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추억> 우루과이 축구

2021.02.08 09:55:30 호수 1309호

공을 자유자재로 “아름다운 축구”

▲ 1924년 파리올림픽 우루과이 대표팀

[JSA뉴스] 1920년대 초반은 축구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막 끌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특히 1924년 파리올림픽 축구는 FIFA가 주관한 첫 대회이자 남미에서 온 축구팀들이 참가한 세계 최초의 국제 축구 대회였다.



1924 올림픽 축구에서 잉글랜드, 덴마크,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유럽의 일부 축구 강국들은 빠졌다.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헝가리, 스위스, 스페인,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의 참가만으로도 대회 라인업은 이미 상당했다.

최강

올림픽을 앞둔 우루과이 대표팀이 마주한 가장 큰 난관은 개최국 프랑스까지 가는 여비의 마련이었다. 협회 임원인 카스트로 마르티네스 라과르다가 해결책을 찾기 위해 스페인의 비고로 파견됐고, 결국 현지에서 잡은 친선 경기 및 협회의 다른 임원들이 사비를 들이는 것으로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데시하드호를 타고 프랑스로 떠난 우루과이 대표팀은 골키퍼인 안드레스 마잘리의 주도로 갑판에서 훈련 세션들을 가져가 긴 항해를 한 끝에 1924년 4월7일 비고에 도착했다.

스페인에 도착한 우루과이는 예정된 아홉 번의 친선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고, <엘 문도 데포르티보>를 포함한 유력지들은 “남미에서 온 챔피언들은 우리가 본 축구 선수들 중 최고였다”고 보도할 정도의 실력을 보여줬다.


친선 경기들을 마친 우루과이 대표팀에게 남은 일정은 프랑스로 넘어가 전 세계에 그 실력을 보여주는 일뿐이었다. 우루과이 대표팀은 대부분의 상대를 압도했다. 우루과이를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른 유고슬라비아에게 7-0 대패를 안겨주는 것으로 시작된 이들은 올림픽에서 정상까지 손쉽게 올라갈 것으로 예상됐다.

영광을 향한 길은 예상만큼 쉽지 않았다. 준결승에서 만난 네덜란드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였고, 32분에 선제골을 내준 우루과이 대표팀은 이미 전의를 약간 상실한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1924년 파리, 전설의 시작
제1회 월드컵까지 파죽지세

우루과이는 후반전부터 반격을 시작했다. 오프사이드 논란이 있은 첫 번째 골과 마찬가지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패널티킥 판정을 통한 두 번째 골까지 넣게 된다.

두 골이 무효라는 네덜란드의 이의 제기는 정당한 절차를 통해 거부됐고, 결국 우루과이 대표팀은 결승전으로 올라간다. 금메달을 놓고 스위스와의 일전을 벌이게 된 우루과이는 경기 시작 휘슬과 함께 경기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4만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확실한 3-0 승리를 거두며 우루과이 축구 전설의 개막을 알렸다.

우루과이 대표팀에 대해 가브리엘 아노는 <로토(레퀴프지 전신)>의 지면을 통해 이렇게 보도했다. 

“우루과이는 기하학적 전술보다는 신체 능력을 위주로 한 경기를 펼쳤고, 페인트와 방향 전환, 회피 동작을 거의 완벽한 수준까지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이고 빠른 플레이를 할 줄 아는 팀이었다. 공을 자유자재로 다룰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축구를 만들어냈다. 이들의 축구는 우아한 동시에 다양하고 빠르며 힘이 넘치고 효과적이었다.”

우루과이 대표팀의 기반은 1924‧1928 올림픽과 1930년 열린 제 1회 FIFA 월드컵까지 그대로 쭉 이어졌다. 

주장인 호세 나사시는 뛰어난 리더이자 나중에 라 가라 차루아(투지)라고 알려지게 된 우루과이 축구의 기본 원칙을 세운 선수였다. 우루과이의 정신을 나타내는 선수는 두 명이 더 있었다.

페드로 세아와 페드로 페트로네는 협력 플레이와 득점에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 선수였다. 1924올림픽에서는 세아가 네 골, 당시 19세였던 페트로네는 7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두 사람은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우승과 1930 우루과이 월드컵 우승을 거둔 팀의 일원으로 뛰었다.


우루과이 대표팀 부동의 스타는 호세 안드라데였다. 윙-하프인 안드라데는 유럽에서 유명해진 첫 유색인종 선수라 할 수 있었고, 뛰어난 드리블러이자 유능한 플레이메이커였다. 유명한 시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안드라데가 뛰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재능을 누구보다도 잘 표현했다.

우승, 우승…끝없는 전진
브라질 안방서 최대 이변

“우루과이의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는 정교한 동작들로 모두를 매료시켰다. 고무 몸을 가진 거인 같은 이 미드필더는 자기 진영에서 상대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도 공을 따낼 수 있었고, 공격이 시작되면 몸을 휘둘러 상대 선수를 모두 떨궈버릴 수 있었다. 한 경기에서는 공을 머리 위에 얹은 채로 필드의 절반을 가로지르기도 했었다.”

우루과이 대표팀은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초대 FIFA 월드컵 우승을 거두며 끝없는 전진을 이어갔다. 월드컵 결승에서는 또 한 명의 떠오르는 스타 루이스 몬티가 이끄는 남미지역 최대의 라이벌 아르헨티나를 꺾었다. 그러나 전 세계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어두운 시기에 접어들며 우루과이는 1950 FIFA 월드컵까지 국제 대회 출전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1950년 월드컵. 상대적으로 약체라 평가받던 우루과이는 브라질의 안방이라 할 수 있는 리우의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브라질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지금까지도 축구 최대의 이변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그 패배 이후 브라질에서는 그날의 참사를 뜻하는 ‘Maracanazo(마라카낭의 비극)’란 단어가 만들어졌다. 결승전에서 우루과이의 승리를 확정지은 골을 넣은 알시데스 기지아는 한때 “마라카낭을 침묵시킨 사람은 지금까지 단 세 명 뿐이었다. 교황, 프랭크 시네트라, 그리고 나”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최고

마라카낭의 비극은 브라질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있다. 이후 우루과이는 국제무대에서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지만, 2010 남아공 FIFA 월드컵에서 디에고 포를란과 루이스 수아레스 같은 스타들의 활약에 힘입어 결승까지 진출하는 역사를 다시 한 번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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