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가 많은 연말연시는 술집들에겐 대목 중의 대목이다. 그러나 모처럼 느끼는 돈맛에 훼방을 놓는 이들이 있다. 술을 마신 뒤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무전취식범들이다. 술값을 내지 않기 위해 벌이는 이들의 행각은 날로 진화하고 있다. 염산을 마시는가 하면 조폭문신을 보여주며 협박을 하기도 한다. 술값 시비로 주인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흉흉한 사건도 비일비재하다.
지난해 8월경 어느 저녁 이모(33)씨는 한 술집에 들어가 혼자 술을 마셨다. 밤새도록 그가 먹고 마신 술과 안주는 모두 54만원어치. 양주 세 병과 고급 안주들을 망설임 없이 주문해 먹은 결과였다.
어느덧 시간은 다음 날 새벽 4시가 됐고 주인 A씨는 영업을 마치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이씨가 갑자기 쓰러져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배를 잡고 술집 바닥을 구르던 이씨는 종업원들에게 “물맛이 왜 이러냐. 너희가 이상한 물을 줘서 이렇게 됐으니 책임져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물 대신 염산 꿀꺽
당황한 A씨는 급히 구급차를 불러 이씨를 병원으로 보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소동에 놀란 A씨는 이씨가 앉았던 테이블을 살펴봤다. 이씨가 마셨다는 물 컵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 외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A씨에게 옆 테이블에 앉은 손님이 한마디를 건넸다. 이씨가 쓰러지기 전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서 물 컵에 넣었다는 것. 확인 결과 이씨가 남긴 가방에서 염산이 담긴 생수통이 발견됐다.
조사 결과 공짜 술을 마시려고 계획한 이씨가 약국에서 염산을 사 와 술집에서 물에 타 마신 뒤 연기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병원에 간 이씨는 위세척을 한 뒤 도망갔다 지난해 11월에야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결국 이씨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울북부지법 형사2단독 김춘호 판사는 공갈, 절도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씨에게 징역 8월을 선고했다고 지난달 27일 밝혔다.
협박으로 술값을 떼먹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여자 주인이 있는 술집의 경우 조폭행세로 겁을 주고 공짜 술을 마시는 수법이 자주 쓰인다. 웃통을 벗고 문신을 보여주거나 흉기를 들이대며 생떼를 부리는 방식이다.
지난해에는 경북 포항과 의성 등지에서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며 유흥업소 등에서 공짜 술을 마신 조폭들이 검거됐다. 포항 S파 조직원 P(43)씨와 의성 H회 조직원 K(39)씨 등 36명의 조폭이 그들이다. 이들은 포항의 한 유흥업소 업주에게 빌려준 돈을 갚으라며 감금한 뒤 폭행하는가 하면 유흥업소를 돌며 업주들을 협박해 1100만원 상당의 공짜 술을 마셨다.
그런가 하면 술값 시비를 벌이다 주인을 폭행하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바가지를 씌운다며 주인을 폭행한 남성이 덜미를 잡혔다. 충북 충주 경찰서에 따르면 Y(31)씨는 충주시에 있는 한 가요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Y씨가 마신 술값은 모두 67만원. 돈이 없었던 Y씨는 여주인에게 “왜 바가지를 씌우느냐”며 바닥에 넘어뜨리고 폭행을 행사했다.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힌 Y씨는 그 길로 줄행랑을 쳤고 술잔에 남은 지문을 감식한 끝에 경찰에 잡혔다.
술집 여주인을 살해한 탈북자 사건도 벌어져 충격을 준 바 있다. 사건의 장본인은 지난 2007년 11월 탈북한 양모(34)씨. 양씨는 2008년 부산에 정착해 가족도 없이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 소심한데다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탓에 터놓고 지낼 친구도 많지 않았던 양씨.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다.
탈북한 뒤 일용직노동자로 일하며 생활을 해나갔지만 지난해부터는 이마저도 구하기가 힘들어 나라에서 주는 보조금에 의지해 근근이 살아갔다. 가난과 외로움에 지친 양씨를 달래주는 유일한 친구는 술이었다. 지난해 6월경에도 그는 부산시 기장군의 한 카페에서 술을 마셨다. 술친구도 없이 혼자 카페에 찾아가 여주인 B(53)씨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공짜술 먹으려 살인까지
이날은 양씨가 유일한 손님이었던 터라 두 사람의 술자리는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화기애애한 술자리는 곧 참혹한 현장으로 변했다. 술값이 화근이었다. 비싼 양주를 시킨 탓에 술값은 25만원이 나왔고 술값이 없다는 양씨의 말에 B씨의 태도가 돌변하면서 그를 자극하기 시작한 것. B씨는 “돈도 없는 새끼가 왜 술을 먹냐”는 막말로 양씨를 무시했다. 이에 격분한 양씨는 B씨의 목을 졸라 실신시킨 뒤 주방에서 흉기를 가져와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범행이 벌어진 것은 오전 1시10분쯤. 손님도 종업원도 없는 카페에는 정적만이 감돌았고 뒤늦게 자신의 범행을 깨달은 양씨는 현금 6만5000원을 빼앗은 뒤 달아났다. 그가 숨은 곳은 기장군과 금정구 일대 야산. 이곳에서 양씨는 풀뿌리 등을 먹으며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범행도 세상에 드러났다. 범행 다음 날 카페를 찾은 손님에 의해 A씨의 죽음이 경찰에 알려지게 된 것. 이에 경찰은 양씨를 용의선상에 올렸고 양씨의 집인 기장군 모 아파트에 잠복했다. 그리고 며칠 후 허기에 지쳐 집을 찾은 양씨는 경찰에게 덜미를 잡혔다.
지난해 3월에는 술값을 내지 않겠다고 소란을 피워 신고를 당하자 홧김에 여주인을 살해한 40대 남성의 사건도 벌어졌다. 경북 안동시 모 주점에서 술을 마셨던 김모(41)씨는 술값을 내지 않고 버티다 여주인 손모(41)씨와 싸움이 벌어졌다. 참다못한 손씨는 결국 경찰에 신고를 했고 이를 본 김씨는 격분해 주방에서 흉기를 가지고 나와 손씨를 살해했다.
김씨는 경찰에서 “주인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