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실종된 자이가르닉 효과 

  • 김삼기 시인‧칼럼니스트
2022.12.26 13:58:14 호수 1407호

2022년 한 해도 이제 한주 밖에 남지 않았다. 연초에 야심차게 계획을 세우고 나름 최선을 다했던 일들을 돌아보니, 성공한 일, 실패한 일, 미완성한 일 세 가지 중 유독 성공한 일은 기억이 생생한데 실패한 일이나 미완성한 일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성공한 일보다 실패한 일이나 미완성한 일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는데, 왜 지금은 실패한 일이나 미완성한 일은 아예 기억조차 희미해진 걸까?

아마도 30여년 전에는 우리 사회가 사소한 실패나 미완성 자체가 인정되지 못한 시대였지만, 지금은 웬만한 실패 정도는 잘도 인정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실패가 인정되지 못한 시대에는 어떤 실패도 용납되지 않아 실패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고, 혹 실패하기라도 하면 실패에 대한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패가 인정되는 시대에는 실패를 딛고 일어서면 되기에 실패하더라도 실패가 기억에 오래 남지 않았다.

바로 실패가 인정되는 시대와 실패가 인정되지 못한 시대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실패가 오래 기억되느냐 기억되지 않느냐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00여년 전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자이가르닉과 공동으로 ‘끝마치지 못하거나 완성되지 못한 일은 마음속에 계속 떠오른다’는 자이가르닉 효과 이론(Zeigarnik Effect)을 제시했다.


즉, 자이가르닉 효과는 어떤 일에 집중할 때 끝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긴장이 지속되다 보면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게 된다는 이론이다.

자이가르닉 효과에서 끝마치지 못하거나 완성하지 못한 일을 설명할 때, 가장 극적인 예는 크게 실패하는 것이다. 예컨대 첫사랑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남아 있는 것보다 실패했을 때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실패한 첫사랑을 더 오래 기억하는 심리현상이 자이가르닉 효과의 극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자이가르닉 효과는 실패가 인정되지 못한 시대에 실패가 오래 기억된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실패가 오래 기억되지 않는 시대, 즉 실패가 인정되는 시대에 자이가르닉 효과는 우리 사회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실종된 이론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 주변을 보더라도 실패하거나 완성하지 못한 일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패나 미완성 자체도 하나의 마침으로 보고 새로운 도전을 하며 실패를 인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30여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이 자이가르닉 효과에 의해 실패하거나 완성하지 못한 일을 오래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실패나 미완성에 대해 기억조차 하지 않고 성공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정치권에서 실패에 대한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불과 몇 개월 전 선거에서 졌는데도 패배에 대한 기억은 아예 하지도 않고 몇 년 전 이겼던 선거만 떠올리면서 전당대회 등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는 게 정치다.

축구에서도 선수와 팬들은 예선 탈락이나 큰 점수 차로 진 게임보다 가까스로 본선에 올라가거나 적은 점수 차로 이긴 게임을 더 오래 기억한다. 2022 카타르월드컵에 대해서도 우리 국민은 가나에 3:2로 진 게임이나 16강전에서 브라질에 4:1로 진 게임은 기억하지 않고, 포르투칼을 2:1로 이기고 16강에 올라간 상황만 기억할 것이다.

한편 드라마는 미완성의 기억이 외면당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근 주말드라마는 주요 장면에서 끝나 시청자가 완성되지 않은 장면을 오래 기억하게 하면서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트릭을 쓰지 않고, 회마다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시청자가 오래 기억하지 않고, 오히려 트릭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실패가 인정되는 사회가 되면서부터 자이가르닉 효과는 이미 실종된 이론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성공한 일만 기억하고 실패한 일이나 미완성한 일은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게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패배의식보다 성공의식이 강한 현대인이 모든 분야에서 성공이 목표가 되고 성공 이야기만 하고 성공만 기억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패나 미완성을 기억조차 하지 않는 건 아닌 것 같다.


자이가르닉 효과의 실종과 함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위기는 기회다” “개천에서 용난다” 등의 격언도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실패나 미완성에서 답을 찾았던 시대가 그리워지는 연말이다.

우리는 지금도 ‘No more masada’를 외치며 2000년 전 마사다 전투의 패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이스라엘과 달리, 중국의 숱한 침략·약탈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36년 동안 당한 수치 같은 실패, 6·25동란 이후 아직도 휴전 상태로 있는 미완성조차도 잘 기억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