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운우의 정 자주 나누세’
운우의 정이라. 자신의 전공 아니던가.
그런데 그 점잖은 촌은이 노골적으로 그를 드러냈다.
흡사 그 글귀가 자신의 방문을 미리 예견하고 지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일어났다.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에 이 방의 주인이 사용하고 있을 법한 앙증맞은 화장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앞에서 거울을 주시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드디어 매창 등장
턱 선보다 넓어 보이는 이마 그리고 서글서글한 눈매, 오뚝하지는 않으나 반듯하게 내리뻗은 코와 굳게 다문 입술, 두툼한 양 볼. 거울 속 허균이 자신을 바라보며 음흉스럽게 웃고 있었다.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전신이 거울에 비쳐지고 있었다.
신장에 비해 훨씬 커 보이는 두상이 조금은 어색해보였으나 그리 흉이 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앞에서 허리에 손을 얹어보았다.
거울의 주인이 자신을 주시하는 듯이 생각되자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냈다.
“나리, 소인 고생원입니다.”
그 소리에 급히 몸을 돌려 자리 잡고 앉으면서 대답 대신 밭은기침을 내뱉자 문이 열리며 고생원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두 명의 여인이 따랐다.
다시 밭은기침을 내뱉으면서 허균이 은근한 시선으로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30이 거의 다 되어 보이는 여인과 16∼17세 정도의 앳된 모습의 여자가 시선에 들어왔다.
시선을 나이 많은 여인에게 주었다. 나이로 보아 말로만 듣던 매창이 바로 저 여인일 터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아니 조금은 작아 보이는 외형과 반듯하면서도 조금은 튀어나온 듯이 보이는 이마, 반짝이는 눈동자와 역시 반듯하게 뻗어 내린 코, 앙다문 입술. 어디서인가 많이 보았음직한 얼굴이었다.
순간 방금 전 거울에 비쳐본 자신의 모습과 닮아 보이는 얼굴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가벼이 신음을 흘리며 다시 한 번 밭은기침을 해댔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소녀 매창이 판관 나리를 뵈옵니다.”
자세를 잡고 큰 절로 예를 올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맑지 못했다.
순간적인 떨림이 그 목소리에 함께하고 있었다.
“주인을 제쳐두고 내가 먼저 자리 차지하고 있었소이다. 나 허균이라는 사람이외다.”
답을 하는 허균의 목소리 역시 맑지 못했다.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
허균이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다시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
“나리의 집인 양 편히 자리하십시오.”
허균의 속내를 매창이 읽은 모양이었다.
“고맙소. 내 그리하리다.”
대답하는 허균의 얼굴로 매창의 시선이 박혔다. 매창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이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나리, 술상 올리도록 할까요?”
고생원이 둘의 인사가 끝나자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나섰다. 허균의 시선이 매창에게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매창의 얼굴이 살짝 한쪽으로 기울었다.
“이 방의 주인에게 물어보도록 하시게나. 어차피 나야 객이지 않은가."
허균이 말을 마치자 매창이 앳된 여자, 별을 바라보고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흡사 둘만의 무언의 행위인 듯이 앳되어 보이는 계집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30이 다 되어 보이는 여인…떨리는 목소리
외모 특출 나지 않지만 묘한 느낌의 여인
별이 나가자 잠시 고요가 흐르기 시작했다.
허균이 시선을 ‘이화우……’의 시가 걸려있는 곳으로 주었다.
매창의 시선이 허균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기를 잠시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리께서 이 미천하기 짝이 없는 소녀를 찾아주시어 감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매창은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미천하기 짝이 없다니. 그렇다면 이 허균은 무엇이고 촌은 선생은 또 어떻게 되는 게요. 그러면 나나 촌은도 한낱 미천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오?”
매창이 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소녀가 어찌 나리와 촌은 선생께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겠사옵니까.”
매창의 곤혹스러워함에 허균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건 그렇고 촌은 선생의 소식은 들으시오.”
물론 매창과 촌은이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허균이 모를 리 없었다.
그녀의 마음의 상태를 흘낏 스치고 싶었던 탓이었다.
마치 허균의 속내를 읽었다는 듯 매창의 입에서 다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얼굴에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순간 묘한 느낌을 주는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기생들처럼 딱히 외모가 뛰어나다든가 특별나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기생으로서는 퇴물에 가까울 나이건만 예전에 마주했던 여인들과는 다른 중압감이 찾아들었다.
그것은 단지 촌은의 상대였다는 이유만은 아닌 듯했다.
“이미 이화우와 함께 가버리신 님이십니다.”
촌은 유희경, 천민출신으로 선조 시대 백대붕과 함께 당대 시단을 장악했던 인물로서 매창으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고 2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 그러나 임진란이 터지자 의병을 조직해 전선으로 달려 나간 애국자였다.
“그래서 지금은 그 사람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게요.”
“이미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니…….”
“허 허, 그럼 10년이 흐른 이 시점에 이화우와 함께 가버린 임을 대신해서 태풍우에 찾아온 게 되는가.”
허균이 슬쩍 농을 걸었다.
“감히 천하의 나으리를 어찌 하찮은 저와 비교하시는지요.”
“천하의라는 의미는 무엇이오?”
정식으로 맞다
그 소리가 듣기 좋지 않았다. 천하의 난봉꾼의 그 ‘천하의’로 들렸던 탓이다.
“이미 나리의 명성은 이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요. 그러니 ‘천하의’ 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옵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난봉꾼으로 말이오?”
난봉꾼이라는 말에 매창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너무나 지나친 비약이시옵니다. 나리의 명성, 천하에 거칠 것이 없는 자유인이라는 의미로 알고 있사옵니다.”
“자유인이라.”
“그러하옵니다, 나리. 자유인 말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