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갑질 공화국도 을질 공화국도 안 된다

2024.04.22 15:19:33 호수 1476호

우리나라 헌법 제1조 제1항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제2항엔 대한민국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이 명시돼있다. 이는 민주공화국인 우리나라 의사결정이 국민에 의해 이뤄지며 국민 스스로가 주권을 행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국민이 직접 주권을 행사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국민의 대표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주권을 행사하게 된다. 

즉 “우리나라 주인인 국민이 ‘갑’이고, 머슴인 대표는 ‘을’이다”는 사실이 헌법 제일 앞부분에 명시돼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 기간 동안엔 확실히 국민이 ‘갑’이고, 대표로 나온 후보가 ‘을’이지만, 선거가 끝나면 반대로 당선된 국민의 대표가 ‘갑’이 되고, 국민은 ‘을’로 전락하고 만다는 게 안타까운 우리 현실이다. 

선거로 뽑힌 우리나라 대표들이 말로는 임기 내내 국민을 주인인 ‘갑’으로 모시고 국민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지만, 실제 행동은 대표 자신이 ‘갑’이 돼 갑질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주권의 주체를 헌법 제일 앞부분에 명시한 것 같다.


22대 총선 과정을 보더라도, 선거 기간 동안 우리 국민은 분명히 ‘갑’이었고 후보는 ‘을’이었다.

그런데 총선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우리 국민은 ‘을’로 전락해 있고, 당선된 후보가 갑질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선거 기간 동안 일부 국민이나 세력이 후보를 향해 갑질한 것도 사실이다.   

역대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도 마찬가지다. 선거 전엔 국민이 ‘갑’이고 후보가 ‘을’이 돼 국민의 일부 세력이 갑질했고, 선거 후엔 당선자가 ‘갑’이 되고 국민은 ‘을’로 전락해 당선자가 갑질했다.

또 선거서 이긴 정당은 ‘갑’이 되고 진 정당은 ‘을’이 됐는데, 정당 역시 지난 수십년 동안 번갈아가며 ‘갑’이 된 후 갑질했다.

우리나라가 경제는 선진국에 진입했는지 몰라도 정치, 사회, 문화에선 아직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다.

오래 전, 모 방송국 코미디 프로 중 ‘갑과 을’ 코너가 높은 시청률과 함께 꽤 오랫동안 인기를 누린 적이 있다.

음식점 주인과 에어컨 수리 기사가 상황에 따라 입장이 달라진 ‘갑’과 ‘을’의 관계를 이용해 서로 갑질하는 컨셉이었다.  

음식점 주인이 에어컨 기사가 늦게 왔다고 갑질하자, 에어컨 기사가 음식을 시키면서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갑질하고, 다시 음식점 주인이 에어컨이 시원하지 않다고 갑질하자, 에어컨 기사는 음식이 식었다고 갑질하는 식의 프로였다.

우리나라 국민과 대표도 1년에 한번(보궐선거 포함) 꼴로 치러지는 선거 전과 후로 나뉘어, 번갈아가며 ‘갑’이 돼 갑질하는 모습이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에 명시돼있듯이 국민은 선거 전이나 후나 상관없이 항상 주권을 가진 ‘갑’이고, 국민이 뽑은 대표는 항상 ‘을’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래서 필자는 선거서 당선된 대표 즉 대통령, 국회의원, 단체장 등이 선거 후에 하는 갑질은 갑질이 아닌 을질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에 따라 ‘갑’과 ‘을’이 바뀌면 방송국 <갑과을> 코너처럼 코미디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번 총선 과정서 일부 국민이나 세력은 ‘갑’으로 갑질했고, 후보는 ‘을’로 갑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총선 후에 당선자가 횡포를 부린다면 이는 갑질이 아닌 을질이라고 표현해야 맞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갑질 공화국이 되기도 하고 을질 공화국이 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분명히 ‘갑’과 ‘을’로 나뉘어 있다. ‘갑’은 계약 관계서 주도권을 가진 쪽이고, ‘을’은 그 반대쪽이다.

쉽게 말해 보수를 주며 재화나 노동력을 제공받는 쪽이 ‘갑’이고 보수를 받아 재화나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쪽이 ‘을’에 해당된다.

‘갑’과 ‘을’이 번갈아가며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는 구조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갑’과 ‘을’의 관계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우리 사회는 ‘갑’과 ‘을’에 대한 명확한 정리도 안된 채 법을 만들고 개정하면서 ‘갑’도 ‘을’이 되고, ‘을’도 ‘갑’이 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


국가 차원에선 ‘갑’이 ‘을’보다 사람 수가 더 많아 선거 때마다 정확한 심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차원에선 흔히 말하는 ‘갑’은 ‘을’보다 사람 수가 적어 만약 ‘을’이 을질하면 ‘갑’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중세 이후 많은 국가가 왕정정치나 군주정치와 싸워 민주주의를 세웠지만 을질이 난무한 민주주의 체제 때문에 몰락한 국가가 한둘이 아니다.

을질은 갑질보다 훨씬 위험하다. 갑질이 난무하면 체제가 무너지지만, 을질이 난무하면 국가가 무너진다.

우리 사회가 강압적으로라도 을질을 막아야 하는 이유다.

이번 22대 총선서 승리한 더불어민주당도, 패한 국민의힘도 모두 ‘을’일 뿐이다. 을질을 해선 안되는 양대 정당이다.

또 민주당이 이번 총선서 승리했다고 국민의힘에 대해 갑질하면 안 된다. 이는 국민에게 갑질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정당 간엔 ‘갑’과 ‘을’ 관계가 존재할 수 없다.

현 정부도 국민을 상대로 을질하면 안 된다. 이번 총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갑’인 국민을 섬기는 ‘을’답게 처신해야 한다.

국정기조를 바꾸되 국민을 섬기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2027 대선을 염두에 두고 국정운영을 하면 안 된다. 그러면 국민에게 을질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이 을질은 결국 나라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 돼야 한다. 갑질 공화국이 돼도 을질 공화국이 돼서도 안 된다. 특히 22대 국회가 모 정당이나 단체가 갑질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갑질을 막기 위해 ‘을’에게 을질하도록 법을 만들거나 개정해선 절대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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