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우의 시사펀치> 단식과 꼼수

2019.12.02 10:18:32 호수 1247호

1983년 5월18일에 일이다.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에 의해 정치 규제에 묶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김영삼)이 5·18 발생 3주년을 맞이해 상도동 자택서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생명을 담보로 단식투쟁에 돌입한다.



김영삼은 ‘광주사태와 민주투쟁서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전두환 독재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이 투쟁을 전개한다’는 성명과 구속인사 전원 석방, 전면해금, 해직 교수 및 근로자와 제적 학생의 복직·복교·복권, 언론 자유, 그리고 개헌 및 국가보위입법 회의 제정 법률 개폐의 5개항을 요구한다.

가택연금 상태였던 그의 단식투쟁이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알려지자 그의 지지자들이 동조 단식에 들어갔고, 학생들은 전국적으로 시위를 이어갔다. 그러자 전두환은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인 권익현을 보내 김영삼에게 해외로 출국을 요구한다.

김영삼은 “나를 시체로 만들어 외국으로 내보내라”며 신군부의 요구를 거절하고 단식을 지속한다. 결국 신군부는 김영삼의 가택연금을 해제하지만, 그의 단식은 지속되고 급기야 생명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에 직면하자 김영삼을 살리기 위해 각계서 단식을 중단하라는 간곡한 권유가 이어지고 급기야 단식 23일째 김영삼은 단식을 중단하며 병원으로 이송되기에 이른다. 당시 병원으로 이송되면서 언론에 노출된 초췌하기 이를 데 없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될 정도다.

여하튼 김영삼은 목숨을 불사할 정도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고, 이어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해 1985년 실시된 총선서 돌풍을 일으키며 이 땅에 민주화를 앞당긴다.


이후 김영삼이 행했던 단식은 정치투쟁의 수단으로, 혹은 자신의 잇속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대중화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급기야 최근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절체절명의 국가 위기를 막기 위해 저는 이 순간 국민 속으로 들어가 무기한 단식 투쟁을 시작하겠다. 죽기를 각오하겠다”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그가 목숨을 담보로 요구한 조건은 세 가지다. 지소미아 연장과 공수처 신설 철회, 그리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폐기다. 그가 내건 조건들을 살피면 참으로 의아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대한민국의 운명과 결부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지소미아에 대해서다. 해당 건이 불거졌을 때 필자는 <일요시사>에 게재했던 ‘문재인정권의 주적은…’이란 제하로 지소미아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었다. 아울러 한일 관계는 멀지 않은 시간에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 했다.

그런데 필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한국과 일본 나아가 한국, 미국, 일본의 3국 관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누구라도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게다. 마치 그를 입증하듯 지소미아는 정상화됐다.

다음은 이른바 패스트트랙 건에 대해서다. 이 대목을 명확하게 정리하자. 공수처 신설과 선거법 개정 조항은 황 대표가 언급한 국가의 운명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이 두 문제는 그저 정치꾼들의 정쟁거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 대표는 국가 위기를 운운하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단식투쟁을 선언했다. 그런데 참으로 웃기는 대목이 발생한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방문하자 “체력을 계속 소모하면서 단식을 하면 오래는 못할 것 같다”고 언급한 점이다.

황 대표는 국가 운명을 거론하며 국민을 우롱하고 있다. 결국 단식의 본질은 당내의 불안한 입지 회복을 위한 지독한 꼼수로, 모든 일을 꼼수로 일관하는 황 대표는 이쯤서 때려치우라는 이야기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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