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재료 이력서> (45·46) 낙지젓, 멸치젓

2020.12.28 11:03:01 호수 1304호

조상들이 즐겨먹던 젓

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식재료 이력서>엔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이 담겨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 ⓒpixabay


낙지젓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됐을 때 지은 작품 ‘탐진어가(耽津漁歌)’ 중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漁家都喫絡蹄羹(어가도끽낙제갱) 
어촌에선 모두 낙지 국을 즐겨 먹고

탐진은 강진의 옛 지명으로 위 작품에 등장하는 낙제(絡蹄)는 곧 낙지를 의미한다.

絡(낙)은 ‘얽혀있다’, 蹄(제)는 ‘굽’ 혹은 ‘발’을 의미하니 여러 개의 발로 얽혀 있는 동물로 해석가능하다.


그래서 그 낙제가 우리말 낙지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蹄(제)보다는 가지를 의미하는 枝(지)가 더욱 합당한 어휘여서 낙지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아울러 낙지는 문어를 의미하는 八梢魚(팔초어, 여덟 개의 꼬리를 가진 물고기)와 대비해 小八梢魚(소팔초어)라고도 부른다.

이 낙지와 관련해 흥미로운 기록이 있어 첨부해 본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실려 있다.

「세상 사람들은 과거를 볼 때 낙제(落蹄)를 먹지 않는다. 그 음이 과거에 낙방한다는 의미의 낙제(落第)와 같기 때문이다.」

필자와 낙지의 인연은 군에 입대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 중부지방 내륙 한복판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생선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었다.

당시 기껏해야 말린 굴비 정도만 먹을 수 있었고 회는 그야말로 생소했던 단어였다.

그런데 군 입대를 앞두고 친구 두 명과 함께 무전여행을 하던 중 목포의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였다.

여러 아주머니들이 바다에 이어진 제방에서 무엇인가를 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과 허기로 인해 발이 절로 향했고 그 아주머니들이 커다란 함지박을 가득 채운, 말로만 들었던 세발 낙지를 파는 모습을 확인했다.

순간 친구들과 눈빛을 마주쳤다.

이어 아주머니들의 면면을 살피고 한 아주머니 앞에 가서 사이를 두고 쭈그리고 앉아 세심하게 낙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물론 거세게 입맛 다시는 일을 잊지 않았다.

잠시 후 그 아주머니 입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이 흘러나왔다.

“학생들 같은데 돈이 없는 모양이지?”

기다리던 반응이지만 뒤통수를 긁적이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군에 입대하려 휴학하고 여행을 떠났는데… 여러 날 길에서 고생하다….”

아주머니께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혀를 차며 가까이 와 앉으란다.


그리고는 당신의 아들도 지금 휴학하고 군에 복무하고 있다면서, 마치 자신의 아들 대하듯 선심을 베푸셨다.

물론 술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 밴댕이젓

우리가 그 아주머니 앞에 앉아 애처롭게 굴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 정도 연령대라면 우리 나이 또래의 자식이 있고 또한 군에 있을 것이란 예측으로 그 아주머니에게 애처로운 시선을 주었고 그게 먹혀들었던 것이다.

물론 의도적이었지만 그 날 처음으로 세발낙지를 배터지게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갯벌의 산삼으로도 불리는 낙지는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에 ‘맛이 달콤하고 회·국·포를 만들기 좋다.

한여름에 논 갈다 지치고 마른 소에게 낙지 네댓 마리를 먹이면 기운을 차린다’라고 기록돼있다. 

앞서 이덕무는 과거를 앞둔 시점에는 낙지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의학에서는 수험생들의 건강 유지에 가장 좋은 음식 중 하나로 낙지를 권장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갯벌의 산삼… 건강 유지에 으뜸 
성질 급해 잡히자마자 죽어 ‘멸치’

멸치젓

조선시대 후기에는 멸치가 대량으로 어획되고 있었음을 문헌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나 그 이전에도 많이 잡히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를 염두에 두고 성현의 작품을 감상해 보자. 그의 문집인 <허백당시집>에 실려 있다. 

彌魚(미어)
멸치

茫茫滄海窮無涯(망망창해궁무애) 
아스라이 끝없이 푸른 바다는
百萬魚龍之所家(백만어룡지소가) 
수많은 물고기들이 머무는 곳인데
弱肉强食互呑噬(약육강식호탄서) 
약육강식에 따라 서로 먹고 먹히면서
次第驅迫相牽拏(차제구박상견나) 
차례로 구박하고 서로 끌어 당기는데
其中彌魚尤細鎖(기중미어우세쇄) 
그 중 미어는 더욱 세쇄하여
蔽擁水面紛如麻(폐옹수면분여마) 
삼처럼 어지럽게 수면 뒤덮고
紛紛蔽水水爲黑(분분폐수수위흑)  
어지럽게 수면 가려 물 시커멓게하니 
白鷗蹴浪搖銀花(백구축랑요은화) 
갈매기는 물결 차며 은 꽃 흔들어대네
有時風捲湧出岸(유시풍권용출안) 
때로 바람에 밀려 언덕으로 솟구쳐 나와
亂如山積塡泥沙(난여산적전이사)  
산처럼 어지럽게 쌓여 갯벌 메우네 
漁人乘舟齊擊楫(어인승주제격즙) 
어부들은 배 타고 일제히 뱃전 두드리면서  
爭持網罟來相遮(쟁지망고래상차) 
서로 다투어 그물 쳐서 잡아 올리는데
年年取此作枯腊(년년취차작고석) 
해마다 이것을 마른 포로 만들어
充牣甔石排千家(충인담석배천가)  
항아리에 가득 채워 여러 집에 배포하니
海濱人人飽腥味(해빈인인포성미)  
해변 사람들은 저마다 비린 맛에 배불러 
縱値飢歲無咨嗟(종치기세무자차) 
설령 흉년 만나도 탄식하지 않는다네
我行到海親自覩(아행도해친자도) 
내가 바닷가에 이르러 친히 보았으니
此事堪向山人誇(차사감향산인과) 
산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하네 

위 작품은 1493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했던 성현이 바닷가에 이르러 목격한 장면을 풀어낸 시로 제목에 등장하는 ‘彌魚(미어)’가 멸치를 지칭하는 말이다.

彌(미)는 ‘미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두루’ ‘널리’의 의미로도 활용되는데, 이 나라 해안 곳곳에 널리 퍼져 있는 물고기라 미어라 칭한 듯 보인다. 

또 이어지는 내용을 살피면 단번에 멸치에 관한 이야기라는 감이 들어온다.

즉 멸치는 그 명칭에 혼선이 있었을 뿐이지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 대량 어획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멸치가 조선 후반부에 이르면 또 다른 이름인 ‘旀魚(며어)’로 등장한다.

일설에 의하면 멸치는 성질이 급하여 잡히자마자 죽는다 하여 ‘멸어(滅魚)’ 또는 ‘멸치(蔑致)’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물고기의 이름과 관련된 기본 상식에 접근해보자.

대개의 물고기 이름이 ‘치’ 혹은 ‘어’로 끝을 맺는데(물론 예외적으로 ‘미’ 혹은 ‘기’등으로 끝맺는 경우도 있음), 그 이유에 대한 상식이다.

통설에 의하면 물고기에게 비늘이 있고 없고에 따라 그렇게 정해진다고 한다.

‘치’로 끝나는 물고기는 비늘이 없고 ‘어’로 끝나는 물고기에는 비늘이 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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