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허균이 다시 누나의 집을 찾았다. 누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하기 위함이었다. 살아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던 누나가 그나마 죽어서는 그 집의 귀신으로 누나의 마지막 길에 모두가 경건하게 대해주고 있었다.
누나의 주검에 애도를 표하고 곧바로 누나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누나에게 그토록 모질게 대했던 시댁의 배려가 있었으나 허균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하루 빨리 누나에 대한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품 정리
허균이 그 유품들로 위안 삼으며 다시 공부에 매진하고 급기야 생원시에 급제했다. 그를 빌미로 한참 공부에 매진하고 있을 무렵에 큰 형님인 허성이 균을 찾았다. 허성이 통신사로 왜를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허균과 나이 차이가 무려 스물한 살이나 되는 배 다른 형이지만 언제나 동생들을 아껴온 다정한 형이었다.
“그동안 학업에 열심히 정진했느냐.”
아버지를 일찍 여윈 균으로서는 큰 형 허성이 아버지와 다름없었다.
“네 형님, 이번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로 공부에 더욱 정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신 일은 잘 되었는지요.”
“그래서 너를 찾은 게다.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서 말이야. 겸사겸사 너의 의견도 듣고 싶고.”
허균이 귀를 곧추세웠다.
“균아, 너는 신념과 현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저는 신념과 현실은 일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순간 어리석은 대답을 했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답은 둘 사이의 대화에 이미 내재되어있었다.
형님의 의중을 꿰뚫었어야 했다.
굳이 형님이 그렇게 질문한 이유에는 형의 남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했다.
바로 허성이 말을 이었다.
“네 의견이 전적으로 옳아. 그런데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으니 문제로구나.”
“형님, 어떠한 일인지 알려주실 수 없는지요.”
“내 말할 터이니 너도 심도 있게 생각해 보거라.”
형이 통신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과 함께 왜를 다녀왔다. 드러내 놓지는 않았으나 한눈에도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낌새를 챌 수 있었다.
그래서 통신사인 황윤길은 전쟁의 징후가 있음을 조정에 보고했다.
물론 그의 보고는 당연한 처사였다.
그런데 문제는 부사로 동행한 감성일의 보고였다.
김성일도 왜의 전쟁 준비에 대해서 이견이 없음에도 서인에 속하는 황윤길과는 달리 동인에 속한다는 이유로 거짓보고를 올렸다.
그런 연유로 조정에서는 서장관으로 통신사를 수행한 허성에게 왜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올리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허균의 머릿속으로 순간 스승이었던 이달이 스쳐지나갔다.
그 이달의 스승이었던 박순 대감도 서인이었다.
아울러 스승의 경우도 서인에 속했지만 항상 올곧았다.
“형님, 그럼 형님의 생각은 어떠신데요.”
“그러니까 그것이 문제 아니더냐. 같은 동인이라고 해서 명백하게 거짓인데 그를 편들어서 거짓으로 보고를 올릴 수는 없는 일 아니냐.”
“정도를 걸으면 되는 게 아니온지요.”
“정도라.”
“정도가 아닌 길은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라 배웠습니다. 아울러 지금은 아니더라도 거짓은 훗날 더 큰 재앙을 불러들일 것입니다.”
“네가 그리 답해주니 나도 마음이 놓이는구나.”
“왜의 상황이 그리도 심각한지요.”
누나를 보내고 공부에 매진…생원시 급제
허성, 허균에게 신념과 현실에 대해 묻다
“지금 당장 일은 아니지만 그에 대한 대비를 우리도 세워 놓아야 할 게야.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그들이 도발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말이다.”
허성이 말을 끊고 근심스런 표정으로 균을 주시했다.
“형님, 시원하게 말씀 주십시오.”
“일의 본질이 흐려지리라는 이야기다.”
“그 말씀은.”
“두 가지 측면이란다. 먼저 왜의 전쟁 도발 문제가 정쟁으로 변화되리라는 이야기다. 왜의 전쟁 도발 여부는 강 건너가고 그 문제가 빌미 되어 동인과 서인 간의 세 싸움의 장으로 변질될 거라는 이야기야.”
허균이 가만히 생각에 잠겨들었다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은요?”
“임금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어느 편을 들겠느냐의 문제야. 임금은 여하한 경우라도 전쟁을 원치 않을 거란 이야기로, 임금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편에 설 것이란 이야기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 아니겠니.”
“정확한 보고를 올려도 그리 되는지요.”
“왜 내게 다시 보고를 올리라했는지 그 이면을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오지 않겠느냐.”
“결국 임금은 전쟁 도발 여부를 떠나 동인 편에서 일처리하려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러니 마음 속 깊이 유념하도록 하거라.”
깊게 한숨을 내쉬는 허성의 얼굴에 근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허균이 화제를 바꾸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형님, 이참에 돌아가신 누나의 시 작품들을 엮어 보려 해요.”
“초희의 시를 말이냐.”
“그래야 누나가 저 세상에서라도 활짝 웃지 않겠습니까.”
여인이, 그것도 살아 있지 않은 양반집 여인의 시를 묶어 책을 내놓는다.
허성으로서는 즉각 답하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시댁 집안과는 이야기 되었느냐.”
“시댁에는 별도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을 듯싶습니다.”
“하기야, 아이를 그리도 못쓰게 만들었으니 그 집안에서 관심이라도 기울이겠느냐마는. 네가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면 그리 하도록 하거라.”
“고맙습니다, 형님.”
“참으로 박복한 아이였지, 그 아이를 생각하면 안타깝구나.”
누나의 시
워낙에 영특해서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던 누나였다.
“그리고 그 시를 책으로 엮어서 유성룡 대감께 서문을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우의정으로 있는 그 유성룡 대감을 이름이냐.”
“맞습니다.”
“네가 그 사람을 알고 있느냐?”
“허봉 형이 살아계실 적에 잠시지만 그 분으로부터 글공부를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대감께 서문을 받으면 금상첨화지.”
여인의 시집에 서문을 써 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