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들고 덤비는 ‘악성 민원’ 백태

2021.03.29 14:24:48 호수 1316호

목숨 걸고 “말해보세요”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있다. 공무원이 민원인을 친절하게 응대해도 돌아오는 건 위협이다. 공무원을 괴롭히는 악성 민원에 대해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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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라이더, 백화점 직원, 아파트 경비원 등 서비스직 종사자가 갑질을 당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갑질한 이들은 상대방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에 폭언과 욕설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도가 지나친 악성 민원에 공무원이 시달리고 있다. 

한강 투신

강동구청에서 불법 주·정차 민원을 접수하던 공무원이 지난 1월6일 강동구 광진교에서 투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무원이 스스로 생을 등진 원인이 민원 스트레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공무원 주변인들은 “민원을 들어주는 일이 힘들었다. 민원인들에게 ‘내 차를 왜 단속했냐’며 욕을 먹는 일이 많았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을 접한 현장 공무원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지난해 3월 한 구청의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부서에 흉기를 든 40대 민원인이 찾아오는 사건도 있었다. 사회보장급여 처리 기한이 남았지만, 지급이 빨리 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담당 공무원은 “점심시간이라서 사람들이 많이 없을 때 칼로 위협하는 사건이 일어나 너무 두려웠다”며 “전화로 폭언을 일삼다가 찾아와 4~5시간 동안 따지는 등 악성 민원으로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말했다.


주차 위반 단속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은 악성 민원에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주차 위반으로 과태료를 문 사람들은 “다른 차는 왜 단속 안 하냐” “과장한테 연락하겠다” 등의 악성 민원에 시달린다. 

“해결 안 해줘?” 불안한 공무원
욕 다반사…흉기로 위협하기도

대구의 한 구청 전자 민원창구에는 지난해부터 ‘감사실 폐쇄하라’ ‘재활용 쓰레기 처리하라’ 등 특정 민원인이 쓴 글이 800건이 넘게 올라왔다. 이 민원인은 비슷한 내용의 민원을 10년 이상 제기하고 있다.

해당 구청 관계자들은 도가 지나친 악성 민원에 손을 쓰지 못할 정도라고 입을 모은다. 반복적인 민원의 경우 내부 종결을 할 수 있지만 일부 민원인은 작정하고 관철될 때까지 계속 민원을 넣는다. 답변을 준비하다 보면 업무가 밀리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처럼 노골적인 반복 민원, 폭언, 협박 등을 일삼는 일부 민원인들 탓에 공무원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주먹은 법보다 가깝다. 법적 조치는 폭언·욕설을 하던 민원인이 해당 기관에 찾아와서 행패를 부려야 이뤄진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그를 연행해야 끝난다는 뜻이다.

지난해 5월 경남 김해에서는 지속해서 폭언을 하던 민원인이 김해 북부동행정복지센터를 찾아와 유리컵으로 공무원의 머리를 가격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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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금정구청에서도 2019년 7월 민원인이 민원 창구를 넘어 사무실 안쪽까지 들어가 칼을 휘둘렀다. 2020년 2월 부산 영도구 봉래1동 주민센터에서도 칼부림 난동이 있었다. 이들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민원처리에 관한 법률은 ‘행정기관에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다른 민원인에 대한 민원 처리를 지연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실효성이 없다. 공무집행 방해 요건이 까다롭고, 표를 의식하는 민선 단체장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시민들을 상대로 고소·고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민원 공무원들의 공통된 얘기다.

문제는 현행 대응 매뉴얼이 수년간 제기되는 반복 민원과 폭력·폭언 등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행정안전부의 공직자 민원응대 매뉴얼에 따르면 대면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면 1단계 진정 요청, 2단계 경고를 거쳐야 경찰에 신고가 가능하다. 

폭언과 욕설, 협박 등의 상황에서는 우선 진정 요청을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관련 법률에 저촉될 수 있다고 안내하고 녹음을 하겠다고 사전 고지해야 한다.


비슷한 내용 10년간 제기
실효성 없는 대응 매뉴얼

하지만 위험물 소지자가 급습하거나 폭력 행사 등 신변을 위협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이 같은 단계별 매뉴얼이 무용지물이라는 게 행정 일선의 공통된 평가다. 녹취 고지도 일시적인 억제책일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녹음 안내 당일에만 ‘반짝효과’를 낼 뿐 다음날 또다시 욕설과 폭언, 고성 등이 오가는 경우가 많아 근본적인 대책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동일 민원도 3회 이상 반복 제출하면 2회 이상 결과 통지 후 종결할 수 있지만, 이 역시 허점을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민원이 종결되더라도 악성 민원인은 해당 공무원의 언행이나 태도를 문제 삼아 또다시 민원을 넣거나 경찰에 상해죄로 고소하는 등 끊임없이 압박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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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내용의 민원을 다수가 제기하는 때도 있었다. 200~300명이 모인 익명의 오픈채팅방에서 소위 ‘좌표’를 찍으면 한꺼번에 몰려와 민원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들은 민원 내용과 민원을 처리하는 담당 공무원의 실명, 전화번호를 공유했다.

서울 시내 한 구청 공무원은 “민원에 강하게 대응하다간 감사원이나 국민신문고에 수도 없이 고발당하는 통에 업무량이 몇 배로 늘어나 일단 참는다”고 했다. 분노에 찌든 민원인을 버거워하는 건 경찰도 마찬가지다. 경찰 관계자는 “자신의 민원을 처리해주지 않는다며 경찰관들을 무더기로 고소하는 경우가 가장 곤란하다”고 말했다.

“강한 조치 필요”

오철호 숭실대 행정학과 교수는 “권익위원회에서 악성 민원인에 대응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배포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현장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악성 민원으로 판단될 경우 즉시 상담을 중단하도록 하는 등 더욱 강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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