건이 나오면 재빨리 품 속에 감추고 나머지 옷은 자루에 쓸어담는 것이었다.

“이 쥐뿔만한 새끼가 어디로 대갈빡을 돌려.”

날래게 다가온 인솔자가 손날로 용운의 뒷덜미를 내리찍었다. 숨이 콱 막힐 만큼 강한 타격이었다. 용운은 심호흡을 하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별 인상을 짓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도 상대방은 왠지 제물에 미안해 하는 기색이었다. 가엾은 짐승 새끼나 자신의 어린 동생을 친 느낌이라도 든 것일까?

창고 앞에는 또 다른 선생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알몸 행렬이 도착하자 선생은 신입들의 체격을 대충 가늠하면서 빠르게 상하의를 골라 던져주었다.

내의와 검정 고무신도 주었다. 용운의 옷은 다소 큰 편이어서 소매와 바짓부리를 접어 올려야만 했다. 

무표정

복장을 갖추고 다시 줄을 지어 운동장으로 돌아오니까 선착장에서 보았던 그 선생이 책상을 앞에 놓고 앉아 서류를 뒤적이고 있다가 명령을 내렸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그는 이름과 나이, 부랑아가 된 사유, 부모의 이름과 생존 여부, 살던 동네의 주소 따위를 물으며 개인 기록카드를 작성했다.

작성이 끝나면 ‘일심사 2반’ ‘충심사 3반’ ‘정심사 5반’ 하고 숙사를 지정해 주었다. 그러면 옆에 선 고참 원생이 담요, 수건, 비누, 칫솔, 식기, 숟가락 따위의 개인 용품을 차례차례 지급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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